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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팔라닉 <파이트 클럽>, 실존의 근원, 몸을 찾아서

로드365 2004. 4. 7. 21:06


실존의 근원, 몸을 찾아서: [파이트 클럽] [카트린 M~]

미국 젊은이들의 컬트작가 척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과 프랑스의 미술 잡지 편집자 카트린 밀레의 [카트린 M의 성생활]은, 일견 ‘발칙하다’는 것 외에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어 보인다. 미국과 프랑스, 남자와 여자, 소설과 고백록, 폭력과 무정부주의 대 성의 해방이라니. 게다가 문체와 시선, 그리고 세계관 역시 전혀, 전혀 닮은 데가 없는 책들이 아닌가. 그러나 그 ‘발칙함’의 근원을 조금만 캐어보면 의외로 이 두 책이 흥미진진한 접점에서 만난다는 걸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폭력’과 ‘성’을 기존의 윤리 체계나 정서와 전혀 무관한 독립적인 ‘몸’의 체험으로서 탐구하는 태도 자체의 전복성이다. 팔라닉과 밀레는 몸의 체험을 통상적 도덕관념이나 감상성에서 완전히 분리시켜 감각적 쾌감 자체의 의미를 집요하게 파헤치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몸’에 대한 천착을 기존의 문명을 비판하고 대안적 문화를 꿈꾸는 시발점으로 삼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공통점을 공유한다.

숱한 싸구려 포르노나 육체를 파괴하는 하드고어들과 이 작품들이 선연히 갈라지는 이유는, 이 두 작품에서는 몸의 체험에 대한 천착이 단지 작가와 독자의 도착적 욕망을 배설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실존을 느낄 수 없는 현대 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과 대안적 문화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인식이 개인적인 쾌감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의 ‘집단적'인 행동을 수반하고 또한 촉발한다는 것도.

요컨대 집단 난교 파티인 ‘파르투즈’나 주먹싸움의 쾌감에서 삶의 의미를 느끼는 ‘파이트 클럽’은, 다른 방식으로는 삶에서 ‘살아 있다는 느낌’이라든가 ‘행복’을 느낄 수 없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이러한 위기의식이 개인적인 것이 아니라 그 사회 성원들의 상당수가 집단적으로 공유하는 것임을 전제한다. 몸이 느끼는 원초적인 감각과 경험에 독자적인 권위를 부여하고 그로부터 현대 서구문명의 일상 속에서 행방불명된 인간의 실존을 찾고자 하는 엄숙한 시도라고나 할까.

[파이트 클럽] 인식적 절망의 막다른 골목

현대세계가 몸을 타자화시키는 기제 중 한 가지는 근대 이후 자본주의와 기술의 발전이 가져온 몸의 물화다. 기계는 인간의 몸을 대체하는 방향으로 나날이 발전을 거듭했고, 과거에 우리 몸을 움직이고 땀 흘리는 노동의 보람은 이제 마우스 클릭 한 번, 혹은 계기판의 버튼을 눌러 해내면 된다. 현대인은 몸으로 체험하고 성취할 수 있는 수많은 가능성을 잊고 몸을 생명 없는 탐미의 대상으로 전락시킨다. 수많은 몸짱과 얼짱들이 커다란 포스터에 인쇄되어, 알지도 못하고 아무 관계도 없는 누군가의 방에 붙어 정신적 육체적 자위행위에 소비되는, 조직적인 몸의 허위를 생산하는 작금의 후기자본주의적 현실. 몸은 공허한 이미지로 재생산되고 그 과정에서 무력화된다. 이제 몸은 더 이상 영혼의 신성한 그릇조차 되지 못한다. 영혼도 사망선고를 받고 통조림이 되어 대량으로 팔리는 형국이 되고 말았으니.

