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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유감. 기독교 유감. 특히 일부 개신교

로드365 2007. 3. 14. 15:57



 2011.4.16
개신교에 관한 지속적인 문제 제시 블로그.
종교인 범죄라는 카테고리 운영 중.

아빠늑대의 음흉한 둥지 



 2007.3.14

유사 성행위와 유사 신앙 행위 -박노자

유럽 같으면 조금 더 대담하게 대놓고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지만, 한국 같으면 "이미지 클럽/대딸방에서 아르바이트한다"고 당당하게 대답할 수 있는 여성이 거의 없을 듯합니다. 대체로 이와 같은 일이 "부끄러운 직업"으로 인식되지요. 물론 실제로는 성매매 정도로는 아니지만 일단 성적 이미지를 상품화시키고 남성의 일방적인 만족을 전제로 하는 직업인 만큼 부정적인 측면이 강하고 또 심신상의 피로가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기에 별로 "자랑"스러워할 것이 없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런데도 과연 다른 직종에 비해 그렇게 "부끄럽게"만 생각해야 하나요? 솔직한 말씀으로는, 저는 "마사지 클럽 아가씨"보다 상당수의 성직자들이 훨씬 더 부끄러운 직업을 갖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마사지클럽에 오는 손님도 한 시간 동안의 "플레이"를 "사랑"으로 착각할 일이 없지만 서빙하는 여성도 굳이 "사랑" 따위를 연출할 필요성을 느끼지 않지 않습니까? "클럽"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일시적인 만족을 주되 본격적으로 외로움과 같은 인생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대체물"이라는 것을, 양쪽에서 다 알고 솔직하게 하는 것이지요. "유사 성행위"와 남녀간의 진짜 사랑 사이의 거리란 거의 천문학적이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예컨대 대다수의 교회에서 설교되어지는 이야기나 행해지는 행위와, 진정한 의미의 "하나님 사랑"의 사이의 거리도 거의 같을 것입니다. "우리 종파"가 아닌 사람들이 지옥에 간다느니 진정한 영적 생활을 못한다느니 하는 이야기와, 차별과 배제가 없는 하나님의 평등한 사랑을, 사실 같은 차원에서 논하기조차 어렵지요. 그리고 만법의 연기를 깨닫고 팔정도를 통해 사생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다는 불교의 원래 논리와, "49재"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로 거의 메꿀 수 없는 갭이 벌어져 있는 것이지요. 대다수의 교회나 사찰에서 "신앙"이라고 포장하여 파는 것은, 마사지클럽에서의 "유사 행위"와 다를 바 없는 진정한 신앙의 "대체품" 내지 그 수준에도 못미치는 신앙적 "짝퉁 상품"입니다. 그런데 마사지클럽 아가씨가 자신의 손을 움직이는 것이 돈이 아닌 사랑이라고 거짓말 하지 않는 것과 달리, 수많은 목사님 분들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말씀을 전달한다"고 큰 소리를 치지 않습니까? 이 분들이 차라리 이미지클럽에 가서 거기에서 진솔함과 겸손함을 배웠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 분들께서 "부자가 낙원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충실히 따라 가난은 몰라도 적어도 국내 도시 근로자의 한달 평균 소득인 1,600.000-1,700.000원 정도로 자신들의 소득과 소비를 조절했으면 그나마 "하나님"과의 진정한 연결고리가 보였겠지만 실제로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과연 많습니까? 그리고 교회에 정말로 "하나님의 사랑"이 깃들어 있었다면 지금의 교회가 "사학법"을 갖고 떠드는 대신에 아이들의 인성을 파괴하는 성적, 등수 없애기 운동 정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교회"/"사찰"이라는 제도상에 이야기되어지고 실행되어질 수 있는 "신앙"과 진정한 신앙의 차이는, 말그대로 이미지클럽과 이도령과 성춘향의 첫날밤의 차이 정도지요. 그러면서도 저 분들은 이 사실을 꾸준히 부인하실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직자들이 "사회적 어른"의 대접을 받는 이와 같은 사회에서는 "대딸방"에 종사하시는 분들은 정말로 부끄러워하실 것은 없습니다.

물론 여기에서 한 가지 반론이 가능해요. 대형 교회에 가서 일주일에 한 번 "성령"을 받아보고 미쳐보는 것이, 마약복용이나 알콜 중독, 인터넷상에 이효리 팬클럽하는 일 등 또 다른 종류의 "자기 물화"보다 낫지 않느냐는 반론이지요. 맞습니다. 비툴어진 사회에서 비툴어진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안"이 필요하다면 안방 극장과 술보담 교회가 더 나을 수도 있는 것이지요. 물론 거기에 다니다가 아주 광신으로 안나가는 한에 말씀입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시는 분들이 "위안"과 진정한 의미의 "신앙" 사이의 차이를 좀 인식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위안"이야 교회에서도 사찰에서도 휴게텔에서도 다 가능하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어딜 가나 뭘 하나하고 무관하게 자기 안에서의 거짓을 불태우고 자기 바깥에서의 거짓을 적어도 "거짓"이라고 정확하게 부를 수 밖에 없는 아주 특별한 마음상태입니다. 그런데 그걸 말로 표현하기가 쉽지가 않아요...

http://wnetwork.hani.co.kr/gategateparagate/4918



예수도 말을 빼앗긴 시대

좌경 낙인과 사퇴 압력, 정진권 목사 사태를 보는 동료목사의 탄식…강한 자들의 이익에 봉사하는 개신교회 매도의 대상으로 전락하나

‘좌경 목사’로 몰려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정진권 염창교회 목사 사건 등 한국 교회 안에 부는 매카시즘 바람을 다룬 <한겨레21> 643호는 묵묵히 복음을 전하고 있는 목사들의 탄식을 자아냈다. 정 목사의 동료인 청파교회 김기석 목사가 매카시즘 공세를 중단하고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라고 촉구하는 글을 보내왔다. 편집자 ▣ 김기석 서울 청파교회 목사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나는 지금 우울하다. 지천명의 나이에 이른 목사가 웬 우울 타령이냐고 욕할지 모르겠지만 내 마음은 분명 잿빛이다. 햇빛이 부족한 겨울이어서가 아니다. 내가 일생을 걸고 붙잡으려던 진실이 가뭇없이 멀어져가는 것만 같기 때문이다. 아니, 진실은 그곳에 그냥 있다. 다만 우리가 부평초처럼 세파에 떠밀리고 있을 뿐이다. 예수가 좋아서 예수를 따르기로 했고, 정말로 예수를 닮고 싶었다. 마음 씀씀이와 말과 궁행이 오롯이 그분과 일치하기를 원했다. 지금도 그 꿈은 여전하지만 절실함은 적어졌다. 삶이 편안해지면서 예수 정신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음을 자각하지만 선뜻 돌이켜지지 않는다.

