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ㅏ

남종영, 카트라이더와 마르크스의 공존

로드365 2007. 1. 7. 14:34
[한겨레] ‘구 운동권’ 남종영 기자, 10년만에 대학 동아리로 돌아가다
거대사상에 휘둘리지 않는 솔직한 후배들에게서 찾은 학생운동의 희망

▣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 사진 박승화 기자 eyeshoot@hani.co.kr

나는 학생 ‘대중운동’의 끝세대다. ‘구국의 강철대오’ 전대협을 계승한 ‘생활 학문 투쟁의 공동체’ 한총련 2기인 민중진군 14년, 그러니까 1994년에 대학에 들어간 94학번이다. 고등학교 때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를 다 읽고 온 나는, 곧바로 ‘현대사연구회’라는 동아리에 들었고, 1995년에 회장을 했다.

김회장은 왜 꺼이꺼이 울었나

그리고 10년 만에 이곳에 돌아왔다. 9월부터 한달여 동안 아이들과 함께 동아리 활동을 하기로 한 것이다.

학교 다닐 적 학생회관 로비에는 자주 향냄새가 피어올랐다. 4월에는 김세진·이재호 열사, 5월에는 광주 영령, 6월에는 이한열 열사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대학 시절 내가 좋아하는 노래는 <열사가 전사에게>였다. 우리 동아리 주제가이기도 했다.

‘꽃 무더기 뿌려놓은 동지의 길을 피 비린 전사의 못 다한 길을/ 내 다시 살아온대도 이 길 가리라/ …/ 동지여 그대가 보낸 하루가 내가 그토록 살고 싶었던 내일/ 동지여 그대가 보낸 오늘 하루가 내가 그토록 투쟁하고 싶었던 내일….’

우리 동아리는 이 노래를 ‘열사가 현사(현대사연구회의 준말)에게’라고 바꿔 불렀다. 그 동아리를, 2005년 9월1일 그러니까 사회인이 되어 돌아가는 길이었다. 학생회관에서는 향냄새가 나지 않았고, 리모델링한 학생식당의 페인트 냄새만 진동했다.

학생회관 5층, 문을 열고 간 동아리방에서는 05학번 문동휘가 카트라이더를 하고 있었다. 동아리에 뛰어든 세상을 하기 전에 98학번 김재경이 새겨준 충고가 생각났다. “형, 동아리 생활하려면 세 가지를 알아야 돼요. 알아요? 첫째는 카트라이더, 둘째는 프라이드, 셋째는 동아리방 자물쇠 비밀번호야.” 프라이드는, 물어보니 격투기였다. 그건 그렇고 동아리에는 카트라이더 소모임도 있었다. 우리 때는 우주회(비 오는 날 술 먹는 모임)가 있었는데.

회장 김신한(04학번)은 뒤늦게 동아리방에 들어와 머리를 싸매고 끙끙 앓기 시작했다. 내일이 개강총회인데, 2학기 세미나 커리(커리큘럼)가 아직 잡히지 않았다고 말했다. 연구사회부장이 “회원들의 의견을 들어 하고 싶은 주제의 세미나를 하자”고는 했는데, 아직 커리큘럼이 결정이 되지 않아 뭘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아, 이놈들이. 내일이 개강총회인데, 아직도 그걸 안 정해놓고 있어!

회장 김신한은 지난 4월 장애인 관련 집회에 갔다가 남부 경찰서에 연행된, 별을 단 운동권이다. 마포대교를 건너다가 경찰이 휠체어를 탄 장애인을 때리는 걸 보고 달려가 무전기 두대를 탈취해 한강에 던져버렸다고 했다. 뭐, 몇 시간 안 돼 훈방되기는 했지만, 나는 선배답게 “감방 갔다 와서 무얼 느꼈느냐”고 진지하게 물었다. 그는 “국가 앞에 내가 이렇게 미약한 존재인 줄 몰랐다”고 말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장애인 집회를 하니까 세상이 변하지 않았느냐. 저상버스도 생겼고, 지하철에 엘리베이터 공사가 한창이다. 다 우리들이 투쟁해서 이뤄낸 성과 아니겠느냐”고 침을 튀겼다.

그러던 김 회장이 9월14일 밤 꺼이꺼이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동아리에 뛰어든 지 2주일여 만에 세미나 발제를 맡은 날이었다. 1학기가 지나도록 아직 마르크스주의에 관한 세미나를 하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내가 마르크스 원전인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를 중심으로 한 철학 세미나를 소집했던 것이다.

