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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 - 저는 내면이 없는 인간이에요.

로드365 2008. 1. 16. 09:22


 2008.1.16
 


그대가 왔다
능숙하게
내 우렁찬 목소리 때문에
내 훤칠한 키 때문에
그대는 날 바라보았고
내가 단순한 사내아이임을 알아보았다
그대는 내 심장을 빼앗아 움켜쥐더니
그냥
가지고 놀기 시작했다
어린 계집아이가 공을 가지고 놀 듯이
(마야코프스키, 「나는 사랑한다」 중에서)


누구를 사랑하는 순간에 우리는 상대가 누구건 그 안에서 단순한 사내아이를, 단순한 계집아이를 본다. 릴리에게 심장을 빼앗긴 러시아의 잘생긴 혁명 시인 마야코프스키가 릴리의 생일날 한 일은 그녀가 머물고 있는 도시를 망원경으로 잡아보려고 하루 종일 애쓴 것이었다. 그녀를 사랑하는 그는 끝없는 키스를 보낸다. 1분에 186번씩. 32,000,000번씩. 150,000,000번씩. (망원경과 키스만 한 생일선물이 있을까?)

그는 이런 편지를 보낸다.
“나의 사랑, 나의 연인, 나의 사람. 보고 싶소.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소. 그저 당신만 생각할 뿐이오. 텅 빈 당신의 옷장만 보여서 방 안을 서성이고 있소, 그대 없는 삶보다 더 서글픈 것은 이 세상에 아마 없을 거요. 제발 나를 잊지 말아주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합한 숫자보다 백만 배 더 당신을 사랑하오, 당신 말고는 누구를 보는 것도 누구와 애길 하는 것도 도무지 즐겁지가 못하오. 키스 키스 키스 키스 키스 키스 키스 키스. 잊지 말아요. 사랑하오.” (마야코프스키, 『사랑과 죽음의 시인』 중에서)

고매한(?) 철학자 이진경을 인터뷰하고 돌아온 날 이런 달짝지근한 시구와 편지글이 생각난 건 이진경이 좋아했던 푸코 때문이었을까? 1993년 내가 푸코를 읽던 그 해 여름, 나는 마야코프스키도 같이 읽었었다. 마야코프스키는 죽도록 사랑하던 여인인 릴리가 비타민 부족으로 병에 걸리자 모스크바 시내를 이 잡듯 뒤져서 홍당무 두 개를 구해 돌아온다. 그래서인지 ‘사랑과 죽음의 시인’(그는 서른여섯 살에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마야코프스키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권총이 아니라 당근 두 개를 꼭 움켜쥔 주먹을 떠올린다.

93년 6월에 나는 강화도산 왕골 화문석 위에 하얀 광목 원피스를 입고 누워서 누군가의 전화를 기다렸고 그러는 틈틈이 마야코프스키를 읽었고 틈틈이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었었다. 그 시절의 나는 그 책에 분홍 형광색으로 “웁살라”라고 써놓았었다. 웁살라는 젊은 푸코가 파리를 떠나 머물던 스웨덴의 도시였다. 낮 두 시면 해가 지는 북구의 그 도시 도서관에서 푸코는 하루 여섯 시간씩 『광기의 역사』를 써내려갔다. 동성애 때문인지 자살 시도 때문인지 파리에서 어느 정도는 광인이라고 여겨지던 푸코가 ‘자신이 몸담은 세계와 결코 동질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사생아로 태어나 아버지가 누군지 알지 못하고 어머니랑 불안하게 살았다 정도로만도 그런 존재가 될 수 있다)이 한 사회에서 조직적으로 수용소에, 병원에, 감옥에 내몰려 광인이 되어가는 과정을 다룬 이 책은 고통과 슬픔과 공범 의식 없이 읽어나가기 힘들다. 결코 환영받지 못한 삶을 살아온 자기 자신을 위해서인 것처럼 거의 고증하듯이 수많은 자료를 읽어가며 광인들의 역사를 써내려간 푸코를 생각하면 막막함이 치열함으로 바뀌는 감정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막막함이 치열함으로 바뀌는 것은 자기에게 맞는 삶의 형태를 마침내 찾아내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치 그의 등 뒤에서 호흡 소리를 듣는 기분이다. 내가 『광기의 역사』를 읽던 그 해 93년 국가보안법 위반 사범인 이진경은 청주교도소에서 출소했다. 바로 푸코가 언급해온 그런 감옥에서 나온 그는 나오자마자 고등학생용 프랑스어 문법책을 샀고 프랑스어를 공부해가면서 푸코를 읽기 시작했다. 바로 87년 우리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사구체 논쟁의 저자, 지금까지도 베스트셀러인 철학책 『철학과 굴뚝 청소부』의 저자, 『수학의 몽상』『노마디즘』『코뮨주의 선언』까지 참으로 다양한 사유를 하고 있는 이진경이 오늘 우리가 만나볼 사람이다.

어린 시절의 이진경은 말없고 내성적이고 시험 성적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책 읽는 걸 좋아하는 무난한 아이였다.

“집이 가난해서 우리 집엔 책이 없었고 중학교 때까지 책은 주로 친구집에 가서 읽었어요. 빌려주지도 않으니까. 다행히 중학 2학년 이후엔 값이 싼 삼중당문고란 걸 살 수 있게 되어서 내 책을 갖게 되었지요. 정릉에 있는 고려중학교 다녔었는데 도중에 집이 이사 가는 바람에 한 시간 가량 버스를 타고 다녀야 했어요. 옛날 522번 버스였는데 집이 종점 근처라서 버스 제일 뒷자리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서 내릴 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어서 그 낙으로 버스 탔어요. 그때 눈을 다 버렸는데 그래서인지 지금도 차 안에서 책을 아주 잘 읽어요. 집안에 독서를 장려하는 분위기 같은 건 없었어요. 아버지는 시장에서 장사를 해서 책을 읽을 여유가 없었고 어머니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어요. 외삼촌은 대학까지 나왔지만 이모나 엄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죠. 게다가 형이나 누나가 없어서 조언해주는 사람도 없고 그저 혼자서 닥치는 대로 읽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들어가니까 생각이 좀 생겨서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났어요.”

(버스에서 흐릿한 불빛 아래 책을 읽는, 말없는, 창백한, 조금 피곤한 얼굴의 남학생이 얼마나 매력적인가를 우리 시대의 남학생들도 좀 알아줬으면 좋겠다. 섬세한 긴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기고 있는 남학생을 보면 ‘그 손가락으로 내 머리카락도 좀 넘겨줬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는 여학생들은 어느 시대에나 있다. 나 역시 꼭 그런 남학생들 앞에 서서 도대체 무슨 책을 읽나 훔쳐보던 기억이 난다. 한 번은 정말로 책을 열심히 보는 남학생이 있어서 뭔가 봤더니 책 밑에 도색 잡지를 감추고 있었고, 한 번은 성문종합영어였고, 한 번은 무슨 소설이었는데 내가 알아보려고 고개를 좀 더 숙이는 순간에 입에서 생선 냄새 나는 트림을 하는 바람에 열대성 후끈한 공기만 들이마셨었다.)