척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책세상)은 후기 자본주의가 극도로 진전된 미국 문명의 노예가 되어 있는 현대 젊은이들의 삶에 대해 황산을 들이붓듯 신랄하고 뼈아픈 독설을 퍼붓는다. 말하자면 그것은, 도덕이나 윤리나 정신이나 영혼 - 삶과 사회와 문명의 존재를 정당화하던 모든 실체 없는 믿음들의 철저한 허구성, 공허함에 대한 처절한 인식에서 나온다. 아무도 도덕이나 윤리나 정신이나 영혼에 신경 쓰지 않는다. 그들의 자아, 그들의 영혼은 돈과 재산과 가족과 친척과 집과 가구로 정의되는 정형화된 욕망일 뿐. 유일하게 자기 것으로, 분명히 자기 것으로 남아 있는 건 물화된 육신뿐이다. 팔라닉 특유의 블랙유머는 독자와 독자가 소속한 사회의 허위의식에 다리가 휘청거리도록 연타를 가한다. 부자연스럽게 물화된 육체에 대한 냉소는 통렬하다. 파이트 클럽의 성원들은 호화로운 허벅지에서 뽑아낸 지방에 양잿물과 로즈메리를 섞어 최고급 비누를 만들고 다시 그것을 지방의 주인에게 돌려보낸다. 한 때 죽도록 사랑하던 개와 고양이들이 오븐 속에서 조직적으로 살해된다. 이 곳에서 사랑과 감상, 행복과 이상은 인간 뒤처리 휴지나 다름없는 개소리에 불과하다.

[파이트클럽]에서 인간은 이미 개개의 독창적인 영혼을 소유한 세계의 중심이 아니다. 르네상스의 휴머니즘적 이상은 모두 폐기처분되어 마땅한 시대착오적 환각에 불과하다. “당신은 아름답지도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나 다를 바 없는 퇴비더미에 소속되어 있을 뿐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어떤 의미도 없는 삶이라는 총체적 허위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유영하는, 화학적 작용으로 똘똘 뭉친 유기적 개체들일 뿐이다. 삶이나 행복은 그 자체로 의미를 갖는 게 아니라, ‘죽음’이라든가 ‘불행’의 존재를 확인받아야 비로소 ‘대립항’으로서만 ‘실존한다는 사실’을 마음이 아니라 머리로, 그것도 억지로 간신히 인식할 수 있는 것이다.

고급 비누를 만들기 위한 인간 제물로 쓰려고 한 대학생에게 죽음의 위협을 가했다가 살려주면서, "오늘 저녁은 이제까지 먹어본 중 가장 맛있는 저녁이 될 것이며, 내일 아침은 이제까지 살아온 중 가장 아름다운 날이 될 것이다"라고 짐짓 자선이라도 베푸는 양 말하는 타일러. 그러나 타인의 죽음과 파괴는 일시적인 진통제, 한심스러운 대증 요법일 뿐이다. 타자의 시한부 인생과 죽음과 상실과 깊은 고뇌는 여전히 찰나적인 여흥이며 구경거리에 불과하기에, 말라는 곧 인생의 일분일초를 만끽하는 법을 까맣게 잊을 것이다. 대립항이 눈앞에 상존하지 않으면, 삶과 생존의 행복은 신기루처럼 한순간에 휘발해 버린다. 그리고 이것이 그들의 딜레마다. 그리하여 ‘나”’ ‘온전히 자기 것’인 유일한 자산, 유일한 현실인 육신의 감각, 육신의 가능성을 극대화함으로써 삶을 실감하고자 시도한다.


빌어먹을. 이건 무효야. 다시 한 번 기회를 줘. 타일러가 말했다. “유효야” 그리고는 내게 재빨리 펀치를 날렸다. 퍽. 옛날 만화에서 봤던 스프링에 달린 권투 장갑이 불쑥 튕겨져 나오듯, 그의 주먹이 가슴 중앙에 정통으로 꽂혔고, 나는 그대로 고꾸라져 뒤에 세워진 차에 부딪치고 말았다. 타일러는 목을, 나는 가슴을 매만지며 몸을 일으켰다. 뭔가 새로운 느낌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우리는 아직 살아있었고, 앞으로 얼마나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하며 이런 짜릿함을 느낄 수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파이트 클럽, 63)