나는 우울하다. 버림받은 이들의 품이 되어주어야 할 교회가 쉴 곳을 찾아 날아온 새에게 상처를 주는 현실이 안타깝기 때문이다. 머리 둘 곳조차 없었던 예수는 모두의 품이 되어주셨다. 그러나 부유하게 된 많은 교회들은 오히려 품을 잃어버렸다. 돈으로 하는 구제사업이나 세련된 행사가 품은 아니지 않은가? “목이 마르다. 서울이 잠들기 전에 인간의 꿈이 먼저 잠들어 목이 마르다. 등불을 들고 걷는 자는 어디 있느냐” 탄식하는 정호승의 ‘서울의 예수’에 대답할 말이 없다. 사립학교법 개정에 반대한다면서 서울 시청 앞에 모여 시위를 한 뒤에 바퀴 달린 십자가를 끌고 거리를 행진하는 성직자들의 철면피가 부끄럽고, 성탄절을 앞두고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삭발을 단행한 교단장들의 몰상식이 부끄럽다.


△ 편집장을 맡은 책의 ‘친북반미’시비로 사퇴 압력을 받고 있는 정진권 목사는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새가 되었다.

사학법 반대하는 성직자들의 철면피

어느 때부터인가 개신교회는 세상 사람들에게 타매의 대상이 된 듯하다. 전래 이후 계몽의 주체였던 개신교회가 이제는 계몽의 객체로 전락한 듯하다. 한국 사회에서 신뢰 지수가 가장 낮은 집단으로 인식되는 정치인들조차 선거법을 위반하면 옷을 벗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하지만 교계에서는 교단장을 뽑는 선거에 금품이 오가는 관행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부도덕한 교역자들의 이런저런 일탈 행위가 발각되어도 그들은 끄떡없다. 왜? 그들은 힘이 있기 때문이다. 자금 동원력이 있고,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플라톤의 <국가 정체>에 나오는 트라시마코스의 제자가 되고 있다. 그는 “정의란 더 강한 자들의 이익”이라고 말했다.

근 30여 년 세월을 목회에 전념해온 한 목회자가 ‘친북반미’ 혐의(?)로 쫓겨날 위기에 처해 있다. 그가 만든 책 한 권이 빌미가 됐다. 그는 세계감리교대회를 위해 기도하다가 분단 조국의 현실을 참석자들에게 알리고 한반도의 통일과 화해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뜻에서 <사진으로 본 분단 60년>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그 책에 담긴 내용이 보수적인 목회자들과 장로들의 검열에 걸려들었다. 그들은 즉시 그 책의 배포를 중지시켰고, 책의 편집자인 정진권 목사에게 ‘친북반미’라는 꼬리표를 달았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친북반미’라는 말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되어 사람들의 의식을 불구로 만들고 있다. 그 말은 어떠한 합리적인 대화도 토론도 허용하지 않는다. 대화는 성찰을 위한 거리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그 말은 사람들의 견해가 자기 기준에 부합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물을 뿐 자신을 반성적으로 돌아보지 않는 자폐적인 말이다.

색칠한 뒤 죽게 만든다

미국 작가 저지 코진스키의 책이 떠오른다. <무지갯빛 까마귀>로 번역된 그의 작품의 원제는 <색칠해진 새>(The Painted Bird)이다. 그 소설은 전쟁의 참혹한 상황 속에 버려진 한 아이의 눈으로 보는 세상 이야기이다. 사람이 얼마나 잔인하고 비겁하고 맹목적인지 책은 보여준다. 그중의 한 인물인 새 장수 레흐는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욕구불만이 생길 때마다 자기가 팔러 다니는 새 중에서 가장 크고 힘이 센 놈을 골라내 온몸에 야생화보다 더 알록달록하게 색을 칠한다. 그러고는 새를 숲으로 데려가 목을 가볍게 비튼다. 새가 고통스러워서 삑삑거리는 소리를 내면 같은 종류의 새들이 날아와 초조하게 날아다닌다. 새들이 충분히 모였다 싶으면 레흐는 그 새를 놓아준다. 자유를 누리게 된 새는 기쁨에 겨워 한 점의 무지개처럼 공중으로 날아오른다. 그 새를 맞은 잿빛 새들은 잠시 혼란을 느낀다. 알록달록하게 칠해진 새는 자기가 그들의 동료임을 알리려고 더 가까이 다가가지만, 새들은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다가 일시에 그 새를 공격해서 죽이고 만다.


△ 예수정신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고투하는 수많은 목회자들의 목소리는 주류 담론에 가려 들리지 않는다. 지난 12월28일 열린 정진권 목사를 위한 기도회 모습.

레흐는 어디에나 있다. 피부색이나 인종, 사상이나 종교의 차이를 빌미로 한 개인 혹은 집단을 악으로 규정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불관용을 통해 다른 사람의 양심을 구속함으로써 자기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이 그들이다. 정진권 목사는 지금 색칠해진 새가 되어 우리 앞에 있다. 그를 받아줄 품은 어디인가? “인간이라 불리는 티끌들 사이에 존재하는 이 모든 사소한 차이들이 증오와 박해의 구실이 되지 않도록 해주소서”라고 간구했던 볼테르의 기도를 지금 이 땅에서 반복해야 한다는 사실이 곤혹스럽다.

