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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졸레 누보 Beaujolais Nouveau 열풍

로드365 2001. 11. 12. 21:01
2001년산 조지 뒤뵈프 보졸레 누보.

보졸레 누보(Beaujolais Nouveau)의 열기가 뜨겁습니다. 국내에서 와인의 인기가 꾸준히 높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보졸레 누보의 경우는 예외적이라 할만큼 폭발적입니다.

보졸레 누보가 처음 수입된 것은 1996년. 불과 3년 뒤인 1999년, 한국은 전체 생산된 보졸레 누보 6000만병 중 약 3%에 달하는 200만병이 팔려 일본 다음가는 아시아 제2위의 시장으로 성장했습니다. 작년 수입량은 70톤이며, 올해는 이에 2배가 넘게 증가한 180톤이 수입될 것으로 주한 프랑스대사관 농식품진흥부는 전망하고 있습니다. 24시간 편의점에서도 보졸레 누보가 팔렸으니, 와인을 모르는 사람들조차 보졸레 누보라면 한 병쯤 구입한 셈입니다.

◆올해의 보졸레누보, 15일 출시

보졸레 누보란 ‘새로운 보졸레 와인’이라는 뜻입니다. 전세계 와인 애호가들은 매년 11월 셋째 주 목요일을 손꼽아 기다립니다. 이날 자정을 기해 올해의 첫 와인 보졸레 누보가 전세계에 출시되기 때문입니다. 올해는 11월 15일이 보졸레 누보 출시일입니다.

11월 셋째 주 목요일 0시, 고대하던 그해의 보졸레 누보가 개봉됩니다. 와인잔마다 신선한 보졸레 누보로 가득 채워집니다. 사람들은 와인잔을 치켜들고 와인과 포도의 수확을 축하하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입니다. 이러한 축제 분위기야말로 보졸레 누보 인기에 크게 기여하고 있죠.

프랑스에서는 그해 수확한 포도로 빚은 와인은 그해에 팔 수 없도록 법으로 금지하고 있지만, 보졸레 누보만은 예외입니다. 그래서 보졸레 누보는 새로 나온 보졸레 와인일뿐만 아니라 올해 생산된 와인 중에서 가장 먼저, 그리고 유일하게 맛볼 수 있는 와인인 셈입니다. 이 희귀성 때문에 사람들은 보졸레 누보를 맛보기 위해 애씁니다.

작년의 경우, 새천년 첫해에 빚은 와인 중 유일하게 마실 수 있는 와인이란 점에서 보졸레 누보가 파티용 와인으로 각광 받았습니다. 새천년 첫해는 원칙적으로 올해이지만, 심정적으로는 이미 작년 시작됐다고 봐야하겠죠. 1999년산의 경우는 ’20세기 마지막 와인’이라는 이유로 인기를 끌었구요.

보졸레 누보는 부르고뉴 남쪽 보졸레 지방에서 생산한 레드 와인을 의미합니다. 프랑스의 양대 와인생산지는 보르도와 부르고뉴 지역이 있습니다. 보졸레는 부르고뉴의 가장 남쪽지역, 프랑스 제2의 도시 리용(Lyon) 바로 위에 위치한 동네입니다.

◆단점을 장점으로 뒤집은 마케팅 전략

보졸레는 부르고뉴에 속하면서도 기타 부르고뉴 와인과 다릅니다. 부르고뉴에서는 보통 ‘피노 노아(pinot noir)’라는 포도품종을 사용하지만, 보졸레만은 가메이(gamay)라는 품종의 포도를 사용해 와인을 만듭니다.

가메이 포도품종의 특징은 보존성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1960년대까지만 해도 가메이로 담근 보졸레 와인은 큰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합니다. 보졸레 와인은 보졸레 지역과 인근 리용에서만 소비되는 와인이었죠.

보졸레 와인이 전세계인들의 사랑을 받게 된 것은 조지 뒤뵈프(Georges Duboeuf)라는 한 보졸레 생산업자의 공이 큽니다. 뒤뵈프는 ‘보졸레의 왕’, 혹은 ‘보졸레의 아버지’라고 불립니다. 뒤뵈프는 쉽게 상한다는 보졸레의 단점을 오히려 장점으로 승화시켜 보졸레 누보 마케팅에 성공합니다. 오래두고 마실 수 없는 와인이 아니라, 생산한 직후가 아니면 마실 수 없는 와인으로 발상의 전환을 시도한 것이죠.

