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ㅏ

하얀 거탑

로드365 2007. 1. 21. 19:32
볼만하다.



웰메이드 드라마의 첫 키스

실제 병원과 흡사한 세트 제작에만 15억원 들인 주말 드라마 <하얀 거탑>…이정길·김창완·김명민 등의 연기력까지 더해져 기본에 충실한 ‘작품’ 될까

▣ 강명석 <매거진t> 기획위원

자, ‘세대공감 올드 앤 뉴’. 혹시 ‘안드로메다 가다’라는 말을 아는가. 이 말은 인터넷상의 드라마 팬들이 드라마가 갑자기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사용한다. 바로 전회까지 착하던 남자가 악역으로 변신해 분란을 일으키는 스토리 같은 것 말이다. 잘나가던 드라마가 갑자기 이상한 곳으로 날아갔으니 ‘안드로메다’ 갔다고 할 수밖에. 그리고 이 말은 한국 드라마 제작의 문제를 압축한 것이기도 하다.


△ <하얀 거탑>은 드라마로는 드물게 멜로를 배제하고, 의사들의 암투와 경쟁에 포커스를 맞춘다. 선도, 악도 명확하지 않은 심리드라마이다.

사전제작제 없이 대본과 촬영이 방영시간 전까지 ‘실시간’으로 이뤄지니 제작진의 집중력은 떨어지고, 시청률이 높지 않은 드라마는 대중성에 대한 압박에 시달려 종종 이상한 방향을 선택한다. 심지어 드라마 방영 30분 전 최종 편집본을 넘겼다는 이야기도 심심찮게 들린다. 그래서, 불과 2회 방영된 문화방송 주말 드라마 <하얀 거탑>에 대해 확언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멜로 대신 외과 정교수 자리를 둘러싼 의사들의 권력 암투를 다뤘다는 신선함도 어찌 변할지 모르고, 좁은 부원장실에서마저 외과과장 이주완(이정길)의 동선을 따라 현란하게 움직이며 단 한순간도 느슨함을 허용하지 않는 멋진 연출도 어떻게 될지 모른다.

병원같은 세트 속 의사같은 배우들

그러나 안드로메다로 가든 명왕성으로 가든 절대로 변하지 않을 두 가지. 하나. 작품을 위해 15억원을 들여 실제 병원에 가깝게 만든 세트. 몰래 집도한 수술 때문에 장준혁(김명민)이 자신의 인사권을 쥔 병원 부원장 우용길(김창완)과 껄끄러워지자 장준혁은 병원 통로 입구 건너편에서 오는 우용길을 미리 발견한 뒤 모른 척 우용길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때 미로처럼 복잡하게 여러 갈래로 이어진 병원 세트는 등장인물의 동선을 더욱 잘 살려준다. 실제 병원도, 그렇다고 방송사 스튜디오 세트도 아닌, ‘실제 병원 같은’ 세트가 작품이 요구하는 바를 더 정확하게 보여준다. 그리고 두 번째. 연기. 아무리 집중력이 떨어져도 좋은 배우의 연기력이 국어책 읽는 수준으로 변하진 않는다. 우용길이 장준혁의 장래 문제를 가지고 압박할 때, 우용길을 연기하는 김창완은 전형적인 악역처럼 비열한 표정이나 험악한 목소리로 김명민을 압박하지 않는다. 그는 평상시와 큰 차이 없는 톤을 유지하면서 그 안에서 미묘한 변화를 통해 자신의 분노를 분명히 보여준다. 김창완 앞에서 무릎을 꿇는 김명민 역시 목소리는 다급해도 김창완 앞에서 과장되고 비굴한 읍소를 하지는 않는다. <하얀 거탑>의 배우들은 웃지는 않지만 기뻐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고, 울지 않아도 슬프다는 것이 전해진다. 이는 뒤로 온갖 권모술수를 펼치면서 앞에서는 의사의 품위를 지키는, 냉정하고 생각 많은 그들의 위치를 잘 드러낸다. 세트와 연기, 혹은 건물과 사람의 결합은 절대 흔들리지 않을 <하얀 거탑>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창조한다.


△ 15억원을 들여 지은 정교한 ‘병원 같은 세트’는 드라마에 리얼리티를 불어넣는다.

일본의 동명 원작소설이 보여주듯, <하얀 거탑>은 선악 없는 정치 드라마다. 대부분의 캐릭터가 자신의 이익에 따라 움직이고, 동시에 그들의 비애도 드러낸다. 주인공인 장준혁조차 권력욕과 의술에 대한 열정,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연민이 동시에 공존하는 복잡한 캐릭터다. <하얀 거탑>의 세트와 연기는 어느 편에 서서 판단이 쉽지 않은 그 세계를 눈앞에 그대로 보여준다.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창틈을 통해 빛이 들어오며 빛과 어둠 양쪽을 드러내는 캐릭터의 단면을 보여주는 <하얀 거탑>만의 독특한 조명은 자연스러운 빛을 내는 야외 촬영도, 지나치게 밝은 스튜디오 촬영에서도 만들어내기 힘든 독특한 영역이다. 그리고 여기에 스쳐 지나가는 눈빛만으로도 감정 변화를 보여주는 배우들의 연기력이 더해져 <하얀 거탑>은 작품만의 독특한 ‘공기’를 만들어낸다. 뭐 하나 쉽게 풀리지 않는 답답함, 그 불분명한 조명 속에서 평온한 얼굴을 하고서 아주 작은 일도 민감한 사안으로 변하게 하는 의사들의 조용하지만 치열한 권력투쟁. 시청자들은 그들이 빚어내는 분위기만으로도 <하얀 거탑>만의 특징을 느낄 수 있다.

스타에게 쓸 돈으로 ‘기본’에 투자

이 <하얀 거탑>의 성취는 바로 지금 한국판 ‘웰메이드 드라마’의 지향점을 보여준다. 한국의 제작 상황에서 모든 요소가 수준 이상으로 나오는 웰메이드 드라마는 한계 상황에서도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는 제작진과 연기자의 강철 같은 의지에 따라 결정된다. 그러나 스타에게 쓸 막대한 출연료를 드라마의 뼈대 역할을 하는 세트에 쓰고, 대신 좋은 연기력을 가진 중견 배우들을 포진시키면 드라마의 기본적인 ‘격’이 달라질 수 있다. 문화방송 <90일, 사랑할 시간>은 모든 신을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에서 촬영하며 담아낸 고급스러운 영상과, 재발견이라 할 만큼 성장한 강지환의 연기력을 통해 시청률과 별개로 드라마 마니아들의 호응을 얻었다. 또 한국방송 <황진이>가 시청자를 매혹시킨 것은 드라마에서 보기 드문 의상의 아름다움과 김영애로 대표되는 중견 연기자들의 무게감 있는 연기력이었다. 고화질(HD) 영상과 영화에 익숙해지고, 스토리에 따라 드라마의 ‘안드로메다’ 행을 판단할 정도로 감식안을 갖추게 된 드라마 마니아들은 이제 드라마 역시 영화와 같은 선상에 있는 하나의 ‘작품’의 기준에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드라마에 대한 요구가 확산될수록 한국 드라마의 흐름은 스타나 대본만이 아닌 연기와 영상의 영역으로, 더 나아가서는 영화와 기존 방송 드라마 사이에 있는 또 다른 무엇으로 변할 것이다. <하얀 거탑>이 끝까지 ‘잘 만든’ 드라마가 될지는 미지수다. 그러나 연기와 세트라는 기본에 가장 충실하게 접근하는 이 드라마는 그것만으로도 ‘웰메이드’의 기준선을 설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