어찌하여 오늘날 교회의 언어가 바벨탑의 언어를 닮아가는가? 획일화된 말, 계율적인 말, 일사불란한 말이 횡행하는가? 예수를 침묵시켰기 때문이다. 예수는 경계선을 가로지르며 사셨다. 유대인과 이방인, 의인과 죄인, 여성과 남성을 가르는 인습적인 경계선을 그분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넘나드셨다. 불통의 세상을 소통의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그분은 자기 삶을 바쳤다. 하지만 지금 한국 교회의 권력 구조는 다양한 소리들을 침묵시키고 있다. 겨울 공화국인가? 심지어는 예수조차 김지하의 희곡 <금관의 예수>에서처럼 금관에 씌워진 채 말을 박탈당하고 있다. 물론 모든 교회가 다 그렇다는 말은 아니다. 나는 예수정신을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고투하고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을 알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는다. 주류 담론을 장악하고 있는 이들의 소리만 도드라지고 있기 때문이다. 불의한 자들에게는 몰아쳐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고 그들의 거짓된 생각을 깨뜨리던 태풍 같은 예수의 말이 그립다. 가난하고 병들고 지친 이들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온전케 하고, 넘어진 이들을 일으켜 세우던 미풍 같은 그의 말이 그립다.

교회여,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조롱과 냉소와 저주의 언어가 신의 이름으로 선포되고 있는 이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예수의 이름으로 예수가 부인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망령되이 일컬음을 받는 이 현실을 어찌해야 할까? 암담하다. 하지만 이제 우울을 떨쳐버려야 할 때이다. 믿음의 반대말은 ‘이제는 어쩔 도리가 없게 되었다’고 말하는 숙명론이니 말이다.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희망의 불이 꺼지지 않는 한 희망은 있다. 교회여, 편협한 신앙을 누구보다도 미워했던 예수의 정신으로 돌아가자! 교인들이여, 이마누엘 칸트의 충고대로“너 자신의 오성을 사용할 줄 아는 용기를 가지라”


“주여 제가 빨갱이 목사입니까”

책임 편집한 현대사 책 한권 때문에 좌경 목사로 몰린 정진권 목사…진보 목회자들에게 일상화된 공포, 보 교회의 매카시즘이 몰아친다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t@hani.co.kr

그를 아는 사람들은 “보수적인 신앙관을 가진 사람”이라고 했다. 교회 안에서는 교인들에게 전도폭발 훈련을 하고, 중국에서는 1천여 명의 탈북자들에게 복음을 전한 목사였다. 출석 교인 750명, 서울 강서구 염창교회의 정진권(52) 목사. 1980년대 그 흔하던 ‘운동’ 한 번 안 했던 그가 최근 ‘좌경 목사’로 몰렸다. 기독교대한감리회는 그의 사상을 검증해 그가 쓴 책이 ‘반미적 색채가 농후하다’는 결론을 내렸고, 일부 장로들은 ‘친북반미’ 목사 아래서 교회에 다닐 수 없다며 퇴진을 요구하고 나섰다.


△ 교회 안에 매카시즘 바람이 불고 있다. 평범한 목회자인 정진권 목사는 ‘좌경목사’로 몰렸다(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자격심사위의 심사결과도 거부

정 목사는 왜 좌경 목사가 된 것일까. 그는 지난해 7월 한국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WMC)에서 참석자들에게 나눠준 책 <사진으로 본 분단 60년>의 책임 편집장이었다. WMC는 세계의 목회자 3천여 명이 참여하는 큰 행사로, 서울 금란교회에서 진행됐다. 정 목사는 “대회의 주제가 화해였던 만큼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고 싶어서 책을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 책은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부터 2000년 6·15 남북 공동선언, 2002년 서해교전까지 사진을 곁들여 한국 현대사를 요약한 책이었다. 정 목사는 이 책이 퇴진운동의 화살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발단은 대회 도중 일부 목사와 장로들이 “좌경·반미적인 자료가 어떻게 미국 목사도 있는 세계감리교대회에 나눠줄 수 있느냐”며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한 데서 비롯됐다.

문제는 WMC 이후에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감리교의 지역조직인 서울남연회(서울 강남)의 14개 지방 사회평신도 총무(장로)와 감리교 실행부위원인 민아무개 장로가 이 책의 편집장인 정 목사의 징계를 요구하며 교단 차원의 조사를 주장한 것이다.

이들이 제기한 사상적 문제점의 일부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무능력한 이승만 정권”이라고 표현하며 대한민국 정체성 훼손 △1946년 4월6일 대한민국을 남조선이라고 호칭 △김일성을 ‘김일성 주석’이라 호칭 △실정법을 위반한 문익환을 옹호 △이북이 주장하는 대로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평화협정을 맺자고 주장….


△ 매카시즘의 불씨가 된 <사진으로 본 분단 60년>. 정 목사는 이 책을 세계감리교대회에서 나눠줬다가 보수 목회자들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이들은 특히 “정진권 목사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라는 용공·친북단체(비전향 장기수를 돕는 단체)에 가입해 운영이사까지 맡고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친북반미 사상이 투철한 사람”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 책의 발간사를 쓴 신경하 감리교 감독회장(교단 대표 목사)에게도 미국에 대한 입장을 공개할 것을 요구하고 대회에 참석했던 미국 및 외국 대표들에게 사과문을 발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감리교 총회는 이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정 목사 등 기고·편집자들에 대한 조사를 벌였다. 지난해 10월17일 조사위원회는 교단 총회에 “책의 내용은 반미적 색채가 농후하다”고 보고했다. 교단 총회는 편집자인 정진권 목사를 염창교회가 소속된 서울남연회 자격심사위원회에 회부했다. 12월20일 자격심사위는 정 목사를 불러 조사했고, “반미친북의 목회자가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고 최종 통보했다.

