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ㅏ

타짜, 맛갈스러운 영화평

로드365 2011. 5. 24. 15:29


만화 <타짜>가 유행하던 시절, 스포츠조선 인터넷 사이트는 다음을 위협할 정도의 방문자수를 기록했습니다. 당시 내부적으로는 이 관객들을 기반으로 인터넷 유료화를 실시할 수도 있지 않겠느냐는 검토가 이뤄졌을 정도죠. 절대 손해나는 장사는 아니었겠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실현은 되지 않았습니다.

영화 <타짜>의 제작 소식이 들려왔을 때 가장 궁금했던 것은 감독이 누구냐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정도냐면 동생이 내가 나온 고등학교를 들어갔는데(즉 대부분의 교사들에 대해 어느 정도 안다는 뜻입니다) 과연 담임 선생이 누가 될까를 궁금해하는 정도로 이해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범죄의 재구성>의 최동훈'이라는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라면 믿고 맡겨도 좋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영화 <타짜>는 만화 <타짜>와 아주 조금 다릅니다. 사실 전체 4부중의 1부라지만 그래도 단행본으로 7권이나 되는 분량이니 똑같이 만든다는 건 불가능하죠. 혹시라도 만화를 안 보신 분도 있을테니 줄거리부터 시작합니다.


배경은 90년대. 군산에 살던 고니(조승우)는 우연히 도박판에 끼어들었다가 몇년간 모은 돈에다 누나의 위자료까지 몽땅 날려버립니다. 도저히 집에 돌아갈 수 없었던 고니는 그 길로 도박판의 양아치가 되죠.


그러던 어느날 그의 눈 앞에 대한민국 최고수 평경장(백윤식)이 나타납니다. 죽기 살기로 제자로 삼아 달라고 매달리는 고니. 결국 두 사람은 사제간이 됩니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고니야, 잃은 돈 다 찾으면 집에 가라!" 라는 말이 과연 지켜질 거라고 믿진 않았을 겁니다.


고니는 타고난 재능으로 빠른 성장을 보이고, 평경장은 고니를 도박의 꽃('예쁜 칼이니까 조심해서 다뤄. 손 벤다') 정마담에게 데려갑니다. 예. 바로 김혜수죠.

정마담은 두 사람을 자기가 설계한 판에 끼워넣어 대박을 터뜨립니다. 물론 정마담은 젊고 잘생긴데다 손놀림도 기가 막힌 고니를 데리고 있고 싶어합니다. "나랑 있어. 내가 BMW 태워줄게."


이렇게 해서 평경장과 작별하는 고니. 이제부터 그의 파란만장한 무림 평정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어설픈 타짜 고광렬(유해진), 잔인한 전라도 타짜 아귀(김윤석), 경상도 타짜 짝귀(주진모), 화란(이수경), 세란(김정난) 등의 '무림 영웅' 들과 수많은 모험이 펼쳐집니다.


<타짜>는 제법 긴 영화입니다만 이 영화를 보면서 길이에 대한 불만을 제기하는 사람은 별로 못 봤습니다. 물론 개봉되지마자 달려가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의 90%는 만화 <타짜>의 애독자들이죠. <반지의 제왕>이나 마찬가지로 최동훈 감독은 일단 '원작의 팬들이 실망하지 않을만한 영화'를 만든다는 데 지상 목표를 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겨냥은 훌륭하게 성공했습니다.

출연진의 면모는 <타짜>의 골격을 메우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조승우, 백윤식, 유해진이 각각 고니, 평경장, 고광렬 역할을 맡는다는데 과연 누가 불만을 품었을까요. 게다가 최동훈 감독은 이들 명배우들에게서도 그야말로 엑기스만을 쪽쪽 뽑아내는 신기를 발휘합니다.

물론,


역시 최고의 캐스팅은 그녀입니다. 만화 속의 정마담보다 영화의 정마담은 훨씬 더 살아있고, 구체적이고, 발전된 캐릭터입니다.

사실 김혜수가 가장 많이 받았던 악평 중 하나는 "어떤 영화를 찍어도 나오는 건 극중 캐릭터가 아니라 김혜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한국을 대표하는 섹시 아이콘으로서의 김혜수'가 갖는 느낌이 강했던 거죠.

하지만 이 영화에서 김혜수는 명감독 최동훈의 도움을 받아 배우로 다시 태어납니다. 배우가 갖고 있던 기존의 이미지를 해치지 않으면서 캐릭터와 화해하는 방법을 알아차린 것이죠. 즉, 이 영화에서 극중의 정마담과 배우 김혜수는 서로 호흡하면서 한 단계 발전된 형태로 일체화합니다. 