스스로 느끼는 짜릿한 고통과 몸의 힘에 대한 자각, 그 희열은 곧장 ‘살아갈 만한 이유’로 격상된다. 살아 있다는 것을 한 순간이나마 느끼고 그들을 구속하고 있는 두려움과 혐오, 환멸에서 한 순간이나마 해방되기 위해서 자기 몸을, 또한 타인의 몸을 파괴하고 훼손하고 두려움 없이 온전히 고통과 희열을 받아들이는 것. 여기서 그들은 ‘돈이나 가족이나 신분’으로 평가받지 않는다. 오로지 몸과 몸으로 느끼는 감각적 충격, 고통으로 소통할 뿐. 해방과 탈출. 구속하는 모든 것의 파괴. [파이트 클럽]에서 가장 뚜렷한 정서는 그것이다. “우리 세대는 세계대전이나 대공황을 겪지 않았어요. 하지만 우리에게는 영적인 대전이 있어요. 대공황은 우리의 삶이에요. 영적인 대공황 말이에요.” 이렇게 영적 죽음이 철저하게 진행된 상황에서 순전히 물리적 육체성 속에서 물리적 화학적 작용으로서의 삶이나마 극도로 ‘실감’해보고 싶다는 소망. 그건 말하자면 가망 없는 사형수에게 허락된 마지막 담배 한 모금과 같은 위안일 뿐이다. 뒤처리 휴지나 다름없는 초라한 육신의 물리화학적 작용으로서의 ‘고통’이 마지막 삶의 근간이 되었다는 절망감은 팽배한다. [파이트 클럽]이 약속하는 건 바로 폭력 속에서 육체를 파괴하고 파괴당하는 고통은 평등하고 해방적이며, 그 속에서 역설적으로 가장 강렬하게 육체의 존재, 자아의 실존을 인식할 수 있다는 모순이다. 결국 그 후에도 그 전에도 남는 것은 그 초라하고 너덜너덜한 육신의 실존이 유일하게 그들에게 남은 실존의 척도라는 절망감.

형이상학적 인식의 철저한 실패를 몸으로 증언하듯, 척 팔라닉은 판타지와 현실을 분간할 수 없는 정신분열증적 글쓰기를 구사한다. 이 소설에서 독자에게 유일하게 분명한, 구역질이 날 정도로 생생한 실감으로, 간단없는 현실로 인식되는 건 “코가 깨져 가지처럼 푹 주저앉았거나, 눈 밑에 꿰맨 자국이 있거나, 아니면 너덜거리는 턱이 철사로 꽁꽁 묶여 있는” 훼손된 육체와 잿물에 살이 타들어가는 고통의 생생한 묘사와 그 세부묘사가 자아내는 실감이다. 그 어떤 대화도 실제로 벌어졌다고 믿을 수 없고 그 어떤 배경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을 수 없고, 죽음과 삶의 경계조차 모호한 세계. 이 세계에서 분명히 리얼하다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대목들은, 인간이 ‘코딱지를 흥, 하고 날리는’ 존재라는 인식과, 입안에 물컹물컹 흘러들어가는 비린내 나는 피 맛의 공감각적 묘사다. 육신의 물리화학적 작용에 대한 세부묘사는 그 외에는 어떤 인식적 확실성도 담보할 수 없다는 황량한 절망감을 다시 증언한다.

척 팔라닉의 처참한 비전이 고장 난 폐쇄회로처럼 공회전을 계속하게 되는 건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다. 팔라닉의 문명 비판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예리하고 적확하다. 그러나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이 추구하는 몸의 실존은 새로운 문명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문이 아니라 허무와 무의미, 권태의 공포에 몰려 도망치다 도달한 최후의 막다른 뒷골목이다. 팔라닉은 현 문화의 파괴자이고, 만물을 부정하는 자의 역할에 충실할 뿐, 그 어떤 새로운 출구도 보지 못한다. 타자와 자신의 몸을 파괴하는 쾌감은 “이런 짜릿함을 느끼기 위해” “얼마나 오랫동안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모순을 수반한다. 쾌감과 존재의 실감이 심화되고 첨예해질수록 파멸에 그만큼 다가가야만 하기 때문에.