하지만 장로들은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민아무개 장로는 자격심사위원장인 금성호 목사에게 1월2일 내용증명 우편을 보내 “1월10일까지 재심사를 하지 않으면, 서울남연회 평신도회 총무들과 함께 문제 없다는 직권 남용 혐의로 자격심사위원회를 교회법상 고발할 것”이라고 말했다.

“스스로 시인하는 간첩 있나요?”

염창교회의 일부 교인들은 정 목사 퇴진을 요구했다. 염창교회의 인사위원(장로·부서 대표로 구성)들이 연명해 정 목사를 이임시키기 위한 인사구역회를 서울남연회에 요구한 것이다. 하지만 서울남연회는 인사구역회 소집을 거부했다. 인사구역회 개회권을 갖는 한정석 서울남연회 감독은 “목회자의 사상 문제는 인사 사유가 되지 않는다”며 “감독 권한으로 이들의 문서를 반송했다”고 말했다. 인사구역회가 성사되면, 정 목사는 담임목사직을 잃을 가능성이 크다. 교회 인사위원 33명 가운데 20여 명이 인사구역회 소집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교단과 교회, 안팎에서 몰린 정진권 목사는 싸우는 길보다 성찰하는 길을 택했다. 그는 사진의 선택이 편중되고 언어 사용에 문제점이 있지만, 책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했다. 정 목사는 “사진들은 모두 일간지에 공개된 것들”이며 “내용도 중학교 교과서 수준에서 모두 읽는, 시중에 판매되는 역사책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의심은 거둬지지 않았다.

정 목사는 교회 홈페이지에 ‘나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사상고백서’를 썼다. “나는 지난 100년의 현대사가 미국의 주도하에 이끌어온 것처럼 앞으로 100년의 역사도 미국이 이끌어갈 것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나는 미군이 한반도에 계속 주둔하고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다. …나는 국가보안법 폐기를 반대하는 사람이다. …나는 사회주의자도 아니고, 반미주의자도 아니다. 대한민국이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 아래서 부강한 나라가 되어, 그 토대 위에서 평화적 통일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일 뿐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나는 감리교 목사로서, 그리고 세계감리교대회의 대표자로서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다”라며 <사진으로 본 분단 60년사>에 대해 후회가 없다고 말했다.


△ 12월28일 감리교신학대학교에서 정 목사를 위한 기도회가 열렸다. 참석자들은 한결같이 사상 문제로 목회자가 단죄받아선 안 된다고 말했다(사진/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하지만 장로와 교인들은 정 목사의 낮은 목소리를 듣지 않고 있다. 12월12일 서울 강서 지역 교회 장로 대표들로 구성된 강서지방장로회 38명은 이 지방 감리사인 정 목사가 주재하는 구역회(예산 등 결정기구)를 거부하기로 결의했다. 정 목사가 점점 ‘식물 목회자’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아무개 장로는 거침없이 말을 쏟아냈다. “지금 민주노동당에서 간첩으로 걸린 사람이 스스로 시인한 사람이 있나요? 총회 조사위원회에서 반미적 색채가 농후하다고 결론 내린 겁니다. 이건 기독교에서 안 되는 일이에요. 우린 정 목사의 7년 목회를 평가 내렸습니다.”

목회자들은 교회 안에 매카시즘 바람이 불고 있다고 말한다. 감리교 인터넷신문인 <당당뉴스>를 운영하는 이필완 목사의 말이다. “사회에서 불던 좌경 논쟁이 교회 안까지 들어왔어요. 정진권 목사처럼 운동권도 아닌데 올바르게 살려는 사람까지 친북반미로 내몰리는 거예요.”

소설책 한권 소개하고 좌경으로 몰려

예수교장로회(고신) 소속의 고신신학대학원 길성남 교수도 2004년 말 좌경으로 몰려 곤혹을 치렀다. 그 또한 1987년 6월항쟁 때 한두 번 시위대를 따라다닌 경험 말고는 정치 활동이 전혀 없던 사람이었다. “학생들에게 황석영의 <손님>을 읽으라고 권했어요. 기독교와 공산주의가 대립했던 황해도 신천 학살 사건을 통해 시각을 넓혀보라는 취지였지요.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된 거예요.”

한 학부모가 이를 ‘이적 서적’으로 받아들여 문제를 제기했고, 길 교수의 사상 문제는 부산 노회 석상에서 거론됐다. 친북반미 사상을 가진 교수가 학생들을 오염시킨다는 이유였다. 길 교수가 새벽기도 설교 때 “부시의 이라크 침공은 성경의 가르침과 맞지 않다”고 말했던 사실까지 죄목으로 추가됐다. 길 교수는 1월3일 전화 통화에서 “다행히 교단의 주요 목사에게 친북반미 사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고 적극적으로 해명해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고 씁쓸하게 웃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이제 학생들에게 발언도 조심스럽게 하게 돼요. 교회의 분위기가 거의 매카시즘 수준에 이르렀어요.”


△ 2006년7월20일 서울 금란교회에서 열린 세계감리교대회(사진/ 연합 서명곤)

색깔 논쟁은 각 교단의 총회장 선거나 기독교계 대학 선거에서 심심찮게 나타나고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게 지난해 8월 목원대 총장 선거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KNCC)에서 잔뼈가 굵은 김영주 목사는 교수·교직원 투표에서 129표 대 29표로 상대 후보를 압도했지만, 이사진은 정작 29표를 받은 이요한 목사를 총장으로 추대했다. 당시 목원대 총장 선거 과정을 지켜본 한 목사의 말이다. “KNCC 인권국장으로 일했던 김 목사의 운동권 경력이 문제가 된 거지요. 김 목사가 반미 성향이라는 사상 공세도 심했어요. 이런 논리가 이사진들에게 통하면서 사실상 확정됐던 선거 결과가 엎어진 거예요.”

