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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집, 논쟁의 중심에 서다

로드365 2007. 3. 2. 00:44






민주세력 신자유주의 편승이 ‘서민 절망’ 불렀다
입력: 2007년 02월 28일 18:30:33
 
〈최장집/ 고려대 교수〉

◇ ‘민주화 20년의 열망과 절망’출간에 부쳐

-한국 민주주의의 사회적 모습에 대한 르포르타주-

세 가지 점에서 이 책은 특별하다. 첫째는 민주화 20년의 명암을 민주주의의 향유자가 되어야 할 보통사람들의 관점에서 구체화해 냈다는 점이다. 둘째는 진보 혹은 민주주의에 대한 진보적 해석의 문제를 대규모 사회적 이슈로 만든 시발점이 되었다는 데 있다. 셋째는 학자나 전문 연구기관이 아닌 저널리즘과 일선 기자들이 이루어낸 성과라는 사실이다. 한국 민주주의의 사회적 모습에 대해 기록의 현실감과 구체성을 특징으로 하는 르포르타주의 한 전형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덕분에 우리는 우리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증언을 생생하게 들여다보게 되었다.

이 책의 중심내용은 민주화 이후 민주정부들이 보통사람들의 사회경제적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과 그로 인해 민주주의에 대한 절망이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과거 민주화 운동권으로부터 충원된 민주정부의 리더십은 왜 민주개혁에 실패했나 하는 문제를 집중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들은 구권위주의 시기에 형성된 지배적인 헤게모니에 대응하는 어떤 대안적인 비전이나 이념을 갖지 못했고,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전문적이고 구체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했으며, 실제 정책을 만들고 집행하는 거대한 국가관료 기구를 민주적으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없었다. 그 결과 민주정부의 리더십은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재빨리 성장지상주의의 헤게모니에 통합됨으로써 그들이 언표화했던 공식적인 담론과 그들이 실제 추진한 정책 사이에 극명한 차이를 드러냈다. 정부에 참여한 과거 민주화운동 세력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적 가치를 공유하게 되고 성장지상주의정책의 헤게모니에 통합되면서 보수화하고 권력화되었는가 하는 과정은 이 책에서 가장 실감나게 서술된 부분이기도 하다.

-두 개의 민주주의-

오늘의 민주주의가 직면한 상황에 대한 이 책의 관점은 다음 문장으로 잘 집약된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나’ 라는 문제에 답하지 못하는 한, 한국의 미래, 진보의 살 길은 없다(13쪽).” 민주주의의 사회경제적 내용을 발전시키는 문제가 더 이상 회피되거나 방치되어서는 안 되는 절박한 상황에 왔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대통령을 직접 뽑고 정부를 절차에 따라 운영하는 차원에서 한국 민주주의 발전이 머문다면, 보통사람들의 삶은 계속해서 더 나빠질 수밖에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정치의 영역뿐 아니라 시장과 경제의 영역에서도 다수 민중의 삶을 위한 민주주의의 가치가 확장되어야 한다는 강한 필요를 이 책보다 더 생생하고 사실적으로 보여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두 개의 민주주의 사이의 대립을 보다 분명하게 목격하게 되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이해방법은 이 책에서 개진되고 있는 민주주의관과 대립한다. 지배적인 이해방법이란, 민주주의는 정치의 영역에 한정된 원리일 뿐 경제는 시장과 성장의 원리에 따라 운영되어야 한다는 논리로 집약된다. 정치개혁 하고 부패 안하고 원칙 지키며 권력 행사는 덜 하지만, 기업의 투자의욕을 위해 법인세 인하하고 노동시장을 더 유연하게 하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야 한다는 태도는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다.

-보수적 민주주의 혹은 신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이러한 민주주의관은 정치의 영역에서도 큰 문제를 낳고 있다. 한편으로 그것은 투명성과 효율성, 생산성과 같은 신자유주의적 원리가 정치의 영역을 압도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다른 한편 대중정치나 대중참여, 선거경쟁을 소모적 낭비로 간주하는 주장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그 결과 정치개혁이 회계학의 손익계산 원리에 따라 이루어짐으로써 돈 쓰는 정치만 없앤 것이 아니라 정치와 대중의 결합 역시 해체해 버렸다. 선거를 하나 줄이면 예산이 얼마얼마 절약된다는 논리가 개헌을 정당화하는 데 자유롭게 동원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민주주의를, 공동체의 통합이라는 더 큰 가치를 위해 기꺼이 지불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으로 이해하는 관점은 지속적으로 약화되었다.

