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ㅏ

박노자, 신학성서 수정론

로드365 2007. 3. 9. 15:33

우리나라 먹물들은 박노자 보면서 X잡고 반성좀 해야될꺼다.



유사 성행위와 유사 신앙 행위

2007-03-14 11:52 작성

유럽 같으면 조금 더 대담하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한국 같으면 "이미지 클럽/대딸방에서 아르바이트한다"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여성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일이 "부끄러운 직업"으로 인식되지요. 물론 실제로는 성매매 정도로는 아니지만 일단 성적 이미지를 상품화시키고 남성의 일방적인 만족을 전제로 하는 직업인 만큼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고 또 심신상의 피로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기에 별로 "자랑"스러워할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과연 다른 직종에 비해 그렇게 "부끄럽게"만 생각해야 하나요? 솔직한 말씀으로는, 저는 "마사지 클럽 아가씨"보다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훨씬 더 부끄러운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사지클럽에 오는 손님도 한 시간 동안의 "플레이"를 "사랑"으로 착각할 일이 없지만 서빙하는 여성도 굳이 "사랑" 따위를 연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 않습니까? "클럽"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일시적인 만족을 주되 본격적으로 외로움과 같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대체물"이라는 것을, 양쪽에서 다 알고 솔직하게 하는 것이지요. "유사 성행위"와 남녀간의 진짜 사랑 사이의 거리란 거의 천문학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대다수의 교회에서 설교되어지는 이야기나 행해지는 행위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사랑"의 사이의 거리도 거의 같을 것입니다. "우리 종파"가 아닌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느니 진정한 영적 생활을 못한다느니 하는 이야기와, 차별과 배제가 없는 하나님의 평등한 사랑을, 사실 같은 차원에서 논하기조차 어렵지요. 그리고 만법의 연기를 깨닫고 팔정도를 통해 사생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원래 논리와, "49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거의 메꿀 수 없는 갭이 벌어져 있는 것이지요. 대다수의 교회나 사찰에서 "신앙"이라고 포장하여 파는 것은, 마사지클럽에서의 "유사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진정한 신앙의 "대체품" 내지 그 수준에도 못미치는 신앙적 "짝퉁 상품"입니다. 그런데 마사지클럽 아가씨가 자신의 손을 움직이는 것이 돈이 아닌 사랑이라고 거짓말 하지 않는 것과 달리, 수많은 목사님 분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전달한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이 분들이 차라리 이미지클럽에 가서 거기에서 진솔함과 겸손함을 배웠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분들께서 "부자가 낙원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충실히 따라 가난은 몰라도 적어도 국내 도시 근로자의 한달 평균 소득인 1,600.000-1,700.000원 정도로 자신들의 소득과 소비를 조절했으면 그나마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결고리가 보였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과연 많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면 지금의 교회가 "사학법"을 갖고 떠드는 대신에 아이들의 인성을 파괴하는 성적, 등수 없애기 운동 정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회"/"사찰"이라는 제도상에 이야기되어지고 실행되어질 수 있는 "신앙"과 진정한 신앙의 차이는, 말그대로 이미지클럽과 이도령과 성춘향의 첫날밤의 차이 정도지요. 그러면서도 저 분들은 이 사실을 꾸준히 부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직자들이 "사회적 어른"의 대접을 받는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대딸방"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정말로 부끄러워하실 것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반론이 가능해요. 대형 교회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 "성령"을 받아보고 미쳐보는 것이, 마약복용이나 알콜 중독, 인터넷상에 이효리 팬클럽하는 일 등 또 다른 종류의 "자기 물화"보다 낫지 않느냐는 반론이지요. 맞습니다. 비툴어진 사회에서 비툴어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필요하다면 안방 극장과 술보담 교회가 더 나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물론 거기에 다니다가 아주 광신으로 안나가는 한에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위안"과 진정한 의미의 "신앙" 사이의 차이를 좀 인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위안"이야 교회에서도 사찰에서도 휴게텔에서도 다 가능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어딜 가나 뭘 하나하고 무관하게 자기 안에서의 거짓을 불태우고 자기 바깥에서의 거짓을 적어도 "거짓"이라고 정확하게 부를 수 밖에 없는 아주 특별한 마음상태입니다. 