프란츠 카프카
(Franz Kafka, 1883~1924)
‘그 무렵 나에게도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던 이진경이 좋아하던 옛사람은 카프카였다.

『심판(소송)』『성』, 이런 소설이 주는 느낌은 이유를 찾지 못해 계속 빙빙 헛도는 세계에서 우리가 살고 있단 것이었어요. 세계에 대해 추방된 느낌을 갖는 것, 소외된 느낌을 갖는 것. 설명을 할 수 없는 것, 답답한 것. 그런 느낌으로 꽉 찬 글들이었죠. 그때는 그 소설들을 이해할 능력은 없었지만 그래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그렇게 보는 시각이 놀라왔어요. 그 다음부터 문고에 나오는 걸 걸리는 대로 얇은 순서대로 읽었어요. 누구 하나 책에 대해 알려준 사람은 없었지만 독서는 계속되었어요. 카프카 이후엔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지금도 그때 읽었던 그 책을 읽는데 책이 닳도록 읽었어요. 그때 프로이트 『정신 분석 입문』도 읽었고 책을 좋아했기 때문에 외로울 틈이 없었어요.”

한국의 조용한 고등학생이 좋아했다던 카프카라. 누군가에게는 불안의 작가로, 누군가에게는 권력과 욕망의 작가로,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피곤함을 주는 작가로 읽히는 카프카를 좋아했다니 내 머릿속이 복잡하게 움직인다.

19세기말을 살았던 유태인이었던 카프카의 부모는 체코 프라하에서 독일인에 기생해서 살았고 아들을 독일인처럼 교육시켰다. 그의 이름 프란츠도 당시 독일인 황제였던 프란츠 요셉의 이름을 따른 것이다. 카프카는 체코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글을 썼다. 그 결과 독일인도, 유태인도, 체코인도 카프카를 경멸하고 싫어했다. 평생 프라하에서 산 카프카는 인생의 16년을 산업재해보호공단에서 법률 문제를 담당하는 일을 했고 퇴근 후 밤에 글을 썼다. 뒷골목의 서점 뒤지기를 좋아했으며 ‘한 권의 책은 내면의 바다를 깨는 도끼여야 한다’고 말했다. 다른 프라하의 유태인으로 자신들의 언어가 아니라 독일어로 글을 쓰는 것, 프라하의 유태인이지만 독일인처럼 사는 것. 그 낯섦과 당혹스러움이 모두 글이 되어서 그의 글들은 (의도야 어쨌든) 다분히 정치적이다. 『심판』의 (원래 제목은 ‘소송’이 맞는데 우리나라에서 ‘심판’으로 잘못 번역되었다 한다.) 첫 문장은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모략 한 게 틀림없다. 그는 특별한 잘못도 없이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체포되었다.”이다. 서른 살 생일에 체포된 은행원 K는 자신이 체포된 이유도, 명령자의 정체도 모른 채 죽어간다. 결국 프란츠 카프카의 글들이 말하는 것은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람이며 기계적인 사람이고 실험적인 사람이다.”일 것이라는 건데 만약 고교생 이진경이 그 의미를 알았다면 그는 그 당시 이미 앞으로 살아갈 자기 인생을 봐버린 거나 다름없다. 그는 이후 다분히 정치적, 기계적, 실험적인 삶을 살게 된다.

“일등은 못했어도 공부는 잘했고, 특히 수학문제 풀기가 취미였어요. 학력고사 보기 한 달 전에 공부를 하다가 팔을 베고 잠들었는데 오른팔에 마비가 와서 글씨를 잘 못 쓰게 되었어요. 그래서 시험 보기 바로 전날까지도 신경외과 다니면서 물리치료를 받아야했지요. 시험 보는 날 2교시가 수학 시험이었는데 계산을 많이 하는 문제들이 나왔어요. 그런데 글씨를 쓰지 못하니까 계산도 못 하고 반 정도를 아예 못 풀었어요. 그래서 가방 들고 나가려니까 친구가 말리더라고요. ‘너네 아버지 쓰러진다.’ 그렇겠구나 생각하고 마저 시험을 봤지만 성적이 예상보다 안 나왔어요. 원래는 경제학과 가려고 했는데 시험을 너무 못 봐서 사회학과에 가게 되었지요. 나중에 생각하니 팔에 마비 온 것부터 사회학과 간 것까지 다 너무 운이 좋았어요.”

‘모든 게 운!’ 그 말을 할 때 유달리 힘주어 말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수학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마르크스가 떠오른다. 마르크스는 우울한 날은 수학문제를 풀면서 기분을 전환했다. 아내가 병상에 있을 때도 수학문제를 풀면서 시름을 달랬다. 나중에 이진경은 『수학의 몽상』이란 수학책을 내게 되는데 그 단서가 될 만한 행동 하나를 바로 학력고사 끝난 날 저지른다.

“그렇게 시험 망치고 교보문고에 가서 『calculation』이란 수학책을 샀어요. 저는 문과였는데 혼자서 이과 수학을 풀면서 쉬곤 했었죠. 그런데도 좋아하는 수학 시험을 망쳐서 분한 마음도 있고 해서 대학 수학 교재를 두 권 샀어요, 그리곤 그 뒤로 방학 때 혼자서 2권의 앞부분까지 풀었어요. 대학 들어가서도 물리학과 친구 쫓아가서 1학년 1학기까지 수학 수업을 들었어요. 수학의 세계가 주는 매력은 쉽게 풀리지 않는 것들이 논리적으로 풀려나가는 세계란 것일 거예요. 나중에 『수학의 몽상』이란 책을 쓸 때는 어떤 문제의식이 있었느냐면 ‘내가 믿었던 사회주의는 망해버렸는데 그렇다면 근대 세계는 어떤 세계인가?’ 질문을 던지게 되었던 거죠. 근대는 무엇보다도 계산의 세계예요. 일상생활에선 화폐가 지배하는 세계이고 좀 더 근본적으로는 과학의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세계이고 과학의 세계란 모든 걸 계산하려는 세계이고 그 바탕이 수학이라 생각한 거죠. 서양 역사에서 데카르트 이후 계산하는 세계가 되면서 계산 가능하다면 예측도 가능하다고 생각하게 된 건데 저 역시 그런 것이 주는 매력 때문에 수학을 한 거죠. 계산 불가능한 것이 계산 가능한 것으로 바뀌려면 전혀 뜻밖의 것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상상력이 필요해요.”