신자유주의와 접맥된 민주주의가 권력과 정치, 정당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동반하게 된 것 역시 필연적이다. 민주주의란 반(反)정치, 반(反)권력, 반(反)정당을 내용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정치와 권력, 정당을 선용해서 사회구성원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핵심으로 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그 반대로 나타났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든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 정치의 역할로 선언되었고, 가난한 서민의 이해에 기반을 둔 정치세력은 언제나 극소수에 불과했다. 정치의 기본 방향이 재벌 경제연구소의 정책 보고서에 따라 결정되는 일도 많았다.

서구에서 기민당정부, 사민당정부, 공화당정부라고 하듯 정부의 책임성을 실현하는 정당정부의 원리가 한국정치에서는 부정시되고 당정분리가 오히려 당연시된 것도 문제였다. 정부는 곧 대통령 개인이었을 뿐 정당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노무현정부라고 하는 사람은 많아도 열린우리당정부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시민의 직접선거에 의해 정당체제가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의 대연정 결단에 의해 자의적 변경이 가능한 것으로 간주되는 한 정당이 갖는 역할과 기능은 발전하기 어렵다. 지구당이 폐지되고 원내정당화와 오픈 프라이머리라고 불리는 개방형 경선제가 개혁적이라 평가되는 등, 정당의 대중적-사회적 기반을 없애는 것이 민주주의인 양 착각하게 된 것은 모두 이런 조건에서 가능했다.

요컨대 자본주의 하에서 사회경제적 갈등을 정치적으로 조직하고 대표하는 ‘강한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 한 가난한 다수가 보호될 수 없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를 강조하는 것이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는 소수 의견이 되어 버렸다.

-한국 보수주의의 두 번째 기원-

한국 보수주의의 기원은 분단과 전쟁을 거치면서 강력하게 동원된 냉전반공주의에서 찾을 수 있다. 한민당과 같이 이승만 체제와 대립했던 야당 역시 냉전반공주의의 헤게모니 하에 통합되어 있었다. 권위주의 산업화로 구현된 재벌중심의 성장주의는 냉전반공주의에 물질적 기초를 제공했다. 다수의 민중은 정치참여에 있어서나 경제성장의 성과를 분배하는 데 있어서 소외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민주화는 이중의 과제를 안게 되었다.

하나는 권위주의로부터의 민주화였다. 이는 ‘운동의 힘’과 광범한 대중의 참여를 통해 이루어졌고, 세계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다른 하나는 서민층과 노동자를 포함해 성장의 혜택을 받지 못한 다수를 통합하는 경제체제를 만드는 일이다. 한국사회의 공동체적 유대와 시민적 문화는 이러한 정치경제적 기초 위에서만 발양하고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차원에서의 민주화는 거의 진전된 것이 없다.

민주정부의 집권으로 절차적 차원의 민주화가 공고화되었지만 동시에 신자유주의적 성장주의는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경향은 김대중정부와 노무현정부를 거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그 결과 한 사회의 중심적 생산자 집단으로서 노동의 참여가 배제된 생산체제는 지속되었다. 이들 민주정부는 대북문제나 대미관계에서 냉전반공적 보수세력과 갈등하고 대립했지만, 적어도 경제를 운영하는 방법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사회를 신자유주의적으로 재편하는 과정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신자유주의 개혁파라 부를 만한 새로운 보수주의의 역사적 기원은 이렇게 만들어졌다. 한국 보수주의의 두 번째 기원이라 부를 만한 변화가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의 발전을 위한 진보의 과제-

