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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가위, 2046

로드365 2007. 1. 14. 21:54

 

왕가위의 추신. "내게서 <화양연화>는 중국 차 한잔을 마시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건 아주 고요하고 평온한 것입니다. <중경삼림>은 코카콜라 병처럼 상쾌한 것입니다. <해피 투게더>는 내게 탱고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2046>은 차라리 아편 파이프 같은 것이었습니다. 나는 4년이나 그 아편을 피운 것입니다. 나는 이 영화에 붙들려 있었습니다. 그건 사치가 아니라 고통이었습니다. 오늘, 돌이켜보면, 그건 아름다움 '드럭' 이었습니다." (미셀 시망과 위베르 누아그레의 질문에 대한 왕가위의 대답. <포지티프> 525호, 94쪽)



왕가위의 주인공들은 늘 잃어 버린 기억을 찾아 어디론가 떠난다. <동사서독>의 취생몽사는 기억을 잊게 해주지만, <아비정전>의 아비는 "넌 나와 함께 있던 이 1분을 기억하게 될 것이다"라고 예언했었다. <화양연화>의 양조위는 "지나간 시간과 기억을 폐허가 된 정글 한가운데 있는 앙코르왓트에서 밀봉한다" 그건 거꾸로 모든 것을 잊지 않겠다는 다짐처럼 보인다.

<2046>이 드디어 깐느에 도착했다. 그 말 많던 시사회 연기와 심지어 시사회 연기가 누구도 왕가위의 영화 리뷰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시사를 하려는 왕가위의 술책이었다는 소문까지 떠도는 가운데. 세 시간을 서서 기다린 끝에 왕가위의 <2046>을 보았다. <2046>은 그렇게 늦게 깐느에 도착했다. <2046>은 홍콩이 반환된 후 50년이 되는 해이다.

영화는 왕가위의 모든 작품들이 어지러운 꼴라주처럼 모자이크의 한 조각처럼 점점이 박힌 기이한 오페레타 형태이다. <2046>은 절대로 깨고 싶지 않은 어지러운 꿈처럼 몽환적이다.

주인공인 양조위는 1966년에 <2046>이란 방에서 글을 쓰는 작가이다. 싱가포르에 있을 때, 과거에 그는 무협물을 썼는데 지금은 포르노 그래피를 써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또한 심심풀이로 SF 소설인 <2046>을 쓰고 있다. <2046>이란 미래를 그린 소설 속에서 사람들은 잃어 버린 기억을 찾고자 ‘2046’열차를 탄다. <2046>에선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다. 그곳에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돌아 온 사람은 1인칭 화자인 양조위와 '나'뿐이다.

그러니까 <2046>은 이미지와 현실의 관계이기도 하고, 홍콩의 미래와 홍콩의 과거 관계이기도 하며, 왕가위와 모든 영화들의 관계를 담은 은하철도 999같은 것이다. 시간은 흘러서, 미래는 과거가 되고 과거는 미래가 되며 점프 컷 된다. <2046>의 난해함은 동사서독에 버금가지만 역시 아름답다.

'나'는 과거에 싱가포르에 있을 때 도박 판에서 수수께끼의 도박사 공리를 만났는데, 검은 옷에 검은 장갑을 낀 그녀는 어떤 게임에서든 늘 이긴다. 그녀는 한 번에 100달러 이상 베팅하지 말라고 '나'에게 말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에게 이겨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과거를 알 수 없다. 기이하게도 공리는 내가 사랑했던 유부녀 수렌과 너무나 닮았다.(수렌은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맡은 여자 주인공이다) 나는 그녀를 통해, 어떤 사랑에서도 100달러 이상 베팅하지 않을 것을 다짐했다.

한편, 1966년의 '나'는 2047 방에 머무르면서 2046에 머무르는 창녀 장즈이와 연애하게 된다. 그녀는 사랑을 원하지만, 나는 그녀에게 육체를 준다. 나는 누구에게도 머무르지 않고 바람처럼 구름처럼 이 여자 저 여자 사이를 떠돌아 다니고 싶어한다. 나는 그녀와 관계를 가질 때마다 10달러를 준다. 그녀는 이제 자신이 돈을 주고라도 나와 함께 밤을 보내겠다고 눈물을 글썽인다.

