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ㅏ

하지원, 직진하는 악바리

로드365 2007. 2. 23. 00:37






2007.02.22 / 주성철 기자

하지원은 <황진이>의 잔영이 채 가시기도 전에 불쑥 시공간을 넘어 <1번가의 기적>의 달동네 여자 복서로 돌아왔다. 영화와 드라마,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자기만의 흔들림 없는 이야기를 펼쳐가고 있는 하지원을 만난다.

하지원의 드레스라. <1번가의 기적>에서 그가 연기한 복서 ‘명란’을 떠올려보면 우아한 드레스를 차려입은 하지원의 모습이 무척 낯설다. 사실 어떤 행사장이나 시상식에서가 아니라면 하지원의 이런 모습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적어도 영화나 TV 드라마 속의 하지원은 아예 과거의 인물이거나 드레스 혹은 우아한 정장과는 전혀 거리가 먼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그렇게 하지원은 허구인 작품과 현실에서의 모습이 철저하게 분리된 배우 중 하나다.

하지만 그에 비하면 하지원은 꽤 다양한 역할들을 무리 없이 소화해냈다. 작품 속의 모습이 현실의 하지원과는 지극히 멀어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모호하지 않게 시대와 장르를 이토록 다양하게 오간 배우도 없다. <가위> <폰> 같은 전형적인 공포영화도 있었고, TV 드라마 <다모>와 이명세 감독의 <형사Duelist>(이하 <형사>)에서는 조선시대의 여형사였으며, <색즉시공>이나 <내사랑 싸가지>에서는 지극히 현재의 학생이었다. 말하자면 그 어떤 역할을 맡더라도 하지원이라는 개인성은 매번 지극히 깊고 유사하게 각인돼왔다. <1번가의 기적>에서도 마찬가지다. 어떻게 보면 그가 지금껏 맡았던 역할과 전혀 무관하게 보이지만 ‘하지원의 명란’이란 캐릭터는 너무 쉽게 접수된다. 왜 그런 걸까.

하지원은 한국 여배우들 사이에서도 ‘사람’ 이전에 ‘캐릭터’로 먼저 받아들여지는 흔치 않은 배우다. 또한 그 어떤 시대와 장르 속에서도 균일한 캐릭터를 보전하고 있다. 무엇보다 하지원은 늘 작품 속에서 자신이 뜻한 바를 거의 대부분 이루며 달려왔다. 오래전으로 거슬러가자면 <진실게임>에서는 가수 조하록의 살인을 매니저에게 뒤집어씌우면서 유유히 석방됐고, <동감>에서 소은(김하늘)을 만나고 온 지인(유지태)이 마침내 현지(하지원)를 받아들였고, <가위>에서는 자신을 자살하게 만든 친구들을 모두 죽여버렸다. <다모> <발리에서 생긴 일> <황진이>에서도 그 강한 의지는 굽힘이 없었고 <1번가의 기적>에서도 챔피언이라는 ‘기적’이 그 앞에 벌어진다. 다른 여배우로서는 선뜻 접수하기 힘든 캐릭터를, 자신의 일상처럼 흡수하면서 별다른 실패 없이 여기까지 달려왔다. 하지원은 지금의 엔터테인먼트산업에서 정말 수수께끼 같은 존재다.

▶권투 글러브를 낀 황진이



<1번가의 기적>에서 하지원이 연기한 명란은 버스보다 발이 빠르고 웬만한 남자쯤은 거뜬히 제압할 수 있는 펀치의 소유자다. 몸이 불편한 왕년의 동양챔피언 아버지(정두홍)와 동생을 돌보면서도, 아빠에게 자랑스러운 딸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코치아저씨(주현)의 도움으로 묵묵히 동양챔피언의 꿈을 향해 달려간다.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샌드백을 때리고, 배가 고프면 적당히 라면으로 끼니를 때운 뒤 강해지고 싶다는 욕심으로 남자 선수와의 스파링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렇다 하여 전적이 좋은 것도 아니다. 5전 1승 4패, 당장 현재의 동양챔피언과 시합을 주선해달라는 요구는 그야말로 객기다. 여기까지 이르면 여배우로서 예뻐 보이고 싶다는 욕구를 포기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남자 그 자체다.