그러면서 그는, 예를 들자면 집합론 같은 데엔 놀라운 시적 상상력이 있단 것을 n이니 p니 q니 하는 공식을 들어 설명했는데 물론 나도 미적분 같은 수학문제를 풀면서 희열을 느낀 경험이 있긴 있지만, 그가 수학의 아름다움을 설명할 때 머릿속에선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선율이 떠올랐다. 3막의 이 부분, “이게 들리지도 느껴지지도 않나요? 이 선율이 내게만 이토록 놀랍고 감미롭게 들리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선생님.) 물론 나도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이나 『박사가 사랑한 수식』 같은 책을 읽다가 수학의 아름다움에 잠깐씩 넋을 잃곤 했었다. (수학에 대해서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허수라는 것은 양수만 생각한 사람들에게 놀라운 유연성을 선물했다는 것. 음수는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꿈과 가능성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 혹은 사람들이 이루지 못한 꿈이 너무 많아서 음수를 만들어냈다는 것. 분수란 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많은 관계를 설명할 수 있다는 것. 사람과 사람 사이엔 분수만큼이나 많은 다양성이 있다는 것.)

이진경 ⓒ수유+너머

그런 그가 ‘그 좋아하던 수학’을 그만두게 된 것은 한국 사회 현실과 닿아 있다.

“친구의 형이나 누나들이 운동권이었어요. 대체로 79학번, 80학번들이었으니까요. 그들의 세계에 나름대로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나야 내 문제의식으로 움직이는 스타일이니까 나서서 운동이란 걸 하진 않았었죠. 그런데 80년대에 운동이란 건 피하기 힘든 나의 현실이더라고요. 사람들을 만나도, 잠깐씩 모여서 이야기만 해도 긴장이 있었어요. 전투경찰이 와서 쫓아내는 건 다반사이고 이야기는 항상 광주 사태나 전태일 이야기로 흘러갔죠. 유령과 함께 학교를 다니는 기분이 들었어요. 옆에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는데 이야기만 하면 그 이야기들이 나오니까요. 삶에 대해서 진지해질라치면 운동은 피할 수 없는 거였어요. 저는 지금도 딴 건 몰라도 진지하긴 해요. 내게 있어서 진지함은 뭐냐면, 옳다고 믿으면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대학 입학하고 한 학기 지나자 우선 좋아하는 많은 것들부터 중단하기 시작했어요. 음악을 좋아했는데 포기하고 그때 수학도 중단했어요. 대신 운동하는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기 시작한 거죠.”

그 공부의 결과로 태어난 게 87년을 떠들썩하게 했던 책, ‘사구체’ 논쟁책이다. 정식 제목은『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

“대학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대학원 선배 찾아가서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빌려 읽고 충격을 받았어요. 첫 문장인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부터 그 뒤의 문장들이 너무 아름다워서 사로잡혔어요. 내친김에 선배를 찾아가서 『경제학 철학 초고』 좀 빌려달라고 했더니 몰래 복사한 책을 빌려주면서 ‘뼈가 녹는 책이니 조심해서 읽으라’고 했어요. 영어로 봤는데 정말로 뼈가 녹는 책이더라고요. 무척 감동을 해서 맑스에 확 빠졌죠. 나중에 『자본론』도 읽었는데 그때 그 책을 구해준 게 바로 진중권이었어요. 누나가 보내줬다고 자랑하면서.”

‘하나의 유령이 유럽을 배회하고 있다.’ 그 첫 문장의 충격을 움베르토 에코는 베토벤 교향곡 5번이 고막을 때리는 느낌과 같다고 표현했다. 나 역시 대단한 충격을 받고 그 유령이 무엇일까 조마조마해가며 책장을 넘겼던 기억이 난다. 이진경이 진중권의 누나가 부쳐준 영어로 된 펭귄판 『자본론』을 읽던 85년의 한국 상황은 최초의 노동자 동조파업으로 발전할 대우 어패럴 파업이 있던 때였다.

“85년 대우 어패럴 파업(구로 동맹 파업. 노동자 최초의 정치적 연대 파업. 김문수. 심상정 등이 주축. 그 다음 해의 조선일보 1면엔 해고 노동자들과 함께 한미은행 영등포 지점을 점거한 연세대 학생 박래군의 사진이 실린 적도 있었고 그 이듬해엔 다 알다시피 6월 항쟁이 있었고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있었고 6.29선언이 있었다.)이 우리에게 말해준 건 학생은 학생 운동만 하는 게 아니고 운동은 혁명 운동이어야 한다는 거였죠. 그때 대학 출신 위장취업자들이 많아지고 야학도 많아졌고 논쟁도 많아졌지요. 한마디로 사상 투쟁의 시기였어요. ‘올바른 운동이란 어떤 노선을 견지해야 하는가? 노동 계급의 입장에서 운동하는 게 뭔가?’를 다시 근본에서 생각해봐야 한다는 이야기들이 나왔어요. 그 무렵 《창작과 비평》 같은 잡지에 사회 구성체 논쟁들이 실렸어요. 저는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열 번도 넘게 읽으면서 고민했어요. 조악하게 타자로 친 흐릿한 복사본을 읽으면서 한국 사회에서 운동을 하려면 한국 사회가 어떤 상태인가 알아야 하고 그에 따른 원칙과 입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 고민을 묶은 게 ‘사사방’으로 알려지게 된 책이었어요. 그때 상도 연구실(서울대 사회학과 김진균 교수가 해직 당시 만든 연구실)에서 공부하면서 레닌의 영어판 전집을 구해서 세미나 하면서 읽었어요. 또 일본과 중국에서 자본주의 논쟁과 역사적 배경도 봤고 그런 것들을 엮어서 쓴 건데 정말 미친 듯이 써서 한 달도 안 걸렸어요. 정말 뭐에 홀린 듯이 써서 손이 다 망가졌어요. 나중에 감옥 갔을 때 편지라도 쓸라치면 손이 아파 쓸 수가 없었죠. 손이 망가져서 그 책도 사실은 나중에 딴 사람들이 옮겨 써 준거예요.” (그때 NL쪽에는 이진경에 대항하는 조진경이란 논객이 있어서 학생들 사이에 그 정체를 둘러싸고 수군거림이 있었다. 그 시절을 돌이켜 본 어떤 선배는 ‘참으로 무협지 같은 시절’이었다고도 말했다.)

