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ㅓ

척 팔라닉 <파이트 클럽>

로드365 2001. 11. 12. 21:05

소비사회와 테러 집단을 위해 쓰여진 성경 -

지금 막 척 팔라닉의 소설 <파이트 클럽>을 덮었다. 감상? 데이비드 핀처의 영화를 본 느낌이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그들은 배다른 형제다. MTV에서 재능을 발휘했던 핀처의 감각적인 영상 스타일과 팔라닉의 날카로운 문체는 속도의 시대에 걸맞게 쉬지 않고 잽을 날려 독자들을 혼수상태로 만든다. 비누를 만드는 공정의 묘사를 볼까. "끓이고, 걷어내고, 끓이고, 걷어내고, 걷어낸 지방조직은 빈 우유병에 담아, 식혀야 한다."(78쪽) 번역된 '파이트 클럽'의 문장 중 2행이 넘어가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다. 지독한 간결체다. 비누는 두 가지를 뜻한다. 지방흡입술로 버려진 인간의 지방 덩어리로 만든 고급 비누, 그리고 폭탄의 은어.

팔라닉은 '2'를 사랑하는 작가다. 잭과 타일러, 비누와 폭탄, 폭력과 광기, 삶과 죽음. 그런데 알고보면 둘은 하나다. 잭은 타일러이고, 비누는 폭탄이고, 폭력은 광기이고, 삶은 죽음이다. 그러나 잭이 자신의 분열된 자아인 타일러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듯 모든 사태는 결국 제어불능 상태에 이른다. 타일러가 세운 파이트 클럽의 제국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거대한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변한다. 이들의 세계를 표현할 여분의 단어는 또 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공저한 <앙띠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의 부제인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 의식과 욕망의 흐름을 빠르게 잡아내는 스타일과 분열하는 자아는 자본주의의 절정인 미국의 현실을 드러낸다. 다시 비누를 볼까. 미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허벅지에서 뽑아낸 지방으로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비싼 비누를 만들고, 지방흡입술을 한 돈 많은 여자는 이 특허 비누를 즐겨 쓴다. 흐름의 제어불능 상태. 타일러는 말한다. "무정부주의를 정당화시키는 거야."(139쪽)

<파이트 클럽>은 소비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짜 메시아를 통해, 가짜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일그러진 묵시록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다시 2의 등장) 자동차 리콜을 담당하는 잭은 소비사회의 중독자다. 고급 가구를 세트로 들여놓고 유행이 바뀔 때마다 갈아치우는 데 열심이다. 소비사회의 변화를 열심히 추적하는 이 가련한 회사원에게는 정작 몸으로 느끼는 쾌감,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없다. 그가 환자로 위장해 각종 환자모임에 나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환암에 걸린 남성들의 모임에 나간 잭이 여성 호르몬 과다로 가슴이 비대해진 남성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장면은 비극적이다 못해 우스꽝스럽다. 그에 반해 타일러 더든은 영사기사로 일하면서 가족영화에 포르노 필름을 끼워넣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동안에는 음식에다 오줌을 누는 등, 몸으로 부딪치며 되는 대로 살아가는 파이트 클럽의 정신을 설파한다. 그런데 작품의 결말에 드러났듯이 둘은 하나가 아닌가. 팔라닉이 보기에 소비와 테러의 욕망은 동전의 양면이다.
영화를 바라보는 것도 역시 엇갈린다. 폭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됐을 때 '걸작'이라는 찬사와 '테러리스트의 교본'이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작가 척 팔라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첫 장편이었던 <투명 괴물>은 너무나 파격적이라는 이유로 처녀작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대신 <파이트 클럽>이 공식적인 첫 데뷔작이 되었다. <투명 괴물>은 공식적으로 세번째 그의 장편으로 출간됐다. 여하튼 <파이트 클럽>과 함께 번역된 <서바이버>에서도 척 팔라닉의 세계는 고스란히 이어진다. 첫 영화와의 인연으로 <서바이버> 역시 20세기 폭스에서 영화로 제작중이다. 척 팔라닉의 세계는 결국 불한당들의 세계사다. 아무도 온전하지 않고 가짜 메시아는 실패한다. 하지만 메시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어느 누구도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면 예수는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11쪽) 척 팔라닉이 소설을 쓰는 합당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이상용(영화평론가)








소비사회와 테러집단을 위한 '성경'  

[영화로 세상 읽기]척 팔라닉/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

테러 사건이 났을 때 가장 많이 언급된 영화를 자세히 보거나 읽었다면 단연 으뜸이 데이비드 핀처의 <파이트 클럽>이었다는 것을 눈치 챘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는 국내에서 큰 인기를 누리지는 못했다. 문제는 이 영화가 현재 미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테러와는 좀 다른 양상을 다루었다는 것이다.