회사 일을 서둘러 마치고 저녁 6시30분에 동아리방에 올라왔는데, 그런데, 아무도 없었다. 곧 오겠거니 했는데, 7시가 되어도 혼자였다. ‘나가리’(무산됐다는 일본어로 대학에선 이 용어가 자주 쓰였다.)였다. 7시30분이 돼서야, 동아리연합회 회의를 마친 김 회장이 들어왔다. 휑한 풍경에 김 회장은 크게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대중조직과 정치조직 사이의 논쟁

“형! 이거 죄송해서 어떡해요.” 선배 온다고 이곳저곳 따로 연락까지 했는데, 약속을 지키지 않은 후배들이 서운했기 때문이다. 나는 ‘예전의 관행에 따라’ 위로를 해주려 호프집에 데려갔는데 김 회장은 되레 “20년이 된 동아리가 내 능력 부족 때문에 망하게 생겼다”며 꺼이꺼이 울었다.

우리 동아리는 그러니까 거의 20년이 다 된 사회과학 동아리다. 공식적인 창립연도가 1988년이니, 언더 서클기까지 합치면 얼추 20년이 된다고 할 수 있다. 동아리에는 1980년대로부터 면면이 이어져오는 투사들과 투쟁담이 있었다. 그 선배들은 일년에 한번씩 있는 동아리 창립제에 나와 전설 같은 투쟁담을 풀어놓았다.


회장에게는 그 화려한 역사의 무게가 무거웠다. 그런데 당장에 거리로 나가 가열차게 투쟁해도 시원치 않을 판국에 세미나 나가리라니. 게다가 10년 위의 선배가 친히 발제한 세미나인데.

회장이 더욱 힘들어했던 것은 대중조직과 정치조직 사이의 해묵은 논쟁이었다. 동아리는 사회과학 공부를 위해 모인 순수한 모임인데, 특정 정치사상의 실현을 위해 모인 정치조직과 어떻게 관계를 설정하느냐의 문제였다. 동아리에는 고학번을 중심으로 정치조직 구성원이 으레 있기 마련이었고, 고학번들은 후배들을 이 활동에 끌어들이려고 했다.

마르크스는 금단의 비밀이 아니었으니…

그러니까 문제는 9월6일 개강총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구사회부장을 맡은 99학번 허재현이 이날 “동아리가 조직적으로 ‘중앙대 반전위원회’에 참여하자”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굳이 동아리 단독으로 반전집회에 참가해도 되는데 굳이 반전위원회에 참여해 ‘다함께’의 하부조직처럼 비쳐질 필요가 있느냐?”는 반론이 나와 결정은 보류됐다. 며칠 뒤 회장은 1학년 후배들의 의견을 묻고, 다함께쪽에 불참을 통보했다.

그런데 이 사실을 가지고 김 회장과 허재현이 동아리 홈페이지에서 논쟁을 벌였다. 허재현은 “회장의 독단적인 결정이 아니냐”고 했고, 김 회장은 “이 정도는 회장의 권한이다. 형은 연사부장의 역할이나 충실히 해달라”고 맞받아쳤다. 정치조직으로부터 대중조직을 ‘사수’하겠다고 회장이 강경하게 ‘의지’를 표현한 셈이었다.

10년 만에 동아리에 왔다가 이 문제에 얽힌 나는 난감해졌다. 똑같은 문제가 10년 동안이나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다니. 나는 두 후배에게 “볼썽사납다. 조용히 해라”고 말했다.

며칠 뒤 1999년 총학생회 선거운동을 함께 뛰었던 문과대의 배병국(93학번) 선배에게 대체 중앙대의 운동판이 어떻게 굴러가느냐고 전화해 물었다. 한국 학생운동의 그 복잡다기한 정파와 계파의 순서도를 무협지처럼 말할 줄 알던, 내 주변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당시에 학교마다 그런 사람이 한두명 있었다). “야! 너 바보 아니야? 학생운동 망한 지가 얼마나 오래됐는데, 무슨 취재냐? 너희 동아리? 다함께에 넘어간 지 오래됐어.”

동아리가 정치조직에 접수됐다는 표현, 이 말을 듣자 난 정말 과거로 회귀한 듯했다. 그랬다. 1999년엔가에는, 중앙대의 한 정치조직은 방을 얻기 위해서 동아리를 만들 정도였으니까. 고질적인 문제였다. 대중조직에서 활동하는 정치조직 구성원 혹은 학생운동 활동가가 과연 어디까지 활동할 수 있느냐는.