직업 혁명가를 꿈꾸던 그는 90년 2월 3년 만의 대학원 졸업을 앞두고 1월에 결혼을 하는데 제주도로 신혼여행 다녀와 전화 신청을 하러 가던 길에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체포된다. 만약 체포되지 않았으면 방위를 가기로 예정되어 있었던 참이었다.

“감옥에선 바빠서 처음 일 년 반은 책을 못 읽었어요. 서울구치소에 정치범이 300명 있었어요. 윗방에 김근태, 아랫방에 노회찬 등 밖에선 결코 못 만날 사람들을 만나서 토론하고 놀았죠. 너무 바빠서 아침에 배달되는 한겨레신문을 저녁에야 겨우 봤어요. 91년 청주교도소에 노회찬 의원이랑 같이 있는 동안 소련이 망했죠. 우린 사회주의자로 잡혀갔는데 사회주의가 붕괴됐다니까 우리 앞날은 어떻게 될까 답답해서 계속 신문을 뒤져봤어요. 그러다가 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하잔 생각을 했어요. 맑스주의 안에선 사회주의 붕괴를 이해할 방법이 없으니까 맑스주의 바깥을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어쨌든 노동자를 위한 글쓰기를 계속할 생각이었으니까 쉬운 문체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해서 감옥에서 셰익스피어도 다시 읽고 그랬죠. 그런데 옆방에 문학청년이 있었어요. 그 친구가 김현의 『시칠리아의 암소』가 굉장히 좋다는 거예요. 거기서 푸코를 알게 된 거죠. 정말 글을 잘 쓰더라고요. 감옥을 나가서 읽어보자 생각한 거죠.”

서울대 불문과 김현 교수의 『시칠리아의 암소』의 제목은 풀을 뜯어 먹는 암소가 아니라 그리스 시대 암소 모양의 고문 기구에서 따온 것이다. 이 책은 이성의 이름으로 저질러지는 폭력에 관한 책이고 당연히 푸코를 추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바로 그 시절이 우리 이야기의 첫 부분, 내가 푸코의 『광기의 역사』를 읽고 이진경은 감옥을 나와 프랑스어 문법책을 끼고 푸코의 『말과 사물』을 읽는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다. 『말과 사물』이야말로 푸코를 프랑스 최고의 인기 지성인으로 만든 책이다. 이 책을 프랑스 사람들은 바캉스 가는 바구니 안에도 넣어가지고 갔을 정도였는데 이 책이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이란 것도 사실은 최근의 산물이란 것(인간은 최근의 발명품이란 것)이고 우리의 이성이란 것도 역사적으로 변해왔단 것이다. 즉, 이성과 비이성의 경계는 역사적으로 달라질 수 있단 것이다. 푸코는 이 책을 다른 감정 아닌 조소와 희망의 감정으로 썼다 말한다.

서구 문화의 가장 깊은 심층을 드러내려는 시도를 통해서 나는 외관상 고요하고 움직이지 않을 것 같은 우리의 대지에 불안정성과 틈새를 회복시키고자한다. 대지는 우리의 발밑에서 다시 한 번 불안하게 꿈틀거릴 것이다. (『말과 사물』 서문 중에서)

감옥에서 나와서 푸코 책을 읽는 동안 우리의 혁명가는 생활은 어떻게 했을까?

“글쎄요. 어떻게 살았을까? 원고료 등으로 대강대강 살았던 것 같아요. 92년에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을 어느 정도는 호구지책으로 냈어요. 잘 팔린 편이었죠. 그 책 때문에 감방 동료의 주선으로 문예아카데미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강의를 열심히 준비했어요. 그때 녹취한 것을 푼 것이 바로 『철학과 굴뚝 청소부』네요. 그 뒤로 쭉 읽고 쓰고 공부하고 그렇게 살아요. 요샌 생물학 공부를 4년쯤 했고 그리고 들뢰즈란 철학자를 쭉 공부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이런 책을 무슨 재미로 읽느냐고 물어보는데 저는 재미있어요. 저는 내면이 없는 인간이에요. 관심사 따로 일 따로가 아니라 관심사가 곧 일이죠.”

Hieronymus Bosch, The Ship of Fools(부분), 1490-1500
Oil on panel, Louvre, Paris, France

『철학과 굴뚝 청소부』가 청소년용 혹은 논술용 다이제스트 철학책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데카르트에서 들뢰즈까지 근대 철학의 경계들을 살펴본 『철학과 굴뚝 청소부』의 ‘푸코’ 편에는 보쉬의 「바보들의 배」란 그림이 나온다. 그림 속에서 배에 탄 사람들은 광인들이다. 광인들은 자기들의 말을 알아듣는 사람들을 찾아 (고향에선 축출된 채) 배를 타고 끝없는 순례길에 나선다. 고깃덩어리를 마이크 삼아 떠드는 그들의 앞날에 있을 답답함과 외로움과 고단함을 생각하면 경계를 허무는 일의 필요성을 다시 한 번 절감하게 된다. 경계를 허물어봐야 하는 이유는 뭘까? 우리가 생각할 가치도 없다고 여겨버린 영역을 다시 물어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진경이 고백한 ‘나는 내면이 없는 인간’이란 건 무슨 말일까?

“나의 최대의 적은 자아란 말이죠. 자아를 깨야 한다고 생각해요. 99년에 속해 있던 조직 사람들과 갈등이 심해서 후배들과 같이 조직 생활하기 힘든 정도가 되었어요. 잔소리한다는 말도 들었고요. 그때 우연히 성철 스님의 『자기를 바로 봅시다』 책을 봤더니 거기에 송대 스님이 쓴 『벽암록』에 대한 언급이 나와요 .그래서 얼른 좌선도 해봤지만 소용없었죠. 그때 사당동에 살고 있었는데 산보나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관악산 약수터 쪽으로 갔어요. 그런데 노인네 한 명이 누워서 계속 쌍스런 욕을 하는 거예요. 주변에 나밖에 없어서 깜짝 놀라서 봤더니 눈이 풀려 있더라고요. 그런데 그 모습을 보니까 그게 바로 조금 전까지의 내 모습이더라고요. 그 노인은 입 밖에 냈고 난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똑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길로 미용실로 내려가서 머리를 빡빡 깎았죠. 미장원 아줌마가 놀라서 말리는 걸 ‘아이, 그냥 깎아주세요.’라고 말했죠. 그래본들 뭐가 달라지겠습니까만 그때 ‘나는 다 잘했다. 나를 기준으로 남들은 잘못했다.’ 그 생각을 버린 거죠. 내 생각이 옳다는 걸 내려놔야 남의 생각에 귀를 기울이게 되고 섞일 수도 있다는 걸 갑자기 깨달은 거죠. 그래서 불교에서 자아를 적으로 삼는 걸 알게 되었고요. 『오래된 미래』에도 ‘모든 사람의 적은 자아’라는 문구가 나와요.”