몸을 훼손함으로써 역설적으로 실존의 인식을 획득하고자 하는 욕망은 곧 죽음의 갈구에 다름 아니다. 이 때문에 팔라닉은 종국에는 몸을 두고도 끝내 인식적인 분열을 일으킨다. 몸의 생존본능과 찰나의 실존을 추구하는 파괴본능마저 분열해, 몸마저도 ‘나의 것’이 아니라 타자에게 빼앗겨 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타일러의 입. 나는 타일러의 손이 된다. 극단적인 파괴 충동마저 ‘나’의 주체적 인식은 아니다. 육체는 이미 내 것이 아니다. 타인의 것이다. 타자에 빙의된 자아의 무기력함은 더 이상 탈출할 길이 없다. 최후의 인식적 근거였던 몸마저 빼앗긴 채, 새하얀 정신병원을 닮은 천국에 도달하는 것 뿐.

[파이트 클럽]의 세계에 갇힌 자아에게 몸이란 뒤처리 휴지처럼 마지막으로 남은 무산자의 재산. 몸의 가치에 대한 긍정적 재고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고, 오히려 몸은 죽음을 맞고 자아분열을 일으킨 유령 같은 정신만 무의미한 불멸을 이룩한다. 이젠 아무리 찾아보아도, 찰나의 실존을 보장해 줄 허접 쓰레기 같은 몸도 없다. 아무리 둘러봐도, 출구는 없다.

[카트린 M의 성생활] 예속과 소명으로서의 수동적인 성(性), 그 자유의 가능성

팔라닉이 인간을 ‘조의 쓸개. 오그라든 조의 심장’으로 환원하듯, 카트린 밀레 역시 자신이 참여하는 난교파티 ‘파르투즈’를 묘사하면서 인간을 하나의 인격체가 아니라 자위행위 속에서 쾌락을 주는 모조 음경과 다를 바 없는 신체의 부분들로 인식한다. 난교가 진행되면 사람은 총체적인 인격체가 아니라 이 쪽에서 덮쳐오는 음경, 저쪽에서 다가오는 손길, 그리고 다시 더듬어 오는 다리로 화한다. 예술잡지 편집자인 카트린 밀레의 성생활 고백을 담은 이 책이 던지는 가장 큰 충격은 아마도, 이렇게 ‘성’을 ‘사랑’이라든가 최소한 ‘인간적 친밀감’의 문제와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생각하는 그 단호한 태도일 것이다.

[카트린 M의 성생활](열린 책들, 2001)은 몸/감각이 철저히 정신/영혼과 분리되어도, 사회적 통념과 달리 그 체험이 독립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굳게 믿고 있다. 그녀가 관계한 대상 역시 오로지 ‘몸’으로만 존재하는 익명의 개체일 뿐이었다. 그들과의 ‘인간적 관계’는 카트린 밀레의 몸이 느끼는 쾌락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들은 “개미떼나 벌떼가 움직이듯이 정해진 틀을 이탈하지 않고 냉정하고 결연하게 움직여” 빈틈없는 전개와 ‘순수한 목표’를 성취하려 나아가는, 그저 ‘몸’들일 뿐이다.


내가 승용차 핸들에 머리를 붙인 채 성기를 빨았던 남자들, 트럭의 운전 칸에서 나와 함께 옷을 벗었던 남자들은 그 수에 포함시킬 수 있다지만, 자동차 문 뒤에서 교대로 나타나, 한 손으로는 서로 다른 이유로 발기된 성기를 미친 듯이 흔들어 대고, 열린 창을 통해 차 안으로 디민 다른 손으로는 내 가슴을 우악스럽게 주물러대던 그 얼굴 없는 몸들은 어떻게 할까? ...[중략]...내가 지금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은 정황에서는 포옹과 교접의 연쇄와 혼동이 너무 심하여, 사람들의 몸이나 몸의 특성을 구별할 수는 있어도 사람 그 자체를 언제나 식별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카트린 M의 성생활, p. 23-4]