사실 과거 하지원의 이미지를 떠올려보면 긴 머리로 출연한 <키다리 아저씨>나 최근의 TV 드라마 <황진이> 정도를 제외하면 자신의 여성성을 전면에 부각시킨 기억이 별로 없다. 더구나 <1번가의 기적>에서 명란과 아버지의 관계는 마치 부자관계처럼 묘사된다. 명란에게 남동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하늘을 날고 싶어 하는 아이)의 존재가 완전히 지워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권투선수가 되고 싶어 하는 자식이 왜 아들이 아니라 딸인 걸까. 게다가 둘은 영화 속의 가장 나이 어린 남매인 일동, 이순 남매와 비교해볼 때 남매로서의 대화도 전혀 없다. 그러니까 명란은 그냥 아들이다. 하지원은 남자를 연기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원이 과거 여러 작품 속에서 <1번가의 기적>처럼 마치 사내 같은 이미지로 다가왔다는 점은 그리 낯설지 않다. <다모>의 조선시대 여형사 ‘채옥’은 저잣거리에서 종종 ‘잘생긴 남자’로 오해받았고, 그 이미지의 연장이라 할 수 있는 <형사>의 여형사 ‘남순’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은 실제로 그가 작품 속에서 남성성을 드러냈다기보다는, 언제나 홀로 세상과 싸우는 그 자신의 이미지가 반영돼 빚어진 결과다. 그런 점에서 <다모>와 <형사>와 저 멀리 또 다른 TV 드라마 <발리에서 생긴 일>, 그리고 <황진이>와 <1번가의 기적>은 시대와 장르의 경계를 넘어 남성본위 사회 안에서 혹독한 세상과의 싸움을 벌이는 그의 이미지가 집약돼 있다. 본질적으로 하지원이 다른 요즘 여배우들과 사뭇 달라 보이는 것은 그 안에 현대를 살아가는 근대 신여성의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그에 대한 특별한 페미니즘적 접근이나 연구가 없었다는 사실은 일견 의아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원은 언제나 자기의 의지대로만 직진한다. <1번가의 기적>에서 아무도 그에게 권투를 강요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영화에서 ‘나이 많은 누나’로서 의례적인 묘사라 할 만한, 남동생의 공부를 도와주거나 성공을 위해 학업을 장려하는 듯한 장면이 없다. 그냥 자신의 의지에 따라 권투하는 하지원의 모습만 있다. ‘내가 동양챔피언이 되면 아버지가 좋아할 것’이란 마음은 사실 혼자 생각이다. K-1과 프라이드가 격투기시장과 미디어를 점령한 마당에 그것은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명란에게 그것은 스스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꿈이다. 또한 작품 속에서 하지원을 빼면 그저 비루한 남자들의 세계가 펼쳐진다. <1번가의 기적>에서 순박한 아이들과 명란을 빼면 탐욕에 불타는 꼬맹이 남자들과 쓰레기 같은 조폭들만 가득하다. <다모>에서도 우포청의 상관 앞에 ‘무릎 꿇고 빌지 못하겠다’는 좌포청 소속 채옥의 말에, 우포청과 좌포청 남자들의 일대 싸움이 벌어진다. ‘여자에게 무시를 당했다’는 생각에 그들은 한없이 추레한 본색과 어쭙잖은 권위만 내세운다. 그 속에서 하지원은 늘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는다. 아마도 당대의 가장 강한 여성 캐릭터가 바로 그일 것이다.



왜 매번 그렇게 힘든 역할들을 맡는 건가요? 늘 크랭크인 전에 어떤 ‘훈련’을 해야 하는 영화나 TV 드라마가 대부분이잖아요.
사실 <1번가의 기적>은 TV 드라마 <황진이> 들어가기 전에 촬영한 영화라 복싱을 연습할 시간 자체는 많았어요. 저는 늘 매번 새로운 걸 배우는 걸 좋아해요. ‘액션을 잘하는 여배우’라는 얘기는 전에 많이 들었고 이번에는 ‘그럼 복싱에 한번 도전해볼까’하는 생각이 있었죠. 물론 워낙 힘들긴 하지만 ‘배우는 재미’가 그보다 더 커요. 그리고 운동도 다소 격한 운동을 좋아하죠.