『벽암록』은 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꼽는 책이고 좋아하는 책을 딱 한 권만 꼽으라 해도 꼽는 책이라 한다. 아름다워서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데도 도저히 이해할 수는 없는 책이 『벽암록』이란 건데, 아름다워서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데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여자 말고 또 있을까 싶어서 재빨리 구해서 밤마다 읽어보다가 그만 너무 속상해서 울 뻔했다. 이해를 못 해서도 그랬지만 솔직히 질문을 구하는 자를 너무 많이 애타게 하고 때리기까지 한다.

이를테면 이런 문답.

“달마 대사가 서녁에서 온 까닭은 무엇입니까?”
“햇빛 속의 산을 본다.”

“최고의 진리에 이르는 길은 무엇입니까?”
“구구는 팔십일.”

이를테면 이런 말.

“너무 똑똑한 체하고 꼬치꼬치 묻고 다니는 놈은 때려주는 게 가장 좋은 약이다.”

하지만 이런 문장들.

“봄이 되어 백화가 피어나되 어느 누구를 위해 피지는 않는다. 백화가 난만한 모양이 지극한 도와 대법의 자기표현이다.”

“15일 이전의 일은 너희에게 묻지 않는다. 영원한 미래인 15일 이후에 대해 뭔가 의견이 있으면 말해보라.”

“세상 사람들은 비가 오면 날씨가 나쁘다 하고 비가 그치면 날씨가 좋아졌다 한다. 계속 해만 쪼이면 가뭄이 든다 하고 비가 많이 오면 홍수다 하고 소란을 피운다. 그러나 우주는 인간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우주의 본체에서 보면 소나기도 태풍도 홍수도 가뭄도 모두 자연현상일 뿐 거기에는 선도 악도 없다. 우주의 진리를 파악하고 있는 자에겐 날마다가 참 좋은 날이다.”

“창공을 날아가는 날짐승의 발자취를 보는 대로 그려낸다.”

“도란 무엇입니까?”
“은주발에 담은 눈이다.”

이런 문장들은 이해 못 해도 아름다워서 손에서 내려놓을 수 없는 문장이다.

이진경은 생성의 철학자라 불리는 들뢰즈, 가타리의 『천 개의 고원』을 풀어 써주는 글 『노마디즘』을 냈다. 그 책 역시 내면이 없다 혹은 자아를 깨야 한다는 말에 대한 대답이 될 만한 글이다. ‘나는 ~이다’가 아니라 ‘나는 ~되다’가 얼마나 새로운 세계인가를 말해준다는 점에서 그렇고 제대로 다른 존재가 되는(become) 방법에 대해서 알려준다는 점에서 그렇다. 나는 『노마디즘』이란 책을 제목만 보고 비행기에 가지고 탔다가 죽도록 고생했다. ‘노마드’란 말이 전 세계를 떠돌며 여행한다는 말인 줄 알았고 ‘노마디즘’은 여행자의 덕목책 정도 되는 줄 알았다가 톡톡히 당한 것이다. 하지만 『노마디즘』 역시 아름다워서 손에서 내려놓기 힘든 책이다. 영화 <동사서독> 속의 구양봉은 형수가 된 애인을 잊지 못해 퇴락한 삶 속을 방황한다. 이진경은 이렇게 말한다.

<동사서독>의 구양봉은 떠돌아다녀도 유목민이 아닙니다. 상처에 매여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없는 사람, 상처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고 있는 사람은 아무리 떠돌아다녀도 유목민이 아닙니다. 유목민과, 다 쓴 땅을 버리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이주민을 혼동해선 곤란합니다. 오히려 유목민은 사막이나 초원처럼 불모의 땅이 된 곳에 달라붙어 거기서 살아가는 법을 창안하는 사람들입니다. 유목민은 떠나는 자가 아니라 그 자리에서 새로운 것을 창안하고 창조하는 자입니다.”

그 자리가 바로 유목민 이진경의 자리란 생각이 든다.

다른 존재가 된다는 건 곰곰이 생각해보면 다수적인 것, 익숙하고 통념적인 것에서 벗어나는 것, 지독하게 실천적인 것, 전복(顚覆)을 사랑하는 것, ‘진리란 무엇인가?’라고 묻지 말고 ‘어떤 진리냐?’라고 묻는 것, 새로운 영토를 만드는 게 목적이 아니라 머물고 있는 곳이 어디든 항상 떠날 수 있는 태도를 갖는 것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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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소개
정혜윤, 책 좋아하는 사람이랑 수다떨기, 책에 나오는 남자주인공 사랑하기, 책에 나오는 여자주인공 따라하기, 책에 나오는 음료와 음식 먹어보기, 책에 나오는 음악 찾아듣기, 책이 알려주는 장소에 가보기, 읽었으면 행동하기 등 자칭 “책 행동학”(?)의 창시자이고 싶어한다.

“마치 사랑이 그렇게 하듯 인생의 우여곡절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 덧없음이 착각인 것처럼 만들어주면서 내 속을 귀중한 실체로 채워주었다.” 프로스트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말했던 이 문장의 주어는 사랑이 아니라면 책과 여행뿐이다. 신년엔 달빛 크로와상같이 부풀어오른 아름다운 다리를 보러가고 싶다. 신년엔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아름다운 소녀가 바람속에 서있는 것 같은” 그런 도시들을 보고 싶다. 나 자신, 자신을 돌보지 않는 아름다운 소녀가 되어서 돌아오고 싶다.






 2000.9.1

이진경 - 나는 꼬뮌을 꿈꾼다

“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다”를 줄여 만들었다는 이. 진. 경 이라는 이름이 폭풍처럼 몰아쳤던 때가 있었다. 이진경이라는 이름을 눈으로, 혹은 짐작으로 찾아낼 수 있었던 시절, 이 시절이 지난 후, 언젠가부터 이진경은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철학과 굴뚝청소부>의 저자로 다시 등장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자기의 청년 시절로 기억하는 먹물들이라면 이진경이란 이름 앞에 범연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 
권보드래/


 
본명 박태호.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났고, 서울대학교 사회학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88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을 출간, 분석 범주에 대한 성찰에서 시작하여 한국 사회의 성격을 분석하고 변혁 전망을 제안하는 포괄적 이론 체계를 보여줌으로써 일대 충격을 던졌다. 이때부터 이진경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했다. 이후 {현실과 과학}[노동계급] 등에 주로 글을 쓰다 1990 1월 노동계급 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출소 이후 {철학과 굴뚝청소부}{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대한 일곱 편의 영화}를 비롯해 {수학의 몽상}{철학의 모험}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에서 왕성한 저술 활동을 했다. 지금은 '연구공간 너머+수유연구실'에서 공부와 강의를 하고 있다.