지난 12월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 회장 선거에서는 사상검증성 질문지가 돌려졌다. 기독교계 비정부기구(NGO)를 표방하는 ‘기독교사회책임’이 두 후보에게 교단 운영과 관련이 없는 정치·사상적 질문을 던진 것이다. 16개 질문 가운데는 이런 내용도 있다. “목사님은 노무현 정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할 생각입니까?” “햇별·포용정책에 대해 어떤 입장입니까?” “맥아더 동상 철거 시도 사건 이래로 친북좌파 세력이 크게 문제가 되고 최근에는 386간첩단 사건까지 터진 바 있습니다. 이런 좌경화 흐름에 대한 목사님의 입장은 무엇입니까?” 한 후보에게는 이런 질문도 던져졌다. “목사님은 친DJ라고 불리는데, 이에 대한 의견은?” 두 후보가 모두 보수 인사였기 때문인지, 이들은 친절한 답변을 보냈다. 기독교사회책임의 최규호 사무처장은 “교회 최고 지도자가 국가적 중요 사안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느냐는 중요한 일”이라며 “사상검증이라고 생각지 않는다”고 말했다.

지난해 초 사학법 개정과 관련해 종교단체 의견을 수렴하기 위해 정부가 설치한 사학법시행령개정위원회에 참여한 한 목사도 ‘사상적 의심’ 때문에 소속 교단으로부터 소환 통보를 받는 수모를 당해야 했다. 교단의 입장과 달리 사학법을 찬성하는 말과 행동을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여기저기서 ‘좌경 색출’의 의지 분출

“교단 총회에서 공문이 왔는데, 임원회의에 나와 해명하라는 거예요.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말한 내용을 진술하라, 교단이 녹취록을 가지고 있다, 이런 내용이었어요. 내가 평소 사회 참여를 많이 했다는 이유로 노무현 정부에 전적으로 찬성하는 사람으로 매도하는 분위기예요.”


△ 보수 기독교계 내부에선 좌경 사상을 경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거세다. 서울의 한 교회 모습(사진/ 한겨레21 박승화 기자)

기독교 내부의 매카시즘은 보수 교회가 서 있는 정치적 입장에서 벗어난 언행이 발생했을 때 작동한다. 최근 보수 기독교계에서 예수의 가르침은 ‘친미반북 사상’으로 해석되고, 다시 한 번 변용돼 국가보안법 존치, 사학법 재개정, 좌파 정권 교체 등의 ‘사상 검증 체크리스트’로 속류화됐다. 사상 검증 체크리스트에 걸리면 매카시즘이 작동한다. 문제는 이런 사상 잣대를 가지고 있는 일부 보수 교회의 행태가 저항적이 아니라 공격적이라는 점이다. 보수 기독교는 밖에서는 ‘좌파 정권’의 피해자인 양 저항하고 있었지만 안에서는 가해자가 되어 다른 생각을 가진 목회자를 공격하고 있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은 사실 갑작스레 돌출된 것이 아니다. 그동안 보수 기독교계 내부에선 ‘좌경 색출’의 의지가 여기저기서 감지됐다. 지난해 2월 한국기독교신앙운동실천협의회(한기실·이사장 이수영 목사)가 창립됐다. 600여 교회가 가입한 이 단체는 ‘좌경 사상의 침투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한 연합 조직’이라며 언론에 소개됐다. 창립 예배의 설교 주제는 ‘성전을 청소하라’였다. 이종성 목사는 “목사들 중에서도 남한의 인권 문제는 목이 터져라 외치면서 동족 600만 명을 참살하고 매년 200만 명을 굶겨 죽이는 김정일의 통치권을 인정하는 사이비 목사들이 있다”며 “사상적·도덕적·종교적 불순분자들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걸 방관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노재성 한기실 사무총장은 1월3일 “그동안 새문안교회에서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이라는 주제로 강연회를 열었다”며 “전교조의 민중사관에 노출된 교회 청소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일할 것”이라고 말했다.

교회의 사상검열은 약하게는 색깔논쟁에서 강하게는 매카시즘으로 발전한다. 매카시즘은 내면의 검열과 공포를 조성한다. 1950년대 미국에 매카시즘 광풍이 불던 시절 <뉴욕타임스>의 존 비 오크스 논설위원은 편집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매카시즘은 우리 모두의 말과 글과 사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우리는 말을 하거나 글을 쓰거나 어디에 참여할 때 전보다 훨씬 조심하게 되었다. 우리의 행동이 극우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장차 공격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감리교 ‘운동권’ 목사들의 기도

이러한 공포는 진보적 목회자들에게 이미 일상화돼 있었다. 진보적인 목소리를 냈다가 교단의 영향력 있는 보수적 목사나 장로에게 친북반미로 찍히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서울 강남 순례자교회 정상복 목사는 “교회가 워낙 보수화돼 젊은 목사조차 소신껏 발언하기보다는 쉬쉬하는 분위기”라며 “목사가 사회 활동을 하면 1970~80년대엔 도덕적 지원의 정서가 있었지만, 지금은 친북반미라는 시각이 강하다”고 말했다. 그리고 한탄하듯 말을 이었다. “운동권 목사는 안 된다는 보편적인 정서가 생겼어요. 속된 말로 운동권 목사로 찍히면 대형 교회는커녕 중형 교회도 못 가고 큰일을 맡을 수 없죠. 진보적인 목사들한테 무조건 친북반미라고 하는데, 우리는 김정일과 부시를 동시에 반대하는 것이지, 무조건 북한을 옹호하고 미국을 반대하는 게 아니에요.”

그동안 숨죽였던 감리교의 ‘운동권’ 목사 20여 명은 연말 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12월28일 서울감리교신학대학에 모였다. 일면식도 없는 정진권 목사를 위해 기도하기 위해서였다. 목사들은 통성으로 기도했다. “사상·이념 문제로 단죄받는 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정 목사의 문제는 우리 문제이자, 한국 기독교의 문제입니다.” “거짓 앞에 침묵하던 우리가 회개하도록 도와주십시오. 정 목사를 통해 잠들었던 양심이 깨어나길 기도합니다.”

