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ㅣ

이순재, 야동순재

로드365 2007. 2. 28. 09:50



열정의 이순재, 천의 얼굴을 연출하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나이보다 젊게 보인다거나 나이 듦을 은폐하기위한 상투적 표현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하지만 이 표현의 진정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사람이 있다.

일흔둘의 나이라고는 상상하기 어렵다. 나이에 비해 젊게 보이는 단순한 외형적 이유 때문이 아니다. 하는 일에 치열한 열정과 정열이 있기 때문이다. 그 열정은 나이라는 물리적 시간들을 무력화시키고 삶은 시간의 장단의 문제가 아니라 치열함의 문제라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다. 열정으로 나이를 잠식시키며 브라운관에서, 스크린에서, 그리고 무대에서 천의 얼굴을 연출하는 연기자 이순재다.

그 천의 얼굴은 브라운관을 가로질러 안방의 시청자에게, 스크린 너머의 관객에게, 그리고 무대와 떨어진 객석의 관객에게 삶의 진정성을 전달하고 있다. 이순재의 변화무쌍한 얼굴과 목소리로 인해 우리는 희로애락애오욕(喜怒哀樂愛惡慾 )의 감정의 문양을 느끼며 때로는 감동을 때로는 즐거움을 선사받는다.

늘 그렇듯 연기의 무대에서 오늘도 그를 만날 수 있다. 요즘 젊은 스타들 중 상당수가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들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인기와 상품성을 추동할 수 있는 효과가 낮기에 좀처럼 서지 않는 연극무대에서 일흔둘의 노년의 연기자, 이순재를 만날 수 있다. 배우자와 사별한 노인들이 다시 만나 부부의 연을 맺는 것을 ‘늙은 부부 이야기’로 관객을 만난다. 이 연극 무대에선 숨결 하나까지 포착할 수 있는 생생한 이순재의 연기의 진수를 맛볼 수 있다.

그리고 50여년의 긴 여정에 이르는 연기인생에 처음 출연하는 MBC일일 시트콤 ‘거침없이 하이킥’에서 색다른 모습을 보이며 ‘야동순재’(야한 동영상을 보는 이순재의 극중 연기로 시청자로부터 얻은 별칭)로 10~20대의 폭발적인 관심을 받으며 젊은 스타 못지않은 인기를 얻고 있다. 또한 KBS 월화 드라마 ‘꽃피는 봄이 오면’에선 미혼의 손자와 아들과 함께 사는 할아버지로 일상성이 묻어나는 연기를 보여주고 있다.

도저히 젊은 연기자도 소화하기 힘든 활동 양이다. 무엇보다 이 세 캐릭터는 성격이 전혀 다르다. 하지만 노년의 이순재는 캐릭터를 소화함에 있어 그리고 연기를 함에 있어 한치의 흐트러짐도 보이질 않는다.

“새벽까지 촬영하고 여러 작품을 동시에 소화해야하니 힘은 들지.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불가사의한 힘이 생기는 것 같아. 바로 열정이지. 난 연기를 할 때 바로 그러한 열정이 생기는 것 같아.”

그를 만난 지 10년 동안 만날 때마다 그리고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리고 연기에 임하는 자세를 볼 때마다 받는 인상은 꼿꼿한 자존심의 선비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고등학교 시절 연극에 맛을 들여 대학 연극반(서울대)에 들어가 활동을 하면서 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은 이순재는 1962년 KBS개국 기념 작품인 ‘나도 인간이 되련다’ 로 탤런트로 데뷔한 뒤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해왔다. “내가 배우를 시작할 때 배우는 천대를 받는 직업이었어. 물론 지금도 이런 시각이 존재하지만 그때는 매우 심했지. 우리 직종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 있기 때문에 자존심을 지키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 나역시 욕구를 가진 인간이지만 나름대로 절제와 도덕성을 지키려고 한 것이지”

바로 원칙주의자와 선비의 느낌은 이러한 이순재의 절제된 생활과 엄격한 철학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다. 삶에서 뿐만 아니라 연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연기에 충실하지 않거나 촬영에 임하면서 불성실한 생활 태도를 보이는 연예인을 보면서 실망이 커지면 보고 싶은 사람이 바로 이순재다. 반대의 그림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연기에 있어 원칙주의자이기 때문이다.