 
1 . 21세기 새로운 막스의 얼굴을 갖고 싶다

 
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다. 이 문장을 줄여 만들었다는 <이진경>이라는 이름이 폭풍처럼 몰아쳤던 때가 있었다.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 방법론}, 이론지 {현실과 과학}, 지하 선전지 [노동계급]에서 이진경이라는 이름을 눈으로, 혹은 짐작으로 찾아낼 수 있었던 시절. 1988년에서 1990년에 걸친 이 시절이 지난 후, 언젠가부터 이진경은 {상식 속의 철학,상식 밖의 철학}{철학과 굴뚝청소부} 같은 책의 저자로 다시 등장하기 시작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모두 자기 청년 시절로 기억하는 먹물이라면, 이진경이라는 이름 앞에 범연하기는 쉽지 않으리라. 그래서인지 이진경을 만나러 가는 길에서부터, 너무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었나 보다. 이진경이라는 이름이 정말 이것이 진짜 경제학이라는 뜻인지, 끝내 물어보질 못했다.


 
- 권보드래: 신원조사 몇 개부터. 고향은요?
 
- 이진경: 내가 나고 자란 곳을 묻는 거라면, 서울.

 
- : 출신 성분은?
 
- : 몰락해 가는 소부르주아. 완전히 프롤레타리아로 넘어가지도 않고 계속 몰락 중인.


 
- : 모범생이었는지?
 
- : 그렇게 말할 순 없지. 선생한테 대들다 눅신하게 맞은 것도 여러 번이었으니.

 
- :  요즘 저술 활동은 거의 모범적인데. 저서가 열 권이 넘는 듯?
 
- : 혼자 쓴 것만 쳐서 열 권 좀 넘는 정도.

- : 주로 출옥 후에 쓴 것 아닌가?

- : 그렇지. 91년 말 출옥하고 나서, 생각을 좀 정리하다가 93년경부터 {상식 속의 철학 상식 밖의 철학}{철학과 굴뚝청소부}{필로시네마} 등을 잇달아 쓰기 시작했으니까.


- : 투옥 전에 쓴 글은 성격이 달랐다고 기억하는데.

- : … 87년경부터 혁명을 꿈꾸면서 직업적 혁명가 조직에 대한 문제의식을 키웠지. 그게 노동계급 조직 결성으로 이어진 거고. 80년대 말에는 혁명론, 노동자 교육론, 운동 방향에 대한 제언 등을 많이 썼지.

이른바 노동계급 조직 사건. 딱히 조직 이름을 붙인 적은 없지만 [노동계급]이라는 기관지를 발행한 덕에 그런 이름을 얻었다. 이진경은 1990 1월 노동계급 조직 중앙위원으로 구속,  2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다행히(?) 보안법이 개정되는 덕에 예정보다 줄어든 감옥살이였다.

 

- : 묘하게 1990년 정도를 경계로 단절이 선명하게 느껴지는 편이다. 80년대 학번은 {사사방}, 90년대 학번은 {철학과 굴뚝청소부}로 이진경이라는 이름을 기억하는 것 같고.

- : 단절을 말하는 사람들은 대개 80년대와 90년대의 내 모습을 모두 아는 사람이다. 90년대의 나를 '탈주의 철학'으로 규정하고, ML주의자가 어찌 그럴 수 있느냐는 식의 논법을 많이 쓰지. 그러나 80년대의 운동이야말로 탈주적인 삶, 가장 지배적인 탈주의 방식이 아니었다 싶다. 기존의 지배적 체제,가치,;권력에서 벗어나려는 생각이 바닥에 깔려 있던 거니까. 탈주로서의 삶이라는 면에서는 연속적이라고 생각한다.


- : 말 그대로 연속적이란 말인가?

- : 단절 없는 연속일 수는 없겠지. 80년대 운동의 지향점이 사회주의였다면 그건 90년에 결정적으로 붕괴되었으니까. 그럼 새로운 삶을 꿈꾸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이었던 거지.맑스나 레닌으로 사유되지 않는 부분을 사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근대성이라는 주제로 이 문제에 천착하려 한 거고. 나로서는 80년대와 90년대는 연속 안에 있는 불연속이다.


- : 지금도 사회주의자라고 할 수 있나?

- : 80년대에 답할 때와 강도나 뉘앙스가 다르겠지만, 부정하진 않겠다. 사회주의자라기보단 꼬뮌주의자라는 게 적절하겠지.

- : 꼬뮈니스트? 공산주의자라고 보통 하지 않나?

- : 공산주의가 경제적 생산양식에 편향된 의미라면, 공동체적 삶인 '꼬뮌'을 지향한다는 의미에서의 꼬뮌주의는 다르다. 구분해서 쓰고 싶다.

- : 지금은 사실 푸코주의자나 들뢰즈주의자에 가깝지 않으냐고 묻는다면?

- : 그렇게 생각하고 싶으면 뭐 그래도 좋고. 푸코나 들뢰즈를 통해 맑스,레닌에게서 배우지 못한 것을 많이 배웠지만, '―주의자'라긴 어렵다는 게 내 생각이다. 푸코, 특히 후기 푸코에는 분명히 거리를 두고 있다. 자본주의에 대한 적대라는 개념을 분명히 하지 않아 논리적 궁지에 빠진 게 후기 푸코의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들뢰즈나 가따리는 스스로 맑시스트임을 천명하고 있으니, 푸코주의자다 들뢰즈주의자다 하면서 <전향>을 공격하려는 거라면, 글쎄. '―주의자'라는 말을 남용해 보면, 들뢰즈는 맑스주의자일 뿐 아니라 스피노자주의,니체주의,베르그송주의자이기도 하다. 거기서 내가 관심을 가진 건 그의 맑시스트적인, 그러면서도 맑스에 없는 면모이고. 새로운 맑스의 얼굴을 갖고 싶은 거지.


 
2 . 꼬뮌우애적 관계로 맺어진 세계

- : 90년대 이후 푸코나 들뢰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사실 같은데. 왜 그쪽으로 갔는지?

- : 80년대에 갔던 길은 끊겨 버렸다. 사회주의의 몰락을 맑스주의로는 설명할 수 없다. 역사의 불회귀점을 건넜다고 했는데 그게 뒤집혀 버린 거니까. 맑스주의 자체의 역사에는 자기도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공백이 있다. 기존 맑스주의 안에 없지만, 그럼에도 사유되어야 하는 중요한 영역이 있다는 거다. 그걸 무의식과 주체의 문제라고 판단했다. 푸코와 들뢰즈의 작업이 이에 해당하니까, 많이 배웠지.