민주주의란 기본적으로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만들어내는 사회의 여러 갈등과 균열, 이익의 다기화를 정치의 방법을 통해 해결해 가는 것을 의미한다. 정치적 수준에서의 민주주의가 경제와 분리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반대로 경제 역시 정치로부터 자율적으로 움직이는 실체도 아니다. 현실에서의 민주주의는 정치와 시장경제가 상호결합하면서 발생하는 효과까지를 포괄해서 다루어야 한다. 민주주의를 이렇게 이해할 때, 경제성장의 가치와 목표가 어떻게 사회정의, 보편적인 시민권, 노동과 사회복지의 가치 등과 병행할 수 있는지를 따질 수 있게 된다.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경쟁하는 세력들 간의 공존을 전제로 한다. 정치학자 쉐보르스키는 민주주의를 ‘오늘의 야당이 내일의 여당이 되고 오늘의 여당이 내일의 야당이 될 수 있는 체제’라고 간명하게 정의한다. 민주주의 체제에 참여하여 민중적이고 서민적인 이익과 열정을 진작하고 실현하려는 세력을 진보라 부른다면, 이들 진보세력은 정치경쟁에서 더 많은 유권자에게 호소하고 더 넓은 지지를 조직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진보는 정치적 대안이자 실체를 갖는 집합적 힘으로 만들어질 수 있어야 하고, 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가난한 서민의 삶이 개선될 수 있도록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책은 우리사회의 진보가 제도화된 민주주의의 영역에서뿐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삶의 세계에서도 기능하는 실질적 주체가 되기를 강력하게 요구하고 있다.


최장집 “대통령 비판 허용안되면 민주주의 아니다”
[불붙은 진보논쟁] “한나라 집권할 수 있다는 말 했을 뿐”
”집권해도 좋다는 해석은 왜곡된 전달”


최장집 고려대 교수(정치외교학)는 21일 노무현 대통령이 ‘대한민국 진보, 달라져야 한다’란 글에서 자신을 비판한 데 대해 “비판을 하면 비판 대상의 이름이 명시돼야 하는데 이름도 명시하지 않고 비판한 것은 온당치 못하다. 대통령이 직접 얘기하는 것이니까 실명으로 비판하시라”고 밝혔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글에서 “참여정부를 매도하는 데 앞장서고 있는 분”이라고 한 교수를 지칭했으며,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 교수가 최장집 교수라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았다.

최 교수는 이날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소장실에서 <한겨레> 기자와 만나 노 대통령 글에 대한 생각을 밝혔다.

“대통령과 학자, 동등한 토론 힘들어”
“이름도 명시않고 비판 온당치 못해”

-노 대통령이 최 교수를 지칭해서 비판하는 글을 <청와대 브리핑>에 올렸는데, 읽어보니 어떤 생각이 드나?

=그 문제는 내가 정부를 비판한 것에 대한 비판의 성격을 가지는데, 비판을 한다면 비판 대상의 이름이 명시되어야 하는데 이름도 없이 막 얘기를 한 것 자체가 온당치 않다는 생각이다. 비판이라면 대상이 누구인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얘기해야 하는데 비공식적으로 대상을 알도록 흘리는 게 잘못이라는 거다. 이게 좋지 않다는 얘기다.

-비판의 정도에서 벗어났다는 말인가?

=실명으로 비판해야 한다. 대통령이 직접 얘기하는 것이니까.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학자의 글을 비판하는 것이 학문적인 측면에서 논쟁을 심화시키는 데 도움이 될까?

=전혀 도움이 안 된다고 본다. 이것을 논쟁이라고 본다면, 나는 학교에서 정치학자고 대통령은 나와 같은 위치에 있지 않다. 개인의 비판과 동등한 수준에서 비판하는 게 아니란 말이다. 학자는 학자의 말대로 얘기하고 비판하는 것인데,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게 유지가 안 되면 민주주의가 아니다. 대통령은 정치하고 통치하는 사람이고 통치의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지는 거다. 같은 지평이나 동등한 구조에서 토론을 하기는 힘들고 여기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는 힘들다고 본다.

-대통령이 논쟁에 뛰어드는 것 자체가 옳지 않다는 뜻인가?