로고스와 영혼을 상찬하는 서구 문명에서 몸은 전형적인 타자다. 몸과 마음, 영혼과 육신, 초자아와 이드. 서구 문명을 지탱하는 이항대립의 쌍들 속에서 몸은 언제나 홀대당하고 억압받는 대립항이다. 대표적인 몸의 체험들은 대체로 어김없이 사회적 금기의 영역에 속한다. 폭력, 성, 그리고 배설. 특히 영혼이나 초자아와 연계되지 않은 몸의 독립적 경험, 몸 자체의 쾌락과 욕망을 추구하는 행위들은 예외 없이 불건전하고 위험스럽고 전복적인 것으로서 백안시되어 왔다. 즉, 몸은 영혼/정신의 지령을 따르는 도구로 사용될 때에만 긍정적 가치를 허락 받는다. 말하자면 폭력의 행사는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명분이 있을 때 비로소 용기나 기사도라는 이름으로 미화되며, 성은 결혼 내지 일부일처제의 테두리 속에 존재할 때, 하다못해 사랑이라는 정신적 사회적 가치와 연계되어 있을 때에만 건전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정당화되는 식이다. 카트린 밀레의 성 관념은 금기의 영역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발칙하고 분노에 찬 팔라닉도 그랬지만, 밀레는 더 차분하고 더 단호하게 이러한 몸의 종속적 위상을 부정한다. 성교에서 몸이 느끼는 세밀한 고통/희열이 그 자체로 삶을 긍정하는 또 하나의 가치로 격상되어 마땅하다는 밀레의 태도는 페이지마다 면면히 배어나온다.


나는 내가 꿈꾸던 자유를 향유하고 있다는 확신에 이끌리고 있었다. 일체의 혐오감을 넘어서 섹스를 하는 것, 그것은 자기의 품격을 떨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입견들을 초월하여 스스로를 높이는 것이었다. 세상에는 아주 강력한 금기를 깨뜨리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어떤 금기를 깨뜨리려 하기보다는 내 파트너를 선별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했다. 다시 말해서, 상대의 수가 몇 명이든, 상대의 성별이 무엇이든, 상대의 육체적 정신적 특성이 어떠하든, 나는 어떤 선택을 하려 하지 않았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목욕을 하지 않는 어떤 남자를 피하지 않았고, 서너 명의 허약하고 백치 같은 사람들과도 사귀었다).(p. 221)


몸의 ‘자유’를 신봉하는 카트린 밀레의 태도는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이 약속하는 해방감과 분명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당신의 돈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저 당신을 원할 뿐입니다. 파이트 클럽에 있는 동안만큼은 은행 잔고, 직장, 가족, 그리고 스스로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고민거리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나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희망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카트린 밀레가 성교의 상대를 평가할 때도 마찬가지다. 성행위를 하는 이들의 은행잔고도 직장도 가족도 이름도 중요하지 않다. ‘알몸’의 경험은 오히려 옷을 입고 사람을 만나는 모임의 격식보다 훨씬 더 편안하고 자유롭고 고양된 소통이 될 수 있다고 그녀는 말한다. 이 책에서 묘사된 바에 따르면,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과 마찬가지로, 조직적인 ‘파르투즈’들은 인간을 규정하는 ‘몸’ 이외의 모든 딱지들을 부정하는 평등주의의 집단적 실천이다. 밀레의 말대로 “규모가 큰 파르투즈에서는 성적인 평등주의에 따라 다양한 사회 계층에 속한 사람들이 모두 하나가 된다”는 것처럼.

하지만 카트린 밀레의 ‘성’에 대한 열린 태도가 팔라닉의 궁극적인 무정부주의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그녀가 기존의 체제, 기존의 문명을 끔찍하게 증오하는 나머지 ‘몸’을 최후의 도피처로서 인식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소명의식에서 몸의 체험에 헌신하는 듯한 경건함마저 풍기고 있다는 것이다. 팔라닉이 바라본 몸은 사실 말하자면, 형이상학의 실패가 남기고 간 껍데기이자 물리화학적 작용으로서의 ‘생명’이 남아 꿈틀거리는 마지막 증거와 같은 것으로서, 다른 모든 것을 향해 그토록 독하게 분출되었던 혐오 섞인 분노가 고스란히 되돌아오는 대상이기도 하다. 따라서 몸의 체험이 갖는 긍정적 가능성에 대한 고찰이나 새로운 시선은 찾아볼 수 없으며 끝내 몸은 여전히 죽어버린 정신/영혼의 대립항으로 남는다.