테러 영화라고 해도 여러 종류가 있는데, 영화로도 만들어진 <유나바머>와 같이 문명 비판론적인 시각도 있고, <델타포스>와 같이 미국 테러 특공대를 등장시켜 중동 지역을 습격하는 무식한 B급 영화도 여러 편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통렬한 비판

이 영화의 주인공은 척 노리스. 덥수룩한 수염이 달린 사라진 액션 스타를 지금 세대들은 아마 잘 모르겠지만 한때 B급 액션영화의 단골 손님이었다.

그런데 <파이트 클럽>은 외부의 적을 내세운 <델타포스>류의 영화가 아니라 <유나바머>와 같이 미국자본주의 사회 내부를 비판한 계열에 속한다. <파이트 클럽>은 최근 소설로도 번역되었는데, 핀처의 영화만큼이나 빠르고 감각적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의 속도와 일치한다.

그리고 이러한 속도전 속에서 의식과 사물은 이중 분열증을 보여준다. 잭과 타일러, 비누와 폭탄, 폭력과 광기, 삶과 죽음. 그런데 알고 보면 둘은 하나다. 잭은 타일러이고, 비누는 폭탄이고, 폭력은 광기이고, 삶은 죽음이다.

그러나 잭이 자신의 분열된 자아인 타일러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하듯 모든 사태는 결국 '제어불능 상태'에 이른다. 타일러가 세운 파이트 클럽의 제국은 스스로 통제하지 못하는 거대한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변한다.

이들의 세계를 표현할 여분의 단어는 또 있다.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공저한 <앙띠 오이디푸스>, <천의고원>의 부재인 '자본주와 정신분열증'.

의식과 욕망의 흐름을 빠르게 잡아내는 스타일과 분열하는 자아는 자본주의의 절정인 미국의 현실을 잡아낸다. 비누를 볼까. 미국에서 가장 호화로운 허벅지에서 지방 흡입술로 뽑아낸 지방으로 그들은 미국에서 가장 비싼 비누를 만들고, 지방 흡입술을 한 돈 많은 여자는 이 특허 비누를 즐겨 쓴다.

흐름의 제어 불능 상태. 타일러는 말한다. "무정부주의를 정당화시키는 거야."
<파이트 클럽>은 소비 사회의 모순을 비판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가짜 메시아를 통해, 가짜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일그러진 묵시록이 되기도 한다.


소비와 테러의 욕망이 담긴 '불길한' 복음서

그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 자동차 리콜을 담당하는 '잭'은 소비사회의 중독자다. 고급 가구를 세트로 들여놓고 유행이 바뀔 때마다 갈아치우는 데 열심이다. 소비사회의 변화를 열심히 추적하는 이 가련한 회사원에게는 정작 몸으로 느끼는 쾌감, 진정으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없다.

그가 가짜 환자로 위장해 각종 환자모임에 나가는 것도 그 때문이다. 고환암에 걸린 남성들의 모임에 나간 잭이 여성 호르몬 과다로 가슴이 비대해진 남성의 품에 안겨 흐느끼는 장면은 비극적이다 못해 우스꽝스럽다.

그에 반해 타일러 더든은 영사기사로 일하면서 가족영화에 포르노 필름을 끼워 넣고 고급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일하는 동안에는 음식에다 오줌을 누는 등, 몸으로 부딪치며 되는 대로 살아가는 파이트 클럽의 정신을 설파한다. 팔라닉과 핀처가 보기에 소비의 욕망과 테러의 욕망은 동전의 양면이다.

이 영화를 바라보는 것도 역시 엇갈린다. 폭력을 옹호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이 영화는 미국에서 개봉됐을 때 '걸작'이라는 찬사와 '테러리스트의 교본'이라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작가 척 팔라닉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의 첫 장편이었던 <투명 괴물>은 너무나 파격적이라는 이유로 처녀작으로 출간되지 못했다. 대신 <파이트 클럽>이 공식적인 첫 데뷔작이 되었다.

<투명 괴물>은 공식적으로 세 번째 그의 장편이 되었다. 여하튼 <파이트 클럽>과 함께 번역된 <서바이버>에서도 척 팔라닉의 세계는 고스란히 이어진다. 첫 영화의 인연으로 <서바이버> 역시 20세기 폭스사에서 영화로 제작 중이다.

척 팔라닉의 세계는 결국 불한당들의 세계사이다. 아무도 온전하지 않고, 가짜 메시아는 실패한다. 하지만 메시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의 표현대로 "어느 누구도 복음서를 쓰지 않았다면 예수는 과연 존재할 수 있었을까?" 비록 팔라닉과 핀처가 불길한 복음서를 썼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상용 기자  poema@nownuri.net   2001.12.11 ⓒ 2001 즐거운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