뒤뵈프는 보졸레 누보를 대중에게 공개되는 날을 11월 셋째 주 목요일로 규정합니다. 이 역시 뛰어난 마케팅의 결과였죠. 보졸레 누보는 11월 셋째 주 목요일 이전에 이미 다 만들어진 상태이지만, 이 날로 마시는 날을 못박음으로써 마치 ‘이날 마시지 않으면 안되는’ 것처럼 인식되도록 했습니다. 보졸레 와인연합은 11월 셋째 주 목요일 자정 이전에 출시하는 것을 엄격하게 규제, 보졸레 누보의 상품성을 지킵니다. 규칙을 어기고 미리 판매하는 와인 상인에게는 다음해 보졸레 누보를 공급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햇 보졸레의 이름을 보졸레 누보로 바꾼 것도 뒤뵈프입니다. 보졸레 누보는 1960년대까지 ‘보졸레 프리뫼르(Primeur)’라고 불렸었죠. 프리뫼르 역시 ‘신선한’, ‘새로운’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햇물’이라는 느낌을 강조하기 위해 영어로 ‘뉴(New)’와 대비되는 ‘누보’로 교체한 것입니다.

공격적인 마케팅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보졸레 누보는 수도 파리로 진출합니다. 오래 묵은 와인을 좋은 것으로 여기던 파리지앵들에게 보졸레 누보는 신선한 충격이었죠. 보졸레 누보가 단순히 와인을 마시는 즐거움뿐만 아니라 포도 수확의 풍요를 느낄 수 있는 축제의 기쁨을 함께 선사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국내시장을 장악한 보졸레는 영국 런던에 소개되면서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고, 1988년을 보졸레 열풍의 정점으로 욱일승천(旭日昇天)하던 기세가 누그러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한국 등 신흥 와인시장에서는 보졸레 열병이 더욱 뜨거워질 여세가 아직 충분해 보입니다.

◆보졸레 누보는 겉절이김치

좋은 와인은 오래 두고 마시는 법이지만, 보졸레 누보는 바로 마셔야 제맛인 와인입니다. 그해 크리스마스까지가 최적이라고 하죠. 9월까지만 해도 포도가지에 매달려 있던 포도의 싱그러움을 즐기는 와인이기 때문입니다. 9월 수확한 포도를 밀폐된 탱크에 일주일 정도 발효시킨 후 6주 가량의 숙성과정을 거쳐 출 시합니다. 싱그러운만큼 가벼운 맛이죠.

숙성이 60-70%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에 풋풋하고 새콤합니다. 떪고 묵직하면서 깊이 있는 일반 레드 와인보다는 가벼운 화이트 와인에 가까운 맛이죠. 그렇기에 상온(섭씨 16도)에서 즐기는 일반 레드 와인보다는 화이트 와인처럼, 조금 더 차가운 10-13도로 마시는 것이 좋습니다. 여기에 달콤함이 적당히 어우러집니다. 정통 와인에는 포도 외에 어떠한 것도 첨가할 수 없지만, 보졸레 누보에는 바닐라 향, 딸기 향 등의 향료가 첨가돼 있다는 말도 있습니다. 보졸레 누보 레이블에도 포도원액 100%와 산화방지제인 이산화항이 첨가된 것으로 명시돼 있어 이같은 루머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와인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래서 보졸레 누보가 와인이라기 보다는 포도주스라며 경원시하기도 합니다만, 떫고 무겁지 않은 가벼운 맛이 한국에서 보졸레 누보의 인기에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입니다. 보졸레 누보 수입업체들은 “소주 등 독주에 길들여진 한국 남성들은 와인의 떫은맛을 쉽게 받아들이지만,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며 “가볍고 신선한 보졸레 누보의 맛이 젊은층과 여성들의 입맛을 파고든 것”이라고 분석했습니다.

정통 와인이 김장김치라면, 보졸레 누보는 겉저리김치쯤 될까요. 김치를 처음 접하는 외국인들이 젓갈을 많이 넣은 곰삭은 김장김치는 먹기 힘들더라도, 새콤달콤 가볍게 무친 겉절이김치는 훨씬 쉽게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한국인들이 보졸레 누보에 특히 열광하는 이유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국이 보졸레 누보에 열광하는 이유

대부분 처음 와인을 마신 사람들은 “왜 달지 않지”하며 의아해하기 쉽습니다. 대량생산된 싸구려 와인과, 소주에 설탕과 포도즙을 섞어 만드는 한국식 포도주에 먼저 맛들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특히 떫은 맛이 강한 레드 와인은 한국인들에게 거부감이 크죠.

웬지 세련되고 멋지고 낭만적인 것 같아 마시고는 싶지만, 그다지 맛은 없는 와인. 다들 좋다는데 나 혼자 맛없다고 하면 촌스럽달까봐 말도 못하고. 이때 보졸레 누보는 그야말로 구미에 맞는 해결책이 됩니다. 떯지 않고 텁텁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상큼하고 달콤하기까지하다니.

