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ㅗ

최정화, 쇼핑을 즐기듯 미술을 즐겨라

로드365 2006. 9. 15. 20:04


쇼핑을 즐기듯 미술을 즐겨라
입력: 2006년 09월 05일 17:57:15
태국에서 주문제작한 플라스틱바구니 설치 후의 모습.
한때 이승복과 유관순,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이 전국의 초등학교 교정을 점령했던 시절이 있었다. 반공이데올로기와 군사시대의 억압적인 문화산물인 이들 위인의 동상은 세월이 바뀌면서 차츰 사라졌다. 사라진 동상들이 서울 광화문 네거리 일민미술관 앞에 나타났다. 모든 것이 질서정연한 거리에 이렇다 할 포장도 없이 금칠을 한 동상이 놓인 풍경은 생뚱맞기까지하다.

-금칠한 이승복동상 광화문에-

유리로 마감된 미술관 한쪽 벽면 1층에는 말린 나뭇잎이, 2·3층에는 알록달록한 조형물이 설치돼 있다. ‘뭘까’하는 호기심이 든다. 언뜻 보기에 대단히 ‘있어보이는’ 이 거대한 조형물의 실체는 형형색색의 바구니였다. 미술관 내부에는 시장과 거리에서 수집해온 오만가지 잡동사니와 미술품이 뒤엉켜 있고 전시실 벽면은 형광분홍·진보라 등 원색으로 도색돼 있다.

뇌리에 가장 먼저 ‘키치’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이렇게 도발적인 발상과 조악한 물품들을 미술관 안팎으로 끌어올 자는 우리나라 ‘키치미술’의 선구자 최정화씨밖에 없다. 1990년대 초 가슴시각개발연구소를 설립하면서 설치미술뿐 아니라 인테리어 디자인·무대미술·영화미술 등 다방면에서 활동해온 최씨는 늘 미술에 대한 거리감을 파기하는 데 애써왔다.

백화점처럼 미술품과 상품을 뒤섞어 진열한 1층 전시실의 모습.
이번에도 최씨는 자신이 기획·연출한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전을 통해 미술관·전시회라는 통로를 마음껏 이용하고 조롱하기로 작정한 것 같다. 중앙미술대전을 통해 정식으로 화단에 데뷔한 지 20년 만에 미술관에서 처음 여는 전시회에 최씨는 자신의 작품 대신 미술품인지 상품인지, 버리는 물건인지 모를 물품들로 미술관을 가득 채웠다. 전통적인 개념의 작가들이 만든 회화나 사진도 있지만, 최씨가 시장에서 수집해온 물건들도 많다.

또 일반인이나 미대생들이 만든 작품도 있다. 30여명이 참여했는데 작품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 태국에서 주문제작해 유리 벽면에 설치한 플라스틱 바구니만 해도 3만개가 넘는다.

전시 방식 역시 기존의 미술관 전시와는 다르다. 1층에는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정도로 독일 마이센 자기 인형과 주워온 인형, 옹기, 석고상 등 현대를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사물들을 빽빽하게 배치했다. 2층은 온갖 재료로 덧씌운 의자와 탁자, 옷과 쌈지마켓에서 파는 작품들이 즐비하다.

3층에는 마음대로 던지며 노는 자석놀이터가 마련돼 있다. 조악하고 싸구려 냄새가 나는 물품만 있는 것은 아니다. 미국의 유명한 미니멀리즘 미술가 도널드 저드와 댄 플래빈, 배병우의 작품도 공존한다.

-전시작품들 즉석에서 판매-

형형색색의 바구니 앞에선 최정화.
한마디로 백화점식 진열방식이라고 해야 할까. 박물관·미술관과 백화점은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 최씨의 생각이다. 쇼핑을 즐기듯 미술을 즐기고 문턱 높은 미술관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자는 취지로 작품과 상품을 섞어서 배치했다. 시장을 가장 좋아한다는 최씨는 이번 전시회에 나온 작품들을 팔기로 했다. 통상 미술관은 미술품 거래를 하지 않는 것이 불문이며 가격을 묻지 않는 것이 교양처럼 되어버린 미술계에 대한 통쾌한 비틀기다.

연출가 최씨는 누구의 작품인지, 어느 나라 것인지 애써 알려고 할 필요도 없다고 말했다. “미술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 전시에는 설명도 안내문도 없습니다. 당신의 마음이 곧 당신의 예술입니다.”

미술에 대한 부담감은 모두 내려놓고 백화점을, 쇼핑몰을 돌듯 즐거운 마음으로 돌아보라. 이것이 연출가 최정화씨가 권하는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전을 관람하는 제1수칙이다. 10월15일까지. 어른 3,000원, 어린이 2,000원. (02)2020-2055

〈윤민용기자 vista@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