에어로빅, 고전무용, 복싱 등 매번 바쁜 와중에 짬을 내야 가능한 일인데 어떤 게 가장 배우는 만족감이 컸나요?
에어로빅, 고전무용 같은 구분을 떠나서 배우들에게는 늘 춤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요. 근데 사실 나 같은 경우는 잘 노는 체질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작품 속에서가 아니면 사실 춤출 일이 없어요.(웃음) 그러니까 ‘그런’ 영화를 할 때가 아니면 ‘그런’ 춤을 배울 기회가 없는 것이기도 하죠. 전에는 배우란 얼굴로만 연기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오히려 몸과 행위로 하는 부분도 그에 못지않은 것 같아요. <형사>를 하면서 그런 걸 더 크게 느꼈는데, 춤을 배우면 단지 관련된 장면에서 사용된다는 것 외에도, 다른 연기나 사소한 걸음걸이, 혹은 그 캐릭터만의 특징을 만들어내는 데도 큰 도움이 돼요. 그래서 시간이 되면 춤은 작품과 관계없이 이것저것 다 배워보고 싶어요.

실제로 촬영하다가 너무 세게 맞아서 참고 연기했다는 얘기도 있던데요. 당신 정도의 위치라면 굳이 촬영을 강행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말이죠.
아니에요, 그러면 안 돼요. <형사> 때 저는 쌍칼이었고 안성기 선배님은 봉을 무기로 쓰셨거든요. 서울 액션스쿨 위에 연습실을 따로 만들었는데, 저랑 동원이가 오기 전이었나? 하여간 연습실에서 소리가 나기에 가봤더니, 아무도 없는 연습실에서 안성기 선배님이 혼자 열심히 봉을 돌리고 계시더라구요. 그런 류의 훈련이나 연기에서 배우 스스로 ‘이 정도면 됐다’ 그런 건 없는 것 같아요. 그건 감독님이나 다른 선배님들이 판단할 문제 같아요. 그리고 사실 제가 데뷔한 지는 꽤 오래됐지만 아직도 내가 누군가의 선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요.

당신처럼 사극과 현대물 모두를 점령한 배우는 드문 것 같아요. 그 양쪽을 자유로이 오가는 데서 오는 혼란은 없나요?
사실 전 사극에 안 어울리는 얼굴이잖아요. <황진이>를 찍을 때도 많이 느꼈는데, 내가 봐도 분장을 지우고 거울을 보고 있으면 정말 사극 분위기는 아닌 것 같아요. 그런데 이상하게 분장을 하고 앞가르마를 타고 나면 또 어울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웃음) 그래서 그런 이미지는 내가 판단하기보다 시청자나 관객들이 느끼는 만족도에 따라야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사극과 현대물의 차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죠. 난 물론 이야기도 중요하지만 의상이나 공간에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에요. 그런 점에서 사극과 현대물은 큰 차이가 있죠. ‘이 의상을 소화해야 한다’ 그리고 ‘내가 연기할 곳은 바로 이 공간이다’라고 생각하고 빨리 환경을 흡수해야 돼요.

<황진이>가 성장해가는 과정이 배우 하지원이 성장해온 모습과 겹친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그렇다고 생각해야 하는 측면도 있죠. 저는 지금껏 영화보다는 TV 드라마에서 하고 싶은 것을 거의 다 한 편이에요. 매주 시청자와 교감하게 되니까 그 만족감도 더 컸구요. 이상하게 여자 팬들이 더 많았던 것 같아요. 만약 돈 많고 예쁘고 남자들이 다 나를 좋아하고 그러면 좋겠지만 사실 그런 거 왕재수잖아요.(웃음) 더구나 여자 시청자나 관객들의 취향이 매년 바뀌어가는 거 같은데, 매번 공유할 수 있는 캐릭터를 해나가고 있는 건 즐거운 일이죠. 그런 점에서 황진이 캐릭터는 나와의 관계를 떠나서, 지금 시청자들이 원했던 캐릭터 같아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캐릭터가 잘났다고 나서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잖아요. 내가 그 캐릭터를 잘 연기할 수 있느냐도 중요하지만, 그 캐릭터가 모두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캐릭터인가를 고민하는 것도 중요해요. 내가 잘 한다 해도 공감을 얻지 못하는 캐릭터도 있을 수 있잖아요.