(시사회 후 김혜수씨가 자신의 연기가 어땠냐고 묻기에 '지금까지 출연한 작품 중에서 최고'라고 대답했습니다. 물론 한치의 거짓말도 없는 진심이었죠. 그러자 반응은 이렇더군요. '정말? 그럼 나 이제 은퇴 안 해도 되는거야?')



전형적인 팜므 파탈의 느낌을 주던 정마담은 영화 후반부로 가면 호구(돈 많은 도박판의 제물)를 엮는 장면에서 캐릭터 희화화에도 도전합니다. 예쁜 여자가 콧소리를 내면서 남자를 유혹하는 장면은 지독하게 상투적입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서 관객이 원하는 것은 다름아닌 '지독하게 상투적인 장면'인 것이죠. 그리고 최동훈-김혜수 콤비는 그 관객의 기대를 유감없이 채워 버립니다. ('몰라요. 돈 500이 그렇게 중요해요? 나보다?')

좋은 감독과 나쁜 감독의 차이를 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그 영화에 나오는 엑스트라나 단역배우들의 연기를 보는 것입니다. 형편없는 감독이 만든 영화의 엑스트라들은 그야말로 일단 만원짜리 연기를 합니다. 하지만 좋은 감독의 작품에서는 행인1, 행인2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봉준호의 걸작 <살인의 추억>을 본 뒤에는 "시체도 기가막히기 연기를 하더라"는 농담이 돌기도 했죠.



<타짜>를 보다 보면 어느 캐릭터 하나 감독의 손길이 가지 않은 곳이 없다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물론 단역배우들까지 가기 전에 아귀 역의 김윤석이나 짝귀 역의 주진모(깜짝 놀랐습니다.^^ 동명이인.)의 캐스팅 역시 칭찬을 아낄 수 없게 합니다. 아, 원작과는 좀 다른 화란 역의 이수경도 빼놓을 수 없군요.

 전라도 타짜 아귀!

<타짜>가 18세 이상 관람가 판정을 받은 것은 필연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김혜수의 노출 신이 없더라도 내용으로 보아 그렇습니다. 게다가, 여성 관객들은 계속 이어지는 화투패의 향연에 질릴 수도(일단 어느 패가 어느 패를 이기는지를 이해하지 못하면 재미가 약간 깎이는 것은 감수해야 합니다) 있습니다.

<타짜>에 대한 평들을 보면 목에 힘을 떡 주고 쓴, "기존의 홍콩 도박영화와는 다른 영화" 혹은 "무협지의 작법으로 만들어낸 도박영화의 신기원"이라는 식의 표현을 보게 됩니다. 전부 개소리로 치부하시면 됩니다. 세상에 어떤 도박 영화가 무협 영화의 논법을 벗어나 있단 말입니까. 모든 무협과 도박 영화는 주인공의 성장과 대결이라는 구도에서 일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런 당연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 있다면 당장 달려가서 표를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140분 동안 일상을 잊고 강호에 뛰어들어 마음껏 만원짜리 백장 묶음을 휴지처럼 던지며 격전을 펼치세요. 비록 극장 밖을 나설 때면 다시 일상의 걱정이 돌아오겠지만, 최소한 보는 동안에는 무림의 협객이 되어 있는 당신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지나치게 남성 중심적인 얘기가 돼 버렸습니다. 하지만 작품의 성격이 워낙 그렇습니다. 여성 관객들은 해설자 역할을 해 줄 남자들을 동반하시는 것이 아무래도 좋을 것 같군요. 아, 옆에 있는 남자가 '실은 나도 섯다같은 건 어떻게 하는지 몰라'라는 쫌팽이라면 당장 내다 버리십쇼.)


p.s. <타짜>에서 가장 비판적인 지적을 많이 받은 부분은 결말입니다. 하지만 이건 '속편을 만들어야 하는 가능성'과 '이 작품 하나로 나의 모든 걸 보여줘야 한다'는 두 가지 선택 사이에서 고민하던 감독이 내린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 결말에서 꼬투리를 잡기 보다는, 오히려 <타짜>의 2,3,4부도 제발 최동훈 감독이 연출하게 해 달라고 기원이라도 하고 싶은 것이 <타짜> 팬의 솔직한 심정입니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