“딱 꽂혔어!” 프랑스 와인이 한국인의 미각에 침투하는 순간입니다. 보졸레 누보를 통해 와인에 대한 거부감을 줄이면 프랑스 와인의 한국 내 소비가 자연히 늘어나게 되고, 결국 프랑스 와인업계 전반에 이득입니다.

프랑스는 대사관이 직접 나서서 보졸레 누보 판촉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보졸레와인생산자협회는 작년 ‘제1회 서울 보졸레 누보 축제’를 주한 프랑스 대사관저에서 개최했습니다. 이 행사에는 현직 프랑스 국회의원, 보졸레와인생산자협회 상무이사, ‘보졸레 수호자’ 이사회 회원 등으로 구성된 3명의 ‘보졸레 수호자’가 참석하는 등 성의를 보였습니다. 또 보졸레 와인과 이미지가 어울린다고 선정된 탤런트 김호진, 김지호가 이들 보졸레 수호자 앞에서 선서를 하고 보졸레 수호자로 임명되기도 했습니다. 1급 호텔들이 프랑스의 적극적인 협찬을 받아 보졸레 와인을 곁들인 메뉴를 내놓고 있으며, 와인점들도 다양한 판촉행사를 벌입니다.

와인에 익숙하지 못한 한국인들의 입맛을 와인에 길들이기 위해서는 보졸레 누보가 최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겠죠. 프랑스대사관 농식품진흥부 이영희 대표는 “보졸레 누보 출시는 전세계적 관심을 끄는 이벤트인데다가, 가격도 저렴해 대사관측에서 홍보하기가 좋다”고 말했습니다.

◆보졸레누보 통해 국가 브랜드가치 높이는 프랑스

보졸레 와인을 통해 프랑스 와인의 홍보와 판매를 촉진하겠다는 프랑스의 의지는 상품의 브랜드와 국가 이미지가 겹쳐지는 현대 사회의 특징을 잘 반영하고 있습니다. 네덜란드 국제관계연구소 수석 연구원 피테르 반함은 국제문제 전문 격월간지 ‘포린어페어스(Foreign Affairs)’ 9.10월호에 기고한 글에서 “현대에 들어와 국가도 브랜드화됐으며, 과거 외교.경제적 계산에 입각한 전통적인 국가경영보다도 브랜드 구축이 가장 시급한 과제로 떠오르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물건을 파는 기업만큼이나 국가들도 외교적 승리나 외국인 투자유치 등을 위해 브랜드 경쟁에 뛰어들고 있다는 것이죠.

반함은 옛 소련연방국이던 북유럽의 작은 국가 에스토니아의 국가 브랜드 재고 노력을 예로 듭니다. 에스토니아는 혼란을 의미하는 ‘옛 소련권’이라 지칭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세련과 문명을 상징하는 ‘EU 가입을 앞둔 국가’, 또는 안정됐다는 인상을 주는 ‘스칸디나비아 국가’라는 호칭을 얻기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뛰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프랑스가 보졸레 누보를 적극 홍보하는 것도 와인으로 대변되는 세련된 문화의 나라라는 프랑스 브랜드 이미지를 유지 강조하는 방법 중 하나겠죠. 그리고 세련된 프랑스라는 국가 이미지야말로 프랑스 와인뿐만 아니라 옷, 시계, 향수, 보석, 자동차 판매에 절대적 부가가치를 부여할 것입니다. 한국의 브랜드 이미지, 과연 무엇입니까.

◆추신: 올해 보졸레누보 괜찮을 듯

2001년 보졸레 누보는 사상 최고였다는 작년 같지는 않더라도 상당히 괜찮을 것으로 전망됩니다. 지난 9월 도쿄에서 개최된 와인 세미나에 참가한 조지 뒤뵈프는 “수확 종료까지 순조로운 기후가 계속된다면 2001년 빈티지의 품질은 지난 10년 동안 1, 2위 수준으로 품질이 우수한 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맑은 날씨가 계속돼 포도의 성숙도가 매우 좋으며, 특히 올해는 과피가 두껍고 당분도 많다. 알콜 함유량은 12.1% 정도로 예상되며, 산도가 매우 높고 탄닌, 폴리페놀도 풍부하다”고 말했습니다. 보졸레와인생산자협회는 올해는 지난 9월 6일 수확을 시작했다면서, “유난히 수확시기가 빨랐던 작년(8월 28일 수확 개시)과 비교하면 일주일 정도 느리지만 평년 수준”이라고 말했습니다. 또 “수확량은 평년도 수준이 될 것이고, 과거 빈티지로 말하면 95년도와 비슷한 아로마가 확실한 신선한 와인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습니다.

-김성윤 조선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