TV 드라마 <학교 2>로 데뷔했을 때만 해도 불량학생이었죠. 어쩌면 지금껏 연기한 모습들 중 가장 달랐고요.
그땐 주인공이 아니라 사이드였어요. 말 그대로 ‘날라리’였죠. 아직도 잊히지 않는데 교실 맨 뒤 구석에 앉아 있었어요. 데뷔한 작품이기도 하지만 PD님이 “평범해 보여서 눈에 띌 것 같지 않은데, 모아놓으면 거기 눈에 띈다”고 하셔서 자신감을 많이 얻은 작품이기도 하죠. 후반으로 갈수록 비중을 늘려주시더라고요. 재밌는 게 그때 반장, 부반장 하던 친구들이 이후 활동을 별로 못 했고 나나 김래원, 이요원, 김민희처럼 주로 ‘불량’한 애들이 지금 다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어요.(웃음)

▶내 현실의 언어만 대사가 된다



우리는 아직 한 작품 속에서 하지원이 다른 여자와 함께 파트너를 이루는 모습을 본 기억이 없다. 언제나 혼자 힘으로 세상과 싸우거나, 늘 상대 남자 캐릭터가 존재했다. 그래서 하지원이 이요원, 김민선, 이영진, 조은지와 함께 <아프리카>에, 장진영, 엄정화와 함께 <싱글즈>에, 김혜수, 윤진서와 함께 <바람피기 좋은날>에 출연한 모습을 쉽게 상상하기 힘들다. 그는 늘 페미니스트였지만 반면 늘 혼자였다. 종종 남자 캐릭터의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다모>나 <황진이>나 <1번가의 기적>이나 모두 혼자 땅을 딛고 서겠다는 의지를 지닌 여성이었고, (그의 말을 빌리면) 매번 작품 하나씩 할 때마다 배운 기술들은 그 의지의 무기였다. 강해 보이면서도 약해 보이고, 또한 슬픈 가운데에도 절대적인 절망의 나락으로는 결코 떨어지지 않는 캐릭터였다.

그것은 그가 늘 혼자였다는 사실과 더불어 언제나 하층민을 연기할 때 더 큰 설득력을 지녔다는 사실과도 맞닿아 있다. 다모는 천민으로 관노 혹은 외거 노비와 다름없는 신분적 한계를 가진 사람이고, 여자라는 한계까지 더해지면 옴짝달싹할 수 없는 울타리 속에 갇혀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황진이 역시 절집에 기거하는 아이라 교방에 보낼 수 없다는 스님의 말에, 송도교방의 행수어른(김영애)은 “기녀나 승려나 천출이긴 매한가지”라고 말한다. <발리에서 생긴 일>의 ‘수정’도 마찬가지다. <1번가의 기적>의 명란처럼 없는 살림에 양아치 오빠를 대신해 혼자서 살림을 거의 꾸려나가다시피 한다. 여기서는 명란처럼 뚜렷한 꿈도 목표도 없다. 혼자 힘으로 대학에도 들어갔지만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나름 예쁘고 똑똑하다고 생각해 연예계로 진출해볼까 하는 생각도 가져보지만 주변에는 사기꾼들만 얼쩡거린다. 지금껏 하지원이 연기한 캐릭터들 중 가장 극단적 세속성과 통속성으로 중무장한 모습이 수정 안에 있었다. 그래서 영화나 TV 드라마 속의 하지원은 별로 웃을 일이 없다. 다른 여자 캐릭터들과 한가로이 즐겁게 잡담이나 할 시간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그 모든 작품들은 결국 잃어버린 웃음을 되찾아가는 과정이다.