매장면 다른 스타일리쉬한 홍콩 옷을 입은 채, 교태를 떨고 눈물을 떨구며 독기가 서린 눈으로 애증을 퍼붓는 장즈이의 연기는 <2046>의 화룡점정에 속한다. 그녀가 양조위와 벌이는 질펀한 육체의 성찬은 바로 양조위가 화양연화에서 장만옥과 꿈만 꾸던 그런 ‘미래’였는지 모른다. 양조위가 장즈이를 침대로 끌어 들이기 위해 좁은 공간에서 시시덕거리는 수작들, 왠지 <화양연화>를 떠올리게 하는 그 여관방들이 주는 밀폐된 미장센은 가히 왕가위가 왜 ‘왕’이며 ‘가위’ 인지를 알게 되는 대목이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장즈이와 양조위가 벌이는 사랑싸움을 담은 이 장면의 편집 기술은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답다.

<2046>의 또 다른 축은 왕비와 기무라 타쿠라가 벌이는 아름다운 사랑의 비가이다. 양조위가 머무르는 여관집의 딸인 왕비는 기실 일본 남자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아버지의 반대로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 마리아 칼라스의 ‘카스타 디바’ 정결한 여신이 흐르는 날이면, 나는 깨닫게 된다. 왕비가 아버지에게 혼이 나는 날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주 조금씩 나는 왕비의 순수함에 마음이 끌린다. 그리고 왕비와 일본인 남자 친구와의 관계를 소설 속에 집어 넣기 시작한다.

붉은 색의 현란한 원색이 번뜩이는 <2046>의 사이보그의 색감은 영화에 고색창연한 홍콩의 과거에 금속성 질감의 미래를 함께 연상하게 한다. 그건 모든 사람이 꿈꾸지만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의 욕망, 혹은 기억처럼 붉디 붉다.(참. 처음으로 왕가위는 붉은 색 대신 푸른 색으로 자신의 영화 제목을 덧 입혔다. 대체 왜 그랬을까?)

왕가위는 공리, 왕비, 장즈이 세 여자를 통해 각기 다른 노래와 스타일을 부여한다. 재즈의 어둠을 닮은 공리, 손 닿을 수 없는 클래식함을 지닌 왕비, 크리스마스 캐롤 같은 여자 장즈이. 이들 세 여자와의 연애담이 과거, 현재, 미래를 이루는 가운데, 에피소드가 뒤섞이고 풀어 헤쳐지는 가운데, 왕가위의 모든 영화의 주인공들과 핵심 장면들이 ‘숨은 그림찾기’같이 <2046>에 숨겨져 있다.

예를 들면 양조위는 <아비정전>의 마지막 장면에서 머리를 빗는 아비이며, 공리는 <화양연화>의 수렌처럼 슬퍼하고, 장즈이와 양조위는 <해피 투게더>의 장국영과 양조위처럼 택시에서 머리를 기댄다. <중경삼림>에서 유명한 스텝 프린팅 장면은 도박판의 양조위 주변을 유령처럼 떠돈다.

정서적 울림은 적지만, <2046>은 의심할 바 없는 걸작이다. 그것은 왕가위란 이미지의 전도사가 추억하는 홍콩과 자기 자신에 대한 회고담이며, 그 모든 왕가위 영화가 한가지로 연결되는 교차 지점에 있는 영화이다. 바로크적이고 현란하고 철철 넘치게 스타일리쉬한 이미지가 포함된 화면들은 왕가위의 탁월한 공간 감각과 편집의 마술에 의해 목이 졸리는 듯 황홀하게 스크린을 적신다. 영화는 홍콩의 미래로도, 왕가위 자신의 미래로도, 그리고 우리들이 찾고 싶어하는 기억과 시간의 한 조각으로도 읽힐 수 있지만 대체 그것이 뭐가 대수인가.

<2046>을 보며 생각해 보았다. 깐느의 감독들이 특히 심사위원장인 타란티노가 이 영화를 보며 얼마나 좌절했을까 하는 생각. <2046>을 보니 왕가위의 모든 영화를 복기하고 싶어진다. 왕가위는 이제까지의 자신의 영화를 정리하고 새로운 영화 만들기의 세계로 향할 것이다. <2046>은 그 전환점이 될 것 같은 영화이다. 그러나 다가올 왕가위의 영화가 무어라 해도 나는 또 다른 왕가위 영화를 보기 위해 4년을 기다리는데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추신: 타이틀에는 분명히 장만옥이 나오는데 눈을 씻고 봐도 나오지 않는다. <해피투게더>의 구숙정처럼 편집에서 잘린 것 같다

영화평론가 심영섭 chinablue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