12월31일, 정진권 목사는 2006년의 마지막 설교를 마쳤다. ‘내(하나님) 앞에서 행위 완전하라’는 주제의 설교였다. “오늘은 제가 간절히 말합니다. 저는 좌경 목사도 아니고 반미 목사도 아닙니다. 어떻게 목사가 친북 하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다시 한 번 고백했다. “저는 하나님 앞에 죄인입니다. 부족한 사람입니다.” 핍박받는 자의 안식처가 돼야 할 교회가 어쩌다 핍박하는 빌라도가 됐을까. 정진권 목사가 진 십자가가 한국 기독교가 진 십자가처럼 보였다.


“한국은 사상이 신앙 위에 있다”

반년째 매카시즘의 사슬에 얽매어 있는 정진권 염창교회 목사의 심경“노란색으로 칠한 사택 보고 열린우리당 지지하는 좌경이냐고 하더라”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매카시즘의 사슬은 정진권(52) 염창교회 목사를 자꾸만 조이는 듯했다. 교회 홈페이지에 세 차례 해명을 올리고 설교 시간에 용서를 구했지만, 한국 교회는 그의 사상을 시험에 들게 하고 반년째 놔두질 않고 있었다. 그는 매일 밤 11시에 그를 지지하는 교인들과 함께 기도를 하고 있었다. 1월4일 오후 염창교회에서 정 목사를 만났다.


서울남연회 선거에서도 책 복사해 돌려
<사진으로 본 분단 60년>을 어떻게 만들게 됐나.

=세계감리교대회(WMC)의 주제가 ‘화해’였다. 그런데 정작 행사에 화해와 평화라는 주제의 프로그램이 없더라. 전세계에서 3천 명이 참석하는데,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하는 자리가 돼야 한다고 생각했다. 내가 총무를 맡고 있는 탈북자 선교단체인 북방선교회와 감리교평화연구소가 평화포럼을 만들어 이 일을 맡기로 했다. WMC에 3대 제안을 했다. 휴전선 근처 도라산역 예배, 국제평화포럼 개최, 분단 60년사 편찬 등이었다. 분단 60년사 집필을 평화포럼이 주관하기로 한 것이다.

사상 논쟁으로 번지게 된 발단은 무엇이었나.

=김홍도 금란교회 목사가 “좌경·반미적인 자료가 어떻게 WMC에 있을 수 있느냐”고 문제를 제기했다고 들었다. 다른 보수적인 목사, 장로들도 문제를 제기해 3천 권 가운데 국내 참석자에게 배부된 700권을 회수했다. 광주항쟁, 노근리 사건, 4·3항쟁 등이 문제라고 했다. 하지만 조지 프리먼 WMC 총무는 “책 내용이 좋은데 왜 회수하냐”며 의아해했다. 심지어 프리먼 총무는 노근리 문제에 대해 “우리(미국)가 회개한다”고 말한 적도 있다. 대회가 끝난 뒤, 서울남연회 감독 선거에서는 이 책이 정치적으로 이용됐다. 한정석 후보와 다른 후보가 맞붙었는데, 상대편이 이 책을 복사해 돌리면서 색깔 논쟁이 붙었다. 내가 한정석 후보를 지지하고 있었거든. 그 뒤 문제가 커져 교단 총회에서 조사위원회가 구성되고 자격심사위에 회부됐다.

자격심사위에서 뭐라고 답했나.

=공산주의자라 할지라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공산주의자도 우리 동포고, 선교 대상 아닌가. 그 생각이 잘못됐다면, 나는 빨갱이다. 다행히 자격심사위는 나를 건강한 감리교 목사라고 판정했다.

다른 사상적 문제는 거론되지 않았나.

=서울남연회 평신도회 총무들이 내 사무실을 방문했을 때, <북한주체사상연구>라는 책을 보고 나를 좌경 목사로 몰았다. 나는 탈북자 선교를 위해 주체사상을 연구한다. 전도하려면 북한 사람들부터 이해해야 되지 않겠나. 더욱이 이 책은 주체사상 비판서다. 또 한번은 노란색으로 칠해진 사택을 보고, 염창교회는 열린우리당을 지지하는 좌경 교회냐고 묻는 사람도 있었다. 지금까지 신앙이 사상과 지역, 모든 걸 뛰어넘는 줄 알았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선 그게 아니었다. 사상이 신앙 위에 있었다.

레슬링 선수처럼 버티겠다

감리교 비전향 장기수 지원단체인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모임’을 용공으로 규정하고 문제 삼고 있던데.

=그곳의 이사장을 맡은 적이 있다. 적도 먹여살리는데, 장기수들을 못 돕겠나. 나는 그 일을 통해 공산주의자가 기독교인이 되는 걸 봤다.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카를 바르트가 그러지 않았나. 진정한 기독교인은 진정한 사회주의자이고,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진정한 기독교인이라고.

그럼에도 교인들은 퇴진을 요구하고 있다.

=선악을 따지기 전에 내가 원인을 제공했다. 그 점을 회개한다. 하지만 이번 일을 통해 분단을 뼈저리게 느꼈고 통일의 필요성을 새삼 깨달았다. WMC를 한국에서 다시 한다면, 난 다시 책을 낼 테다. 그만큼 부끄러운 일을 하지 않았다. 퇴진 압력에도 레슬링 선수가 납작 엎드려 버티는 것처럼 버틸 것이다. 버티는 것도 목회다.


설교인가 선동인가

성서 텍스트엔 관심 없고 주관적 신념만을 설파하는 일부 목사들…“빨갱이들이 정부를 장악했다”는 이들에게 필요한 건 임상치료

▣ 정용섭 대구성서아카데미 원장·<속 빈 설교 꽉 찬 설교> 저자

요즘 대중 설교자들의 설교를 검토하면서 필자가 그들에게서 느낀 가장 큰 문제점은 그들이 성서 텍스트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형식적으로는 성서를 근거로 설교하는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자신의 주관적인 신앙 체험만을 청중에게 강요하고 있다. 다른 영역에서도 비슷하겠지만, 종교 생활에서 체험은 옳고 그름을 차치하고 매우 특별하게 기능한다. 설교자의 체험이 보편적인 타당성을 확보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청중은 그것을 그대로 믿고 싶어한다.