실상 과거엔 나도 자유롭지 않았다. 나도 정치조직 비스무레한 조직을 몇몇 사람들과 만들고, 후배들을 데려와 세미나를 시키고 ‘라인’을 만들려 했으니까. 노동과 자본은 서로 ‘서로소’라는 지금 보면 유치찬란한 이름의 조직이었다. 그때 나도 동아리 후배들에게 똑같은 말을 들었다. 형은 왜 동아리에 신경 안 쓰면서, 그딴 정치적 이야기만 늘어놓느냐고. 지금 보니 후배들은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너나 잘하세요!”

10월11일 내 고집으로 시작했던 마르크스주의 세미나를 마쳤다. 사실 그새 두번이나 나가리가 난 뒤였다. 사회는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양질전화’하고, 역사는 계급투쟁으로 발전한다는 마르크스주의는 나에겐 그야말로 충격이었지만, 지금의 동아리 후배들은 그렇지 않았다. 관심 있는 아이들은 이미 찾아 읽었고, 관심 없는 아이들은 그러려니 했다. 그럴 수밖에. 05학번 박정빈은 고등학교 때부터 <인물과 사상>을 읽었고, 박노자의 글을 좋아한다. 김 회장은 방대한 독서 편력으로 ‘무정부주의자’를 자처하고, ‘자율주의자’라는 친구(이 후배는 3층의 바둑 동아리 회장으로 안토니오 네그리에 심취해 있었다. 아는가? 안토니오 네그리?)도 있으니 말이다. 마르크스주의가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처럼 숨겨진 책도 아닌데, 무슨 금단의 비밀을 알려줄 것처럼 세미나를 준비했으니.

예전에는 선배가 정치조직에 들었으면, 후배들도 따라 들었다. 그리고 운동의 ‘라인’이 형성됐다. 그게 정파였다. 하지만 지금의 신운동권들은 그렇지 않다. 스스로 고민하고 찾아가고 성찰하면서 운동권이 된다.

‘카트라이더 소모임 회장’인 문동휘는 얼마 전에 다함께를 탈퇴했다. 그는 ‘회의’라는 제목으로 동아리 홈페이지에 탈퇴의 변을 올렸다.

어느 후배의 ‘다함께’탈퇴 사연

“저는 사회주의자가 아닙니다. 저는 제가 좌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꼼과 정치조직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깨달은 적이 많이 있습니다. 다함께는 사회주의라는 색깔이 분명한 정치조직입니다. 그러나 비꼼은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한 동아리입니다. 저는 사회주의 그 자체에 대하여 의문을 던지고 탐구하는 것을 원하지, 사회주의를 어떡해야지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에 대하여 토론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함께에서 활동하는 고학번 후배들도 문동휘가 내린 ‘어려운 결정’을 축하해주었다. 문동휘는 동아리에서 카트라이더를 하면서 술도 먹고 마르크스도 공부하고 반전집회도 나갈 것이다. 2005년의 후배들은 거대한 사상에 몸을 위탁하기보다는 솔직하게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구 운동권의 사상과 방식을 가지고 동아리에 뛰어든 한달여, 몰락한 줄만 알았던 학생운동의 희망도 여기저기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가투 안 나가도 동아리 생활

기자가 뛰어든 동아리 ‘현대사연구회 비꼼’의 변화상

기자가 뛰어든 동아리의 전신은 ‘4·3연구회’다. 4·3연구회는 1991년 ‘현대사연구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8년 다시 ‘현대사연구회 비꼼’으로 바꿨다.

이러한 명칭은 학생운동의 변화와 궤를 같이한다. 동아리 창립멤버인 진상우(86학번·전 민주노동당 노원을 지구당 위원장)씨는 동아리 창립 과정을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

“1987~88년에는 대학사회에서 분단 공간(1945~53년)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어. 북침이나 남침유도설 같은 게 공론화됐고 <조선공산주의운동사>와 같은 책이 유행하기도 했지. 그러던 중 4·3 문제가 불거졌어. 제주도 향우회의 운동권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조명 작업이 일어났지.”