- : 사회주의 붕괴로 모두 무로 돌아갔다고 주장하는 건가? 그럼 이전의 사회주의는 대체 뭐였을지?

- : 독자적인 생산양식이지, 자본주의로 환원되지 않는. 그러나 경제적 생산양식 아닌 또 다른 생산양식이 있다는 거지. 주체 생산양식이라고 난 부르는데. 이전의 사회주의는 <근대적> 사회주의였다고 생각한다. 경제적 생산양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주체 생산양식에선<근대적>이었다는 거지.


- : 근대라는 말로 너무 많은 걸 뭉뚱그리는 건 아닌가.

- : 자본주의에도 여러 종류가 있잖아. 파시즘·사회민주주의·비자발·반봉건 등. 그렇다고 자본주의라는 말의 의미가 사라지진 않는다.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의 지반이 무언가를 찾자는 거지. 반대로 말하면 오히려 미세한 차이에 관심이 많기도 해. 전체주의와 파시즘의 차이 같은 것.


- : 공통된 지반으로서의 근대란 뭘 말하는 건가?

- : 근대적 삶의 방식이자 근대적 주체생산 방식이겠지. 내 핵심적인 문제의식은 사회주의는 대체 왜 망했을까, 자본주의는 왜 안 망할까라는 거다. 간단하다. 경제적 생산양식으로서의 사회주의와는 달리, 분명 근대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 사회주의의 경제계획이나 법률 등은 극히 근대적이었으니까. 이걸 이해해야 사회주의의 몰락을 이해할 수 있다. 

- : 근대를 뛰어넘을 가능성을 찾았나?

- : 꼬뮌주의. 공산주의라고 할 때는 경제적 개념이 돼 버리는데,그걸로만 환원되지 않는 '꼬뮌' 말야. 함께 살아가는 행위에 대한 관심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꼬뮌주의라고 할 수 있는 삶의 방식이 있다. 예수나 프란치스꼬회나 프리메이슨 당 등이 보여준 거지. 우애적 관계로 삶의 방식을 재편하자는 제안. 보다 나은 삶에 대한 꿈이 있는 한 이런 운동도 영원할 거다. 꼬뮌주의는 희망의 원리이며, 그런 의미에서 영원하다
 

- : 공산주의만큼 강렬한 꼬뮌주의도 없었던 것 아닌가? 공산주의의 목적이란 결국 새로운 인간형과 새로운 사회질서의 창출 아니었나?

- : 맑스는 {독일 이데올로기}에서 생산양식과 인간의 변혁이 모두 필요하다고 했는데, 이런 지점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 : {독일 이데올로기}에서도 공산주의적 인간형을 모색했던 것 아닌가?

- : 휴머니즘이나 인간학은 내 동기가 아니다. <인간>이라는 모호한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건 없다. 문제는 인간 자체가 아니라 특정한 주체로 선 인간이다. 그리고 이 특정한 인간을 바꾸기 위해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경제적 생산양식만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다.생활양식의 구체적 조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


- : 구체적으로 뭘하란 말인지 모르겠다. 유유자적 비판적 의식만 간직한 채 살아가라는 말처럼도 들리고.

- : 그런 태도가 문제다. 누군가 잘 정리해 주면 좇아가겠다는 식의 생각 말야. 그런 명령-복종 체계에서는 자발적으로 삶을 만들어가는 새로운 주체가 탄생할 수 없다. 각각의 영역에서, 자율적으로, 이 고식적인 삶을 깨는 데 필요한 게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예컨대 나는 시공간이라는 측면에서 새로운 삶을 위한 노력을 평가하고 제안해 나가고 있다. 이것도 구체적인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생활양식의 문제는 인위적으로 명료화될 순 없으니까.
 

- : 그래도 지금까지 모든 혁명은 집단적 운동이었는데, 체계적 계획 없이 꼬뮌주의의 실천이 가능할까. 자족적으로 끝나는 건 아닌가.

- :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은 누구보다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만 계획의 구체성이 공상성을 극복하질 못했던 거다. 계획이 있다고 과학적인 건 아니다. 꼬뮌주의의 테제란 화폐에 대해 투쟁해야 한다는 정도겠지. 규칙이나 명령에 익숙한 삶의 방식을 깨 나가야 한다는 것하고. 어디서나 이런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는 걸 생각하면, 결코 국지적이거나 모호한 테제는 아니다. 계획이 명료하면 문제가 해결되나? 강령이 바뀌면 사회주의의 역사가 바뀔 수 있나? 중요한 건 삶의 방식, 사고 방식을 바꾸는 일이다 

- : 일상적이고 항상적이라는 점 때문에 실현하기 어려운 점도 있지 않나? 그 동안 다양한 조직 경험도 했을 텐데, 어떻게생각하는지?

- : 외부의 적과는 싸우기 쉽다. 문제는 내부의 적이다. 그러므로 혁명은 훨씬 힘들고 근본적이다. 기존의 운동방식도 여전히 필요하지만, 어떻게 자율적인 질서를 확보하느냐는 각자의 영역에서 파고들어야 할 문제다. 
 

- : 탈주가 비판의 제스처에 그치지 않고 삶의 문제가 되기 위해서는 무겁게 자극해 오는 힘 또한 있어야 할 텐데, 어떨까?

- : 일상과 싸우려는 의지 없이 혁명적 구절 몇 개 갖고 혁명 대오에 서 있다고 생각하는 건 착각이다. 공부한 게 맑스주의라, 혹은 노동운동이나 시민운동에 관여하고 있으니까 진보적이고 혁명적이라고 착각하는 사람이 많다. 실상은 맑스주의와 전혀 상관없는 공부를 하는 사람이 훨씬 진보적일 수도 있다. 문제는 뭘 공부하고 어디서 활동하느냐가 아니라 어떻게 살아가느냐다. 어떻게 삶을 갱신하고 변화시키는 실천을 하느냐지.
 

- : 그런 실천을 <탈주>라 부르는 건가?

- : 내가 말하는 탈주란 세상<으로부터> 탈주하는 게 아니라 세상<> 탈주케 하는 거다. 긍정이고 창조다. 지배 체제가 이걸 포섭하면 빠져나가고 또 빠져나가고. 
 

- : 개개인의 탈주라는 게 자본주의에 먹혀버릴 가능성이 크지 않나. 무기력해 보이기도 한다.

- : 무기력하기보다 힘들다. 빠져나갔다가 잡히고 또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되니까. 자칫 허무해질 수도 있지만, 그런 식으로 자유의 공간을 계속 만들어가야 한다. 그걸 포섭하다 보면 지배 체제 자체에 느슨한 구멍이 자꾸 생기기 마련이니까. 
 