대사중 단어의 장단음을 놓고 5시간 격론을 벌일 정도로 연기에 있어서는 양보하지 않는 다. 예술적 욕구보다는 수익적 개념이 우선하는 우리 대중문화계에서 그리고 삶의 진정성과 사실성이 깃든 연기력보다는 대중의 환호인 인기가 유일한 미덕이 되버린 상황에서도 이순재는 여전히 연기의 힘을 믿는다. 이순재는 말한다.“요즘처럼 1년 안에 뜬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다. 최소한 3~4년의 잠복기를 거쳐야 눈에 띨까 말까 했는데 그런 배우가 결국 롱런 하는 배우가 됐다. 고두심이나 김영애가 나이 들수록 연기가 나아지고 굳건해지는 이유는 그런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40대 이상 되는 연기자는 ‘3.6.8.창’이라는 가슴 설레는 단어 아닌 단어의 의미를 안다. 탤런트가 되어도 일일극이나 주말극에 비중 있는 배역은 꿈도 못 꾸고 대사 없는 행인이나 다방 손님 등을 2~3년 하다가 3.1절, 6.25전쟁, 8.15광복절, 창사기념 등 특집극에 대사가 주어지는 역을 맡을 수 있다는 데에서 ‘3.6.8.창’, 이라는 단어가 유래됐다. 드라마에 번듯한 배역을 맡아 출연하기 전까지 자신의 연기력을 연마해야했다. 대사조차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배우가 버젓이 주연까지 하는 현 상황과 너무 다르다.

‘보고 또 보고’의 종영식과 ‘상도’ 시사회 때 이순재는 식사를 하면서 물 잔을 들고 두세 차례 다른 방식으로 물을 마시며 말을 던졌다.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을 마시는 모습에서 드는 느낌 어떠냐고. 그는 손 떨림 하나, 문 닫는 동작 하나에도 철저한 계산과 개연성을 깔고 연기를 한다. 감독의 요구와 배우의 확신이 일치 할 때 가장 완벽한 연기가 나온다는 것이다.

연기에 있어 이러한 철두철미함은 요즘 그가 난생처음 출연해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거침없이 하이킥’에서도 그대로 배어난다. 야동을 몰래 보다가 가족에게 들켜 도망가는 모습과 같은 직업인 한의사 며느리에게 실력에 밀려 환자가 없을 때 질투내는 장면, 시도 때도 없이 발길질로 잃어가는 가장의 권위를 세우려는 액션은 좀처럼 이순재 연기에서 보기 힘들었던 웃음의 연기 문양들이다. 사람들은 이순재의 망가짐에서 오는 즐거움이 크다고들 말한다. 물론 젊은 시청자들은 이러한 면모만을 보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정작 연기하는 이순재는 다른 입장이다.

“웃기지만 유치하지 않기 위해 저는 대본을 들고 마지막까지 장면과 표정을 고민한다. 나의 연기에서 웃기는 장면이나 표정이 있다면 모두 다 계산된 거다. 코미디언이 아닌 연기자가 시청자들을 웃기기 위해서는 연기자는 철저하게 진지해야한다. 노인들의 어색하고 어눌한 모습이 재미있으면서도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나는 이유는 이 때문이지” 이 지점에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시트콤에서도 그의 연기에 대한 진지함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는 전 국민을 상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나 연기자를 캐스팅하지 않는다는 스타 작가 김수현 마저도 그의 작품 ‘사랑이 뭐길래’ ‘목욕탕집 남자들’ 에서부터 ‘내 사랑 누굴까’에 이르기까지 이순재를 늘 기용해왔다. 그만큼 그의 존재와 그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말이다.
그가 고등학교 어린 시절 연기와 인연을 맺은 뒤 이순재는 끊임없이 변화해 왔고 일흔둘 나이에도 변화에 도전하고 변신에 목말라하고 있다. 50여년의 길고 긴 이순재의 연기 인생에서 최장수 일일 연속극 출연(3년간 방송된 ‘보통사람들’) 최초의 일일 연속극 출연(‘눈이 내리는데’),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일일 연속극 출연( ‘보고 또 보고’),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사극 출연( ‘허준’)등 자랑스러운 기록을 가지고 있지만 그의 가치가 빛나는 것은 변신을 향한 지난한 몸짓이다.

‘사랑이 뭐길래’에서 가부장적 권위의 대발이 아버지에서, ‘허준’에서 진정한 의술을 펼치는 명의 유의태를 거쳐, 실수투성이의 ‘거침없이 하이킥’의 야동순재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변모해왔다. 하나의 이미지로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는 스타와 철저히 차별화된 지점이다.