=대통령은 최고 통치자이고 학자나 자연인 노무현이 아니다. 대통령은 공직을 수행하고 통치를 해야 되는데 한 사람의 학자가 비판했다고 해서 대통령이 비판을 하면 그것은 같은 지평에서 일어난다고 보기 어렵다. 통치자가 한 사람의 개인을 비판하는 것을 (학자가 정권을 비판하는 것과)같은 수준에서 이뤄지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

-노 대통령은 자신을 ‘유연한 진보’라고 하면서 최 교수를 포함해 진보가 달라져야 한다고 말한다.

=나는 대통령과 논쟁을 하고 싶지 않다. 대응이라는 의미에서 얘기하고 싶지 않다. 단지 사실이 아니거나 오해가 있거나 내가 이야기한 것을 잘못 비판한다거나 할 때 바로잡거나 그런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새로 이슈를 확대해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이미 책과 글을 통해서 충분히 얘기했다.

-일부 보수 언론에서는 최 교수의 견해를 마치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괜찮다’는 쪽으로 초점을 맞춰 보도하고 있다.

=그런 견해와 해석이야말로 논쟁의 과정에서 왜곡되고 잘못 전달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내가 얘기한 것은 한나라당이 집권할 수 있다는 객관적인 얘기이지 한나라당이 집권해도 좋다, 바람직하다, 이런 것은 원래 내가 얘기한 것과 먼 내용이다. 내가 원래 얘기했던 본래 의미와는 아주 다른 논쟁이 되어버렸다. 정치적으로 다른 뜻으로 의미가 소비되고 있다. 나는 객관적인 상황만을 얘기한 것이다.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그것은 가능해야 한다. 민주주의에서는 당이 표를 많이 얻으면 집권하는 것이다. 한 세력이 계속 집권하고 계속 패배한다, 이것은 민주주의에 합당하지 않다. 민주주의 가치와 관점에서 얘기한 것이고 현재 정부가 많이 실패했기 때문에 한나라당이 집권할 수 있다고 말한 거다. 객관적인 사실만을 말한 거지 가치 판단을 한 것이 아니다. 내가 말한 진위로부터 굉장히 벗어나 있다.

-최 교수를 직접 지칭하진 않았지만, 노 대통령은 대선 전에 어느 모임에서 최 교수를 만났는데 최 교수가 ‘(노 대통령은) 비주류라서 대통령이 되기 어려울 것’이란 취지로 말했다고 적고 있다. 그 모임은 어떤 모임이었나?

=어떤 모임에서 한번 만났는데, 당신은 비주류니까 당선되기 힘들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불명확한 게 끼어들어서 논쟁에 의한 대화가 아니라 감정과 정서에 의한 대화가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노 대통령을 두세 번 정도 만났다. 대통령선거 임박해서는 2001년 겨울인가 한번 만났다. 경선 나갈 때 잘 해보시오 하는 격려의 차원이었다. 자주 만나지 않는 정치인을 만나서 비판하는 것도 우습다. 아무튼 그날의 모임에 관해 노 대통령이 말한 것은 사실이 아니다. 사실이 아닌 것을 가지고 비판하는 것이다.

-공식적으로 최 교수의 생각을 다시 한번 밝히는 게 논쟁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나는 그럴 필요가 없다고 본다. 이미 글로써, 또 말할 기회가 있을 때, 논문을 통해서 충분히 얘기했다고 생각한다. 나에게 대안이 없다고 노 대통령이 그러는데 내 글을 제대로 읽어보지 읺고 얘기하는 것에 되풀이해서 대답하고 싶지 않다. 나는 현실정치에 대해 계속 얘기를 할 것이다. 하지만 학자로서 글을 통해서 할 것이다. 대통령은 통치하면 되는 것이고 나는 내 역할을 하는 것이다.

대통령이 내가 비판하는 것에 반응하는데, 비판은 허용되어야 한다. 민주사회에서는 어쨌든 국민이 주권자이고 주권을 위임한 것이다. 국민이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한다. 가장 중요한 민주주의의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허용하지 않는 듯한 방식으로 대통령이 나서서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본다. 거기(청와대)도 학자들을 동원해서 (논쟁) 하는 거 아니냐. 그건 바람직하지 않다. 전진식 기자 seek16@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