그런데 그걸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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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신약성서 수정론 | 만감: 일기장 2007/03/09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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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며칠 도올의 "구약 폐기론"으로 세상이 약간 시끄러웠습니다. 제 개인적인 기억으로는, 구약을 읽었을 때에는 가끔 가다 이게 무슨 대량 학살 찬양서가 아닌가 라는 의심이 들 정도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나안의 땅을 정복했다는 걸 묘사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하나님이 몇 백 명을 칼에 맡겨라고 분부하셨다"는 이야기가 하도 자주 나와서 제 어린 심정으로는 가히 공포없이 읽기가 어려웠어요. 실제 고고학적으로 봤을 때에 가나안의 정복이 없었다는 사실 ("원 유대" 부족들이 원래 주민들과 실제 "섞인" 것이지요)과 야훼가 원래 벼락과 전쟁, 무사의 신이어서 야훼의 숭배에 남성 우월주의적, 폭력적 요소가 강했지만 이는 고대 유대인의 문화 전체를 대표하지 않는다는 사실 등을 알게 되었는데, 구약에 대한 반감은 오래 갔습니다 (<아가> 정도는, 여성 가슴에 대한 관능적인 묘사를 포함한 애로틱한 요소도 있고 해서 참 좋았지만....). 결국 종교의 텍스트란 해석 나름이고 구약의 살인주의적, 선민주의적, 폭력주의적 요소들을 "해석"을 통해 어느 정도 무력화시킬 수 있을는지도 모르지만 (예컨대 상징적으로만 이해하기를 촉구할 수 있지요) 이걸 인생의 지침서로 삼으면 큰일 나지요. <법구경>이나 신약, <도덕경>과 같은 수준의 보편주의적인 종교 텍스트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성서는 질적으로 전혀 다른 수준이기에 구약과 같이 논하기도 어렵지만 제가 봤을 때에는 내부적 모순이 적지 않고 일부는 아나코코뮤니스트로서의 예수의 본격적인 주장과 거리 먼 주장들도 수록된 듯합니다. 예컨대 재판관에게 가지 말라고 하여 사법부 권력의 정당성을 부인하고, 이 세상 (즉, 현존하는 계급 사회)이 악마의 통치를 받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암시하고 부 축적의 부도덕성을 강조하는 예수는, 갑자기 "황제 (시서)의 것을 황제에게 주고,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에게 주라"고 하시지 않았나요? 물론 어디까지 예수 본인의 행적에 대한 (이미 애매해진) 기록이고 어디부터 성경 편찬시의 가탁인지 알 게 없어서 "예수의 말"이라고 단정짓기 어렵지만 이게 참 모호한 표현에요. 당장에 로마의 황제에게 세금을 일단 바치고 반란을 일으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하면 모르지만 만약 보다 깊은 차원에서 "황제에게의 충실한 신민 의무 다하기와 하나님 섬기기가 동시에 이루어질 수 있다"는 식으로 해석되면 이는 원시 기독교의 일부 "반란적" 주장들과 잘 안맞아요.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이 전시에 전쟁 자금으로 쓰인다면 비폭력을 주장하는 예수의 입장에서는 이를 어떻게 봐야 합니까? 사실, 일반 선남선녀의 입장에서는 "황제의 나라"의 충실한 신민으로 살아가기가, "하나님"을 자기 마음 속에서 찾는 것보다 훨씬 쉽지요. 학교의 상황을 생각해보시지요. 자기 성적을 올리려고 자기의 등수를 높이려고, "황제의 나라" 규칙대로 "열심히 사는" 아이들이 많지만, 서열화된 등수 체계의 비윤리성, 반교육성을 반대하고 탈학교 운동을 벌이고 대안 학교를 찾는 이들이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있긴 있어도 아직 소수지요. 즉, 이미 우리 마음까지도 상당부분 다스리는 "황제"를 받아들이기는, 무형 무성, 불가시, 불가문의 하나님을 찾는 것보다 쉬운 일이지요. 그래서 이 세상의 온갖 폭력들을 다 거부하는 "하나님"을 위주로 종교를 조직하자면, "황제"에 대한 거부의 수위를 조금 더 높이는 것이 적절치 않았나 싶어요. 그렇게 거부 수위를 높여도 어차피 대다수가 마음 속의 하나님을 위해 병역을 거부하는 것보다 "다들 가는" 군대에 순순히 가겠지만, 어쨌든 이것이 - 불가피하다 해도 - 하나님의 논리를 배반하는 행위라는 부분을 조금 더 강조하는 게 낫지 않나 싶어요. 저 같으면 예수의 "황제와 하나님"의 담론을 다음과 같이 수정했을 것입니다: "저항할 만한 자신이 없으면 황제에게 당신의 것이 빼앗기도록 일단 두라.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일이라고는 자기 기만하지 말라. 황제의 세상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펼쳐질 수 없는 것이고, 황제를 거부하는 자만이, 최소한 마음으로라도 황제를 떠난 자만이 하나님에 접근할 수 있다".

제 종교도 아닌데, 이렇게 종교의 경전을 고쳐보는 것이 외람된 일입니다. 그런데 기독교가 산 종교가 되자면 그 경전에 대한 비판적 재해석이 계속 이루어지고, 예수 그 당시의 초기 기독교인 일부의 "빈란적인" 의지와 성경 편찬 당시의 순응주의적 분위기 사이의 차이도 명확히 밝혀져 원시 기독교의 "참신한 반란"에 대한 사상사적 복원도 좀 이루어져야 되지 않을까요? 어쨌든 종교란 믿는 자의 것이고, 하나님을 진심으로 찾는 이가 결국 황제에 대한 보다 강력한 거부에 개인적으로 이를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의 대형 교회 같으면 하나님 자체도 이미 황제화됐으니 할 말이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