△ 일부 한국 교회의 설교는 목사의 주관적 신념이 설파되는 기회로 왜곡되고 있다. 지난해 12월20일 사립학교법 재개정을 촉구하며 삭발하는 목사들(사진/ 연합 안정원)

“나는 어젯밤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라거나 “심장에 구멍이 난 사람을 내가 안수하고 기도했더니 수술하지 않고도 치료되었습니다”, 또는 “십일조 헌금을 드렸더니 사업이 번창하게 되었습니다”가 그 예이다. 심지어 “나는 천당에 갔다 왔습니다” 하는 식의 간증들이 한국 교회 강단에 흔한 이유는 청중이 그런 것에 열광적으로 반응한다는 데 있다. 그런 신앙 형태들이 설교 강단에서 반복적으로 강화되는 과정에서 신자들은 설교자가 “팥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아멘!”으로 받아들인다. 일종의 ‘종교적 세뇌’인데, 프로이드는 그것을 가리켜 ‘집단적 노이로제’ 현상으로 보았다. 이런 작업을 직업적으로 잘하는 사람들이 바로 사이비 교주들이다.

흉측한 체험의 확대재생산

한국 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는 분들의 체험 중에서 아주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가 공산주의에 대한 것이다. 신도 수 10만 명을 상회하며, 지난해 여름 세계감리교대회(WMC)가 열렸던 금란교회의 김홍도 목사는 설교 시간에 아래와 같이 술회한 적이 있다. “저희 형제자매들은 6·25 동란으로 피난을 다니면서 별별 고생을 다 했습니다. 보릿겨, 쌀겨도 먹고 술 찌끼미도 물에 풀어먹고 구호 물자, 밀가루, 옥수수 가루를 먹으며 연명해왔습니다. 좌우간 사업하는 것도 없고 직장도 없는데 아홉 식구가 죽지 않고 살았다는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해주셨던 것입니다.”(2006년 10월15일)

필자는 다른 분들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김 목사의 그런 체험에 나름의 진정성이 있다고 본다. 가족과 친지가 인민재판으로 잔인하게 처형되는 장면을 직접 몸으로 겪고, 북한 지역에서 기독교가 완전히 해체되는 현장을 목격한 사람들이 어떻게 북한 정권을 용서하고 신뢰할 수 있겠는가. 북한은 원수이며, 따라서 북한에 온정적인 세력은 모두 친북좌파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깊은 정신적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김 목사는 오늘도 이렇게 설교한다. “우리나라의 형편이 월남이 망할 때와 조금도 다름이 없습니다. 미군이 철수하면 남한도 틀림없이 적화통일되고 1천만 명 가까운 사람들이 대학살을 당하거나 보트피플이 되고 말 것입니다.”(2006년 10월22일)

이런 체험과 현실 인식은 반공학습을 통해 상당히 많은 사람들에게 오늘 이 시간까지 이어져왔으며, 때로는 확대재생산됐다. 흉측한 체험의 역사화이다. 말하자면 ‘예수천당, 불신지옥’ 패러다임이 개신교 신자들에게 구조화된 것처럼 반공주의도 구조화됐다는 말이다.


△ 한국 교회의 이념지향성은 지나간 험악한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지난해 영락교회에서 열린 사학수호 기도회의 모습(사진/ 한겨레 이종근 기자)

북한, 공산당, 좌파를 향한 이런 적개심은 ‘부흥사’류의 김 목사만이 아니라 프랑스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장로회신학대에서 교수를 하다가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교회 중 한 곳인 새문안교회에서 목회하는 이수영 목사의 설교에서도 그대로 표출된다. “공산주의는 역사상 가장 현저한 하나님의 반대자이고 적그리스도입니다. 그들의 이론 바탕 자체가 무신론이며,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가장 철저하게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고 그리스도인들을 말살했습니다.”(2004년 3월21일) “동양의 예루살렘 같았던 북한 땅에서 하나님을 부인하고 하나님의 교회들을 압살했으며, 그리스도인들을 박멸한 공산당과 그 수괴 김정일이 이 땅에까지 인공기 휘날리며 나타나는 것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2004년 9월12일)

정당 대변인을 뛰어넘는 정치 설교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총신대 교수를 거쳐 현재 대구동신교회의 담임 목사로 있으며, 평소에 기독교 영성에 깊이 천착하는 설교자로 이름이 난 권성수 목사도 북한 문제에서만은 설교자가 지녀야 할 평상심을 잃은 모습을 보였다. 그는 지난해 북한의 핵실험 이후 행한 설교에서 북한 정권을 깡패, 강도 집단으로 규정하면서 “김정일과의 평화 협정은 의미가 없다”고 하고, 자신은 북한 정권을 도와주는 금강산 여행을 안 간다면서, 남한 주민의 안보 불감증을 도덕적 해이와 연결시키고 있었다.(2006년 10월15일) 지금 ‘뉴라이트’ 운동을 솔선수범하는 김진홍 목사도 이런 부분에서 결코 뒤지지 않는다. 여당 국회의원 중에 주체 사상가들이 있다거나, 현 정권은 왼쪽으로 치우쳤으므로 2007년에 교체해야 한다는 발언(2005년 10월9일)은 그의 설교에서 흔하게 발견된다.