하지원은 과거 사회규범으로부터 엔터테인먼트가 철저히 분리된 시대의 스타와는 거리가 멀다. 한국영화나 TV 드라마 세계 안에서는 무척이나 희귀한 캐릭터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어느 배우나 탤런트보다 쉽게 그 어딘가에서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모습이다. 그래서 하지원은 스타의 신화라는 것이 사실은 범접할 수 없는 절대미가 아니라 어쩌면 철저히 현실에서부터 자라난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배우다. 그가 처한 상황과 위기, 쉽게 이루지 못할 꿈에 대한 맹목적 의지는 결국 우리들의 희망사항과 그리 멀지 않다. 하지원이라는 배우가 지금껏 보여준 것은 결국,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원대한 목표는 말할 것도 없고 인정하기 싫지만 사실은 소박한 꿈조차 이루기 힘든 실제 현실에 대한 반증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는 가장 현실에 가까운 구어체를 쓰는 배우다. <황진이>에서 기녀의 춤을 따라했다는 이유로 스님에게 야단을 맞는 와중에도, 황진이는 “곱고 맑은 걸 보고 좋아하는 건 당연한 거 아니에요? 부처님도 스님도 보셨으면 좋아했을 거예요”라고 말한다(물론 이 장면은 다른 아역이 연기하긴 했다). 그 앞에서 종교나 신분의 경계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그의 머릿속에는 ‘아름다운 춤사위’라는 것만 입력돼 있다. 아마도 하지원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매력적인 것은 그것이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지극히 굵고 간결한 1차원적인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그에게서 이야기를 제 맘대로 끌고 가려는 반전이나 또 다른 화술의 욕심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의지는 넘치되 이야기의 핵심은 결코 건드리지 않는다. 아마도 많은 영화인들이 앞 다퉈 얘기하는 ‘하지원의 성실함’은 바로 그러한 미덕일 것이다. 1차원의 구어체를 구사하는 배우라는 미덕, 어쩌면 그것이 그가 가장 큰 사랑을 받는 이유일 것이다.



<1번가의 기적>에서와 같은 어린 시절을 보낸 경험이 있나요?
저 역시 썩 넉넉한 집에서 자란 것은 아니라, 굳이 그렇게 달동네에 사는 처지는 아니었지만 충분히 공감 가는 요소들이 있었어요. 사실 그건 꼭 그렇게 살아서가 아니라, 한국에서 살면서 쉽게 접하고 이해할 수 있는 모습이라 생각해요. 영화 준비하면서 고급 피트니스센터에 가서 복싱을 배우라고 하더라고요. 근데 그건 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처음부터 김주희라고 실제 여자 복서가 있는데 그분 체육관에서 배우고 싶다고 했어요. 윤제균 감독님도 영화 구상하면서 그분을 모델로 삼은 점도 있고, 실제로 거기도 굉장히 허름하거든요. 한 40년 정도 된 체육관인데 함께 운동하고 땀흘리다보면 자연스레 명란이 돼요. 머릿속에는 그저 복싱과 아빠밖에 없게 되죠.

복서들은 왠지 링 밖에서도 링 위의 버릇들을 가지고 있을 것 같은데요.
그래서 영화 속에서도 어깨를 좀 움츠리고 다녔어요. 사실 전 평소에 배를 내밀고 등을 젖히고 다니는 스타일인데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웃음) 그런데 실제로 운동을 많이 하니까 남자들처럼 등 근육이 나오면서 움츠리게 되더라구요. 매번 느끼지만 영화 준비하면서 무언가를 배우고 적응하다 보면 쉽게 그 캐릭터에 젖어들어요. 영화에서처럼 실제 셔츠만 입고 있으니까 진짜 남자 같더라구요.

영화가 말하는 ‘기적’이란 뭘까요?
명란은 아버지를 이어 권투를 하고 있지만, 사실 그렇게 재능이 뛰어난 애는 아닌 것 같아요. 이겨본 적도 없고 단지 가진 거라곤 맷집뿐인데 동양챔피언과 시합을 갖는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죠. 그리고 그 기적이란 게 마을 사람들마다 다 달라요. 어린 남매는 할아버지 암을 고쳐주려고 토마토를 방법도 모르고 길렀는데 결국 엄마도 찾고 토마토도 많이 얻게 되고, 선주도 결국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도 했고.