사실 이것은 몸을 통해 극한의 자유/쾌락을 추구하는 전형적인 사드Sade적 텍스트들에서 가장 쉽게 마주할 수 있는 시선이기도 하다. “그 누구와도 할 수 있다”는데 집착하고 기존의 관념에서 해방된 자유만을 주장하다보면, 몸과 몸이 느끼는 쾌감은 곧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십상이다. 한편으로는 행위의 도착성에 중독되고 도취되어 점점 더 높은 자극의 역치만을 갈구하게 되는, 파괴적인 사디즘, 혹은 마조히즘에 빠지게 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또다시 몸은 자멸의 충동에 발목 잡히게 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밀레의 태도는 이 모든 함정들을 피하고 있을 뿐 아니라, 몹시 특이하고 또한 놀라울 정도로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있다. 그녀는 성적 모험의 행위들에서 주도권을 차지하려 하는 게 아니라, 수동적으로 몸을 “내맡긴다”. 그리고 무조건 자신이 원하는 욕망을 관철시키려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찾아오는 경험들에 몸을 열고 ‘헌신하는’ 구속을 자처한다. 즉, 기이하게도 밀레의 텍스트에서는 ‘성적 자유’에 대한 강박관념을 찾아볼 수 없다. 밀레 자신도 자유로운 성의 추구는 처음에 ‘하나님의 죽음’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되었거나 신의 죽음을 깨닫는 계기로 작동했음을 시인한다. 그녀는 성적 경험을 하고 난 뒤 더 이상 신을 믿지 않게 되었다고 고백하니까. 그러나 이러한 무신론적 인식은 종국에 영적인 무정부주의로 치닫는 게 아니다. 오히려 ‘사라진 하나님’을 대체하는 또 다른 긍정적인 가치, 또 다른 소명의 추구로 전이된다. 몸의 경험은 내밀한 사적 공간을 연결하고 확장하며 갈라져 있는 개인들 사이의 연대의식을 형성하는 또 다른 종교이자 믿음이자 문화로 승화되고 있다.

주목해야 할 점은 기실 이것이 여성적 성경험의 특수성에 대한 인식에서 가능해지는 일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성은 나눔과 베풂이며 또한 그녀의 자유는 “청빈과 정결과 순종을 서약하는 수녀처럼 어떤 운명을 주저 없이 받아들이고 그 운명에 모든 것을 맡김으로써만 실현되는 자유”이다. 온몸이 지쳐 빠진 상황에서도 몸에 닿아오는 남성의 음경에 “다시 내어주었다”라든가 두 남자의 몸 사이에 자기 몸을 들이밀기 위해 단거리 선수의 집중력, 어떤 순간적 몰아의 경지에 빠졌다든가, 열과 성을 다한 펠라티오에 보람을 느낀다든가 하는, 극도의 헌신을 보여주는 그녀의 태도에는 간혹 황망함을 느낄 정도다. 성행위에 대해 밀레는 극단적으로 수동적이고 이타적인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자신의 쾌감을 부차적으로 얻어내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고, 그러한 태도로 인해 자신의 욕망이 지니는 파괴적인 면모들을 훌륭하게 통제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이 글쓰기는 그런 모든 세세한 접촉들에 대한, 하나하나의 육체적 만남에 대한 분별 있고 이성적인 분석의 결과라는 것이다. 성행위 도중에 육체적 학대를 당한 일을 담담히 고백할 때나, 자유연애를 약속하고 이해하는 연인 자크 앙릭에 대한 질투심을 어떻게 극복했던가를 차분히 기술할 때에도, 그녀는 자신의 욕망이나 감정에 휘둘려 이성을 잃는 법이 없이 끝까지 맑은 정신으로 가장 합리적인 수순을 밟아 새로운 대안을 내놓고 설득한다. 결국 성행위를 하는 것으로써, 나아가 그 성행위를 글로 옮김으로써 그녀는 몸의 열등함을 거부할 뿐 아니라 나아가 몸/마음, 육신/영혼이라는 이분법 자체를 무력하게 하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육신과 영혼을 다 바친 성적 접촉 자체는 자연과의 직접적 소통에 그럼으로써 밀레의 몸은 수많은 체험들에 열리게 되고 그녀의 공간은 무한히 확장된다.