필자는 지금 설교자들의 정치 이념적 소견이 옳은가 그른가를 평가한 게 아니라, 설교가 성서 텍스트의 중심에서 벗어나 설교자의 주관적 신념이 설파되는 기회로 왜곡되고 있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은폐의 방식으로 담지하고 있는 생명의 비밀을 풀어내고 해명해야 할 설교 시간에, 정치학자들도 단정적으로 언급하기 힘든 이슈들을 칼로 두부 자르듯이 청중에게 강요하는 것은 설교가 아니라 선동이며, 성서 해석이 아니라 정치공학에 가깝다. 물론 삶과 역사에는 정치적으로 작동되는 영역이 크기 때문에 구약의 예언자들도 정치적인 발언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교회 강단에 넘쳐나는 정치 설교는 그것과 차원을 달리한다. 말꼬투리 잡기에 능한 정당 대변인이나 극단적인 이데올로그가 쏟아낼 만한 아래와 같은 진술들을 보라. “청와대를 비롯하여 정부 요직에 북한의 간첩과 친북 공산주의 주체사상을 찬양하는 빨갱이들이 차고 앉아서”(김홍도, 2006년 10월15일)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영웅으로 숭배하며 주체사상을 신봉, 선전하고 북한 체제를 찬양하며 학생운동을 주도하던 세력들이 지금 정부·여당, 정보 및 사정기관, 방송언론과 학교, 노동계와 문화계, 심지어는 군과 교회에까지 구석구석을 장악해가고 있습니다.”(이수영, 2004년 3월21일)

지난 시절의 트라우마에 시달리다

북한 정권에 대한 기독교의 체험이 아무리 고통스러웠다 하더라도 이제 전쟁이 끝난 지도 50년이 지났고, 공산주의 이념도 퇴색해버린 이 마당에 여전히 1960~70년대의 냉전적 사고방식으로 설교한다는 것은 우리 설교자들이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외면하고, 지나간 험악한 시절에 받은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방증한다. 임상치료가 필요한 대목이다. 그러나 필자는 한국 교회에 절망하지 않는다. 적개심과 분노가 가득한 설교보다는 드러나지 않지만 한민족의 평화와 상생을 지향하는 설교가 훨씬 많으리라 믿기 때문이다. 비록 지금은 그들의 목소리가 밤꾀꼬리 노래처럼 작다 하더라도 언젠가 천둥처럼 큰 함성으로 울려퍼지지 않겠는가!




 김규항의 글

교회 나가기

“그래도 주일날 교회에 안 나가면 괜히 마음이 불편하고 죄짓는 것 같고 그렇거든요.”
“괜찮아요. 그건 교회가 아닐 거예요.”

신앙 문제로 고민하는 대학생들과 대화하다 한 이야기. 교회에 대해 고민하기 전에 ‘교회인가?’부터 질문해보는 게 좋다.
교회라면 문제를 비판하고 고쳐나갈 수 있겠지만 교회가 아니라면 고민할 아무런 이유가 없으니 말이다.
늘 하는 말이지만, 대개의 한국교회는 교회가 아니라, 교회라 주장되는(여겨지는) 상점들이다.

-김규항



믿음  

믿음
설날 아침, 아이들과 아내는 늦잠을 자고 나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갔다. 신도가 육십 명 남짓인 교회는 보수교단에 속하지만 속을 뒤집지 않으면서 예배를 마칠 수 있는 교회다. 물론 그건 목사 덕이다. 목사는 지난해 초 신장암 3기 진달을 받았다. 그는 몇몇 병원을 전전하며 이런저런 치료를 받아 왔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그는 "열한시 예배엔 제 딸애가 참석해서 이런 이야기하기가 불편하다"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병원에선 좀 더 강한 항암치료를 해보자고 하지만 저는 더 이상의 병원치료는 의미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저도 사람이라 암 진단을 받고 처음엔 하루하루 죽음이 저를 조여들어오는 느낌을 견디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아주 평안합니다. 저에게 믿음이 없었다면 마음의 평안함을 지키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제가 할 일이 남아있다면 하느님이 낫게 해주실 테고 아니라 해도 저는 이미 하느님의 나라에 있습니다." 나는 그의 말이 공포와 불안을 없애기 위한 자기 위안이 아니라는 걸 그의 손에서 알 수 있었다. 예배를 마치고 악수를 나눌 때 상대를 위로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의 손이었다. 그의 말대로 그의 믿음이 그를 평안하게 한다. 기독교에서 믿음은 회개 후의 삶을 말한다. 대개의 한국교회에서 회개란 교회에 안 가가던 사람이 교회에 나가는 것이라 설명되지만, 성서적 의미에서 회개란 그런 게 아니다. 회개란 '지금까지의 삶의 방식을 뒤집고 새롭게 사는 것'이다. 돈이나 명예, 이런저런 세속적인 욕망에 찌들어 살던 사람이 전혀 다른 것을 좇게 되는 것, '하느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인간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 이 회개다. 그리고 그 상태를 기쁜 마음으로 지속하는 게 믿음이다. 믿음을 가진 사람은 여느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기에 세속적인 고난에도 절망할 이유가 없고 심지어 죽음마저 이겨내게 된다. 회개하고 믿음을 가진 사람을 일컬어 구원을 얻었다, 영원한 목숨을 얻었다고 하는 건 바로 그래서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진정한 목숨이 뭔지 설명했다. 예수는 믿음을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한다고 말하고는 곧이어 사람이 온천하를 얻어도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냐고 말한다.(마가 8:34~8) 얼핏 앞뒤가 안 맞는 그 말을 통해 예수는 진정한 목숨이 무엇인가를 알려준다. 진정한 목숨은 육체의 목숨이 아니다. 설사 수백 번 부활한다 해도 세포덩어리로서 육체는 결국 늙고 병들어 죽게 된다. 육체의 목숨에 집착하면 그는 육체의 죽음과 함께 영원히 죽게 된다. 그러나 진정한 목숨을 좇는다면 육체가 죽은 이후에도 그는 (단지 기억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소통하며 시간을 초월하여 영원히 산다. 예수의 육체는 이천년 전에 개처럼 달려 죽었지만 예수는 그를 닮아가려는 사람들 속에서 살아있는 누구보다 더 생생히 살아있다. 그들은 예수에게 모든 것을 말하며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이며 그의 한마디에 힘을 얻는다. 믿음과 영원한 삶은 교회 체제 안에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전태일처럼, 육체는 죽었지만 여전히 우리와 소통하는 정신들에서 보듯, 신념의 가장 높은 형태는 믿음과 다를 바 없다.

-김규항



교회는...  

더 근본적으로, 교회가 세상에 기여하는 일은 과연 어떤 것이어야 할까. - 강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