- : 그래서야 세계의 근본적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을까.

- : 자본주의 이후 사회주의, 그 다음 꼬뮌주의 이런 식으로 생각해선 결코 꼬뮌주의가 올 수 없다. 꼬뮌주의는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일이고, 당장 급무는 자본주의를 뒤엎는 일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안에는 수많은 외부가 있다. 구멍 같은 게. 꼬뮌주의란 이 구멍을 계속 파는 거다. 그래서 자본주의가 넘어가면 좋고, 적어도 그렇게 꼬뮌주의를 현재형으로 만들 수 있으니까.
 


 
3 . 삶의 변혁 끝없는 과정

이진경의 말은 달변이라고 하면 꼭 좋을 말이다. 막힘이 없고 논리적이며, 주술 관계 하나 함부로 어긋나는 데 없이 깔끔하다. 머릿속에서 이미 수없이 자문자답한 문제에 답하는 것 같다. 이 깔끔하고 유창한 언어를 교란시키기 위해서는<날것>을 들이대야 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모든 순간 순간을 <탈주>라 부를 수 있는 행동으로 채워나가고 계신지요? 어디 사시죠? 가족은? 80년대의 탈주가 그토록 위험했는데, 지금의 탈주란 이렇게 평온해도 되는 건가요?… 이런 질문이 과연 단단한 논리의 벽을 얼마나 뚫을 수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결국 그런 질문은 하나도 던지지 못했다. 계속 말꼬리 잡고 늘어지다가, 이 때쯤에는 좀 슬퍼졌기 때문이다. 나는 뭣 땜에 이리 추궁하듯 당당한가? 어떤 사람이80년대를 열심히 살았다는 이유로 지금까지 추궁당해야 할 이유가 있는 건가? 제대로 살아보지 못한 나, 왜 열심히 산 사람을 향해 "책임져!" 하고 아우성치려 하는가?  이진경이라는 사람은 여전히 성실하고 진지했으며 철두철미 열심히 사는 것 같았다. 그렇게 보였다.


- : 자본주의 사회지만 난 그렇게 살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 : <>가 아니라 <우리>. 집단화되면 자본주의와의 접촉면을 극소화시킬 수 있다. 그래서 도시 실업자와 노동력 부족 지역의 연계나 지역 화폐 운동 같은 데 관심이 많다. 
 

- : 소수자로서의 선언처럼 들린다. 자본주의 사회는 계속되겠지만, 결단한 소수는 자본주의적 삶을 뛰어넘을 수 있다는 식으로.

- : 자본주의는 하나의 공리계다. 무릇 공리계란 새로운 공리가 계속 추가되다 보면 전혀 새롭게 탄생하게 돼 있지. 애초의 공리계는 붕괴하고.
 

- : 혁명이 아닌 개혁, 그저 안에서 꿈지럭대는 데 그치지는 않을까?

- : 관건이 되는 공리를 공격하면 공리계는 변화한다.

 

- : 소수자로 조용하게 사는 데 그칠 위험은 없고?

- : 소수자가 조용하다고? 소수자는 소란스럽고 시끌벅적할 수도 있다. 권력에서 소외되어 있다고 조용하랄 법 있나?
 

- : 구체적으로 자기 자신은 어떻게 사나?

- : 편안한 삶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으니까. 적게 일하고 적게 번다. 돈 버는 데 쓰는 시간은 최소한으로 하고, 하고 싶은 일 하는 시간을 늘리면서 산다.
 

- : 저술가로서만 활동해도 먹고사는 게 가능한가?

- :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회의적이다. 그래도 글쓰고 번역하는 걸로 먹고사는 사람들이 있긴 있지.
 

- : 전문 연구자로서의 역할과 대중적 저술가로서의 역할 사이에 갈등은 없는가?

- : 난 그저 내 나름의 화두를 찾을 뿐이다. 한 곳을 미친 듯이 파는 대신 이것하다 저것하다 한다. 글쓰기에서는, 운동할 때 갖게 된 문제의식인데, 쉽게 쓰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려고 한다. 
 

- : 기회가 닿으면 대학에 자리잡을 생각도 있는지?

- : 교수 안하겠다는 신념은 없으니까. 특별한 노력을 안 한다 뿐이지. 난 대학에 관심이 있는데 대학은 나한테 관심이 없는 것 같아

- : 박사논문 제목이 [서구의 근대적 주거공간에 대한 공간사회학적 연구]였죠? 사회학에 관심을 끊은 게 아니라면, 구체적으로 한국 현실을 탐구할 생각은 없는지?

- : 근대가 전형적으로 나타난 곳을 택해 근대에 대한 이해를 꾀하는 게 더 생산적이리라고 생각한다. 맑스가 독일 대신 영국을 택했듯
 

- : 너무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문제에만 몰두하는 것 아닌지. 삶의 조건을 조금씩 바꾸려는 구체적인 노력도 필요하지 않은가. 구체적인 개선과 진보를 등한시하는 건 아닌가.

- : 현실 운동에 대해 발언하지 않는다는 비난으로 들리는데. 그럼 모든 사람이 운동에 뛰어들어야 한단 말인가? 운동 아닌 모든 건 무용하다는 말? 그건 위험한 얘기겠지. 어차피 내가 모든 일에 관심을 가질 순 없다. 노동운동이나 정치활동도 해 봤는데, 내가 잘할 수 있는 게 아니더라구. 
 

- : 어쨌든 추상 수준이 높은 사유를 주로 하고 있으니까, 현실과의 접점을 찾지 않는다면 자칫 공상이 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 : 자기 삶을 변화시키면서 끊임없이 실험대상으로 삼는 정신이 필요하다. 연구공간 너머와 수유연구실에서도 꼬뮌주의적 삶의 방식을 실험하고 있는 셈인데, 아직까진 성공적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실패를 두려워하면 주사위를 던질 수 없겠지.
 

- : 소수자 얘기를 계속 했지만, 실상 그렇게 말하면서 시대의 주류를 타고 있는 건 아닐까. 지금은 정치·경제적 변혁을 위해 밑바닥에서 헌신하는 쪽이 소수자로서의 삶에 더 가까운 게 아닐까.

- : 노동운동·시민운동 등, 물론 중요하다. 다만 내가 거기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 없을 뿐이다. 소상하게 알고 관여하고 있어야 말할 수 있는 일일 테니까. 뭐든지 비판할 수 있는 철학자, 그건 웃음거리라고 생각한다.


- :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물어보자. 80년대에 대한 부채의식이랄까, 혹 그런 건 없나?

- : 내가 뭐 잘못한 게 있기라도 한가? 부채의식, 없다. 나는 80년대에 대해 정말 감사하는 마음이다.

- 출처 : 퍼슨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