비행기를 타고 장거리를 여행하다 보면, 작은 공간에 갇힌 승객들은 누구나 축축 늘어지게 되고, 그 잡거의 상황에서 결국은 옆 사람들과 축축한 겨드랑이 냄새와 발 고린내를 교환하게 이른다. 그럴 때, 시베리아나 고비 사막의 한 부분이 훤히 내려다보이면 내가 느끼는 경이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속박되어 있는 상황이 그 경이감을 더 크게 해 준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속박이란 옹색한 좌석에 묶여 있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라기보다 너무나 진한 그 냄새들에 흥건하게 젖어 있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다. (p. 222)


밀레가 바라보는 “몸”은 그녀의 내밀한 공간을 확장시키고 가장 찐득한 육체의 구속과 속박 속에서 활짝 트인 자연과의 새로운 유대감을 꿈꿀 수 있는, 또 하나의 열린 문이요, 세상을 해석하는 또 하나의 든든한 틀을 구축한다. 그리고 그 틀은 기존의 것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기존의 관념이 제공해 주지 못했던 ‘충만함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내 정신은 자유롭게 떠돌다가, 언덕들을 하나하나 살피며 서로 비교해 보고 원경에 놓인 산들의 검푸른 빛에 매료되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물결치듯 펼쳐지는 풍경을 무척 좋아한다. 그런 풍경을 보고 있을 때, 내 배속 어딘가에서 샘솟듯이 분출한 정액으로 몸이 젖어 오면 나는 행복하다.” 자연과 자아를 연결하고 행복을 당당하게 선언한 카트린 밀레는, 분명 ‘새로운’ 삶의 양식을 찾아내어 실천하고 있었다.

우리를 예속하여 자유를 얻게 하소서

척 팔라닉의 [파이트 클럽]과 카트린 밀레의 [카트린 M의 성생활]은 이렇게 현대 서구 문명에서 무력화되고 배제되고 잊혀진 몸의 경험을 도덕과 윤리의 상부구조에서 해방시키고 물화된 몸에 생명을 불어넣고자 한다. 진짜 고통과 진짜 희열이 공존하는 순전한 몸의 경험을 탐닉하고 갈구함으로써 진짜배기 삶의 느낌을 오롯이 느낄 수 있다는 믿음에 기반해서. 그리고 이런 태도의 배후에는, 무엇보다도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에는 삶에 의미를 주는 정신적 지주로서의 신이 사라졌다는 믿음이 자리한다.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세계가, 뭔가 크게 잘못되어서, ‘몸’이 아닌 정신적 가치, 믿음에서 도무지 충만한 삶의 보람을 를 찾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의 결언은 사뭇 다르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충만한 영혼과 몸의 체험이 갖는 불가분의 관계를 중시했던 작가 D. H. 로렌스는 명저 [고전 미국 문학 연구 Studies in Classic American Literature]에서 “미국에서의 자유는 지금까지 모든 지배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만을 의미했다. 진정한 자유는 미국인들이 ‘무언가(IT)’을 발견하고 가능하다면 ‘그 무언가’를 충만하게 구현하게 될 때 얻게 될 것이다. 그 ‘무언가’란 인간의 가장 깊은 온전한 자아이다. 이상주의의 절반이 아니라 온전한 전체로서 존재하는 자아이다”라고 말하며 자유란 마땅한 가치를 주인으로 삼아 자유의지로 예속될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라고 했다.

[파이트 클럽]과 [카트린 M의 성생활]은 이러한 맥락에서 좀 더 의미심장해진다. 두 작품의 사뭇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는 원인은, 남성과 여성의 차이일 수도 있고, 냉소주의자와 숙명주의자의 차이일 수도 있으며, 미국과 프랑스의 문화적 차이일 수도 있다. 아무튼 그들의 같은 출발점과 서로 다른 종착점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입장, ‘우리’ 문명의 현재를 숙고해 보게 한다. 문학은, 충만한 자아를 완성하는 세계를 상상하는 일이라는 걸 새삼 환기하면서.  문유 hopefloatsagain@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