이러한 흐름에서 제주 출신 85~87학번 4~5명은 교문 앞에 있던 가건물의 빈 방을 ‘무단 점거’해 4·3연구회를 결성한다. 당시 동아리의 주요 활동은 감춰진 분단 공간의 역사를 연구하고 학생대중에게 폭로하는 일이었다. 4·3연구회는 1988년 대학사회에서는 처음으로 공개적인 ‘해방 전후사 토론회’를 열었고, 이어 <화산도>로 유명한 재일동포 시인 김석범씨를 초청해 4·3 강연회를 열었다. 이런 대중적인 학술행사는 매회 200~300명이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뤘지만, 공안기관도 번득이는 감시의 끈을 놓지 않았다.

4·3연구회는 1991년 현대사연구회로 전환한다. 제주도의 지역적 폐쇄성을 벗어나고 연구주제를 전체 현대사로 확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1991년 강경대 열사 투쟁을 거친 뒤, 1993년 한총련 출범 등으로 이어진 1990년대에 공안기관의 감시는 점차 헐거워졌고, 동아리도 안정화의 길을 걸었다.

‘동아리 회원=운동권’이라는 등식도 해체됐다. 거리투쟁이나 학내집회에 나가지 않아도 자유롭게 동아리 생활을 할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됐다. 세미나 주제도 한국 현대사에서 네오마르크스주의, 문화이론, 포스트모더니즘 등으로 다양해졌다. 이런 경향은 구좌파의 문제의식에서 탈피해 신좌파의 문제의식도 적극적으로 수렴하자는 흐름으로 이어졌다. 1998년 동아리는 ‘코뮌’과 같은 공동체를 일구자며 ‘현대사연구회 비꼼(Be commune)’으로 이름을 바꾼다.

동아리 출신 학생들은 1990년대 초반까지 현장으로 들어간 경우가 많았다. 지금도 이 세대들은 민주노동당이나 대기업 노조 등에서 활동하고 있다. 1990년 중반부터 현장 진출의 흐름은 끊기고 이 세대 졸업생 대다수는 사무직 노동자이거나 언론사나 출판사 등에서 일하고 있다.



사회과학 세미나 사라졌다

달라진 학생운동 문화와 풍경… 동아리 집단 일기장은 싸이월드로

기억하는가. 예전에는 과방이나 동아리방마다 각기의 이름을 가진 노트가 있었다. 주로 ‘날적이’라고 불렸던 이 집단 일기장은 현대사연구회 비꼼에서는 ‘삶터’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삶터에는 1980년대 학생운동의 ‘무림세계’, 1990년대의 발랄한 문화운동의 체취가 살아 있다. 삶터는 동아리에서 2000년쯤 60권을 채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인터넷 삶터가 생겼기 때문이다. 2005년의 인터넷 삶터는 싸이월드에 있다. 예전에는 네띠앙에 있었는데, 웹마스터의 관리가 소홀해지는 틈을 타 폐쇄됐다. 이로 인해 약 2년간의 동아리 역사는 사라졌다.

‘정치경제학 → 변증법적 유물론 → 역사적 유물론’으로 이어지는 사회과학 기초교양 세미나는 2005년 대중조직에서 거의 사라졌다. 1학기 때 비꼼 후배들은 박노자의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함께 읽었고, 진중권씨나 홍세화씨, 권영길씨 등 진보적 대중인사의 강연회를 찾아다녔다.

물론 집회도 나갔다. 거리투쟁에 대한 거부감은 1990년대의 학생들보다 적다고 할 수 있다. 예전의 학생들이 1학년 때 최초의 거리투쟁을 일종의 ‘껍데기를 벗는 행위’라고 생각했다면, 요즈음 세대들은 사회의 의사결정이 이뤄지는 제도적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사연구회 비꼼도 올해 적게는 2~3명에서 많게는 10명까지 반전·노동·장애인 등의 집회에 수차례 나갔다. 김신한 회장은 “메이데이 집회 때 8~9명의 선후배들이 참석했다”고 말했다. 실제 동아리에서 활동하는 인원이 15~20명 정도 되는 걸 볼 때, 많은 인원이다.

매년 봄이면 한총련 출범식에 나가 전국의 대학생을 만나던 전통은 사라졌다. 1995년만 해도 한총련을 비판하는 입장의 좌파(PD) 계열의 학생회·동아리도 3만~4만명이 운집하는 출범식에 참석했지만, 2005년에 “나는 한총련 구성원”이라는 생각을 가진 이는 NL 운동권 말고는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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