자연인 하지원으로서 일체의 스캔들이나 괴소문을 접한 기억이 별로 없어요.
철저하게 관리하죠.(웃음) 사실 내가 생각해도 바른생활만 하는 사람이에요. 일 없으면 집에만 있고, 아니면 운동하거나 친구들 만나 영화 보고 그런데 다들 여자 친구밖에 없으니까 그런 스캔들과는 거리가 먼 것 같아요. 그런 비슷한 만남이라도 있어야 스캔들이 날 텐데, 전혀 그런 게 없죠.

많은 영화인들이 당신에 대해 ‘한결같은 성실함’을 꼭 얘기하더군요.
모르겠어요. 난 그냥 하는 거라 생각하는데 다들 열심히 한다고 그러긴 해요.(웃음) 성격 탓인지 전 그냥 뭐 하나 시작하면 끝장 보려는 건 있어요. 꾀부리는 건 체질적으로 잘 안 되고. 와이어로 착지할 때의 성취감 같은 건 정말 뿌듯하고. 그래서 특별히 위험한 게 아니라면 직접 내가 스턴트 같은 것도 해야 직성이 풀리고. 그런 점에서 사실 복싱이 가장 힘들었어요. 가짜 액션처럼 보여도 진짜 때리고 맞는 순간들이 있거든요. 김주희 선수도 경기할 때마다 산모의 고통을 느낀대요. 저 역시 촬영 끝나고 한 10일 동안은 이가 아파서 딱딱한 것도 못 씹었어요.

그렇게 자신이 한 것에 대한 애착이 크면, 시사회 때 참석해 ‘내 영화를 내가 어떻게 봐’ 하는 다른 동료들을 이해하지 못하겠어요.
그런 사람도 있나요?(웃음) 가령 전 그런 건 있죠. 작품 평가를 떠나서 <내사랑 싸가지>는 참 다시 못 볼 것 같아요. 내가 왜 저렇게 교복을 입고 오버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물론 당시는 사람들이 웃기다 그러면 더 웃기려고 했고, 노력도 참 많이 했는데 너무 오버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그런 역할보다는 오히려 사극이 더 편하죠. 그런데 전 정말 영화로 내 모습을 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고, 다른 영화를 보더라도 놀라운 걸 해낸 사람들을 보면 감탄하게 돼요. 액션영화는 극장 가서 많이 보는데, <옹박> 같은 영화는 정말 놀라워서 소리 지르고 봐요. 제가 약간 남자 같은 면이 있나 봐요.

역시 뭔가 시작하면 끝장 보는 성격이라고 했는데, 그런 성격이다 보니 출연한 영화나 드라마가 잘 안되면 상심이 더 크지 않나요?
다음에 더 잘하면 되죠. 내가 만족해도 시청자나 관객들이 만족하지 못하면 소용없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그래도 선택을 후회한 적은 없고, 뭔가 교감이 없었다면 왜 그랬을까 고민하게 되죠.

늘 상대 남자배우들이 있거나 혼자 헤쳐 나가는 작품들을 했는데 <바람피기 좋은날>이나 <싱글즈> 같은 영화에서 당신을 볼 수 있는 기회는 없을까요?
좋죠. 그런데 생각은 안 해봤어요. 그런 영화를 보면서 사실 친구들과 실제로 그런 영화 같은 농담이나 이야기를 주고받은 기억이 별로 없어요. 내가 만나는 친구들이 좀 달라서 그런지 ‘진짜 여자들끼리 만나면 저런 이야기를 하나?’ 그랬었거든요. 그래서 그런 영화들에 출연하면 아직은 제가 그냥 연기를 한다는 느낌이 올 것 같아요. 뭐랄까, 제 현실의 언어 같은 느낌이 안 든다고나 할까? 좀 더 나이가 들면 소화할 수 있겠죠. 아직 유부녀 역할을 못 해본 것과 비슷한 거 같아요.

<황진이>의 무게감 때문에 혹시 쉬고 싶은 마음은 없나요?
아직 영화든 드라마든 차기작을 정하지 못했는데 별로 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일단 힘든 만큼 만족감이 컸던 작품이라 더 의욕이 생기기도 하고요. 그래서 또 새로운 코치님을 만나 무언가를 새로 배워야하는 건 아닌가, 늘 습관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긴 해요.(웃음) 이번에도 그렇지 않을까요?

-필름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