“연기자는 항상 백지에서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을 해. 물론 고정된 이미지를 지속적으로 견지하는 연기자도 있지만 나는 백지위에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가는 작업이 바로 연기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 물론 쉽지 않는 작업이지. 하나의 작품이 대중에게 사랑을 받으면 그 작품의 캐릭터 이미지로 연기자를 보려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지. 하지만 캐릭터를 연구하고 분석하고 노력으로 다른 작품의 캐릭터로 살아나면 시청자나 관객들은 이전의 캐릭터를 잊고 새로운 캐릭터를 바라보게 돼. 그 연기라는 작업이 힘들면서도 매력적인 이유야. 그래서 50여년 할 수 있었던 거야”

그 오랫동안 연기생활을 하면서 어느 작품 아깝지 않은 것이 있으랴 마는 그에게 가장 뇌리에 남는 작품은 어떤 것일까? 늘 새로운 캐릭터를 위해 도전해 온 그에게 자못 궁금한 사하이었다. 의외의 답이 나왔다. 최고의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도, 최장수 기록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다름 아닌 1982년 KBS에서 방송한 ‘풍운’이었다. 대원군의 일대기를 그린 ‘풍운’에서 이순재는 주연을 맡았는데 “대원군의 풍류, 고뇌와 욕망, 좌절 등이 드라마틱하게 전개된 작품이다. 다시 한번 대원군역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대답에서도 그가 견지하는 연기철학을 발견할 수 있다. 삶과 인생이 녹아있는 연기야말로 진정한 연기라는 너무나 당연하지만 실천하기 너무나 힘든 원칙을 지켜내려는 몸짓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기의 장인이라는 이유만으로도 우리 대중문화계의 이순재의 존재가치는 광대하다. 그가 있어 대중문화계의 지평이 넓혀지고 있다. 하지만 이순재라는 존재의 필요감은 또 다른 측면에서도 절대적이다.

이제 연예계는 어른이 없다고들 말한다. 일부 중견 연기자들은 더 이상 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후배 연기자들에게 조언과 충고를 하지 않는다. 소위 잘 나가는 젊은 스타들은 선배들의 연륜과 땀과 노력에서 나온 연기에 대한 조언과 충고를 잔소리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조언과 충고, 비판의 결과는 심지어 캐스팅의 어려움으로까지 이어진다. 일부 젊은 스타들이 충고와 비판을 하는 중견 연기자와 작업하기를 꺼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예계와 연기자들에게 보약이 되고 우리 연예계와 대중문화의 원동력 역할을 하는 건강한 비판을 줄기차게 제기한 중견 연기자가 바로 중견 연기자 이순재이다. 그의 지속적인 조언과 충고는 우리 연기자의 병폐에 대한 대안이자 우리 대중문화를 한 단계 발전시키는 촉진제이다.

“단지 대사만 외울 줄 안다면 누구나 배우 할 수 있는 시대다. 연기자가 연기를 못하면 존재의미가 있는 것인가”“발음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연기자가 연기자라고 말할 수 있는가”“쪽대본으로 무슨 완성도 높은 드라마를 할 것인가. 사전제작제로 우리 드라마도 이제 발전의 계기를 마련해야한다”“말도 안 되는 내용으로 극본을 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작가정신이 있는지 모르겠다”“연기력은 없지만 인기가 높은 비싼 아이들을 캐스팅하면 시청률이 올라갈까 하지만 한두 번은 동화 보듯이 봐도 계속되면 시청자들에게 외면당한다”“광고에 나오지 않으면 끝나는 배우는 배우가 아니다”.....

이순재의 비판은 문제 있는 방송, 영화제작 환경에 대한 지적에서부터 일부 스타 연기자에 대한 연기력 부재, 그리고 작가 등 제작진의 잘못된 태도에 질타까지 전방위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대중문화 환경과 콘텐츠 제작환경이 급변했다 해도 이순재의 건강한 비판은 여전히 유효함을 지니고 있다. 이 또한 연기에 대한 사랑과 열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놀랍고 신기하다. 우리 또래는 대부분 은퇴했는데, 다 늦은 이 나이에 젊은이들에게 많은 관심의 대상이 된다니…. 외손녀가 친구들 청탁을 받고 할애비에게 사인을 해달라고 조르기까지 했다. 한참 잘나갈 때도 우리 아들하고 딸은 한번도 그런 부탁을 한 적이 없었는데…”이순재의 이 말을 들으며 그에게 욕심을 부려본다. 앞으로도 더 놀랍고 더 신기함을 느낄 수 있도록 더 많은 작품에서 그를 만났으면 한다는 것을.

오늘도 방송사에 가면 늘 연기에 임하는 이순재를 만날 수 있다. 일흔이 넘은 나이(72)에도 젊은 연기자 못잖은 체력과 열정으로 작품에 임하고 있는 모습을 말이다. 그가 정말 오래도록 여의도와 충무로, 대학로를 지키며 대중에게는 삶의 애환을 그리는 영원한 광대로, 그리고 연기자들에게는 연기자의 사표로 남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이순재, 그는 이 시대의 훌륭한 인생 선배이자 진정한 광대이다.

-배국남 대중문화전문기자 knbae@mydaily.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