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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서린 비글로우, 헐리우드의 독종 여전사, 목숨을 걸고 최대한!

로드365 2013. 5. 21. 01:09



Contents

1 소개
2 상받은 실적
2.1 캐서린 비글로우의 작품들


1 소개 

Kathryn Bigelow (1951-)
미국의 여성 영화감독 

캘리포니아 출신으로 컬럼비아 대학 예술대학원에서 영화이론과 비평을 배웠다. 이후 1978년, 단편영화 "The set-up"으로 감독으로 데뷔했다.
1989년 제임스 카메론과 결혼했지만 1991년 이혼했고, 이후 스트레인지 데이즈,K-19등의 영화를 연출했다.
카메론과 이혼했지만 시상식 장에서 보이는 모습을 볼 때 사이는 좋은 듯. (실제로 같이 살기 힘들어서 이혼했을 뿐, 서로 우호적인 관계이라고 한다.)
2008년, 허트 로커를 감독했는데, 201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전남편 카메론을 제치고 감독상,작품상 등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특히 여성 감독이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것은 사상 최초라서 불멸의 기록을 남긴 셈.
SF,액션,호러,밀리터리등 다양한 장르의 영화들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하다. 왠지 그녀가 감독한 K-19이나 허트 로커같은 작품들을 살펴보면 선이 굵은 영화들이라는 특징이 있다. 역시 강단있는 여성이라서 일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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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감독으로서는 드물게 파워풀한 액션장면에 능하고, 뛰어난 영상 감각을 지니고 있지만, 강렬한 비주얼에 비해 드라마는 허약하다는 비판도 줄곧 받아왔다. 북부 캘리포니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비글로는 샌프란시스코 아트인스티튜트에서 회화를, 컬럼비아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했다. 88년 현대판 뱀파이어 영화 <죽음의 키스 Near Dark>의 연출을 맡아 감독 데뷔했다. 비글로에게 컬트팬까지 안겨준 이 데뷔작은, 어설프지만 각종 장르를 자유분방하게 뒤섞은 상상력이 일품이었다. 두번째 작품인 <블루 스틸 Blue Steel>(1990)은 제이미 리 커티스를 경찰관으로 내세운 이색 스릴러로, 권총의 총신이 지닌 검푸른 빛을 매혹적으로 포착했다.

제임스 카메론과 결혼한 뒤에 카메론 제작총지휘로 내놓은 <폭풍 속으로 Point Break> (1991)는 남성버디영화로, 강렬하고 스피디한 액션장면이 돋보였다. 범죄자인 패트릭 스웨이지와 형사 키아누 리브스의 신분을 뛰어넘은 우정은 오우삼의 <첩혈쌍웅>을 연상시키는 이례적 설정이었다. 95년의 <스트레인지 데이즈 Strange Days>는 악몽처럼 변해버린 1999년의 LA를 무대로 한 SF. 비교적 많은 제작비를 들인 이 영화는 <블루 스틸>의 비주얼과 <폭풍 속으로>의 스피드를 결합하려는 시도였지만, 드라마의 빈곤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해, 비평적 점수는 낮은 편이었다. [씨네21 영화감독사전]



[캐스린 비글로] 지칠 줄 모르는 액션본능

글 : 김도훈 | 2010-03-04 Share it       |    


<허트 로커>의 캐스린 비글로 감독


캐스린 비글로는 오랜만에 역작을, 아니 일생일대의 걸작을 만들었다. 그러나 죄송하게도 제임스 카메론 이야기를 먼저 좀 하고 넘어가야겠다. 캐스린 비글로는 1989년부터 91년까지 제임스 카메론의 두 번째 부인이었다. 그의 첫 번째 부인은 <터미네이터> <에이리언2> 등의 블록버스터를 제작한 80년대의 거물 제작자 게일 앤 허드, 세 번째 부인은 카메론이 창조한 여전사 린다 해밀턴이다. 이쯤되면 카메론이 여전사 혹은 여장부에 끌리는 타입 혹은 현실에서도 리플리와 살고 싶어 하는 남자라고 유추할 수 있겠다. 한편 린다 해밀턴은 이렇게 말했다. “카메론은 결혼을 해서는 안되는 남자다. 그는 결혼생활이라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카메론과 비글로는 여전히 돈독한 우정을 나누는 친구다. 이혼 5년 뒤에 카메론은 비글로의 <스트레인지 데이즈>의 각본을 쓰고 제작에 참여한 적도 있다. 그러나 카메론은 비글로가 일생의 걸작을 들고 자신의 오스카를 노릴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을 거다. 이번 오스카를 한마디로 말하자면 전남편과 전부인의 결투다. 태평양 건너에서 쏟아져 나오는 오스카 예측 기사들을 구글로 검색해보시라. 심지어 이런 제목의 기사도 있다. 전부인의 역습.


58살이지만 난 죽지 않았어


캐스린 비글로는 드문 여성감독이다. 남자(특히 에고가 좀 심하게 강한 마초)로 가득한 할리우드에도 썩 괜찮은 여성감독들은 있다. 낸시 마이어스와 페니 마셜, 그리고 소피아 코폴라. 비글로는 이들과 다르다. 비글로는 장르영화 감독이다. 그것도 액션영화 감독이다. 그녀는 서부극과 뱀파이어 장르를 마구 엮어낸 <죽음의 키스>(1988)로 데뷔한 이후 제이미 리 커티스를 여전사로 만든 <블루 스틸>(1990)과 (지금도 한국 남자들이 일생일대의 액션영화 중 하나로 손꼽아 마지않는) <폭풍 속으로>(1991)를 만들었다. 그 영화들은 아드레날린을 펌프질하는 액션영화를 여성감독도 너끈히 만들 수 있다는 드문 증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글로는 끊임없이 자신의 성별을 영화적 능력과 연결하려는 영화계 안팎의 저항에 맞서야 했다. “여성감독에 대한 어떤 저항이 존재한다면 나는 두 이유로 그걸 무시하겠다. 첫째, 내 성별을 바꿀 수는 없다. 둘째, 절대로 영화 만들기를 멈출 생각이 없다. 누가 왜 영화를 만드는가를 따지는 건 당치도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여자가 영화를 감독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모를 뿐이다. 그건, 가능하다.”


비글로의 경력은 카메론이 참여한 사이버펑크 SF스릴러 <스트레인지 데이즈>의 실패와 1억달러를 들인 잠수함 블록버스터 <K-19>(2002)의 실패로 종말을 맞이하는 듯했다. 두 영화로 지나치게 큰돈을 잃었다. 할리우드의 공공연한 비밀 중 하나는, 여성감독의 실패에 구원은 없다는 거다. 일레인 메이는 워런 비티, 더스틴 호프먼, 이자벨 아자니가 출연한 당대의 블록버스터 <사막 탈출>을 연출했다가 비평과 흥행에서 재난을 맞이한 뒤 영화계에서 종적을 감췄고, <딥 임팩트>의 미미 레더 역시 <아름다운 세상을 위하여>의 실패 이후 TV계로 강등당했다. 그런데 비글로의 실패작들이 그렇게 끔찍했나? 꼭 그렇지는 않다. <K-19>이 할리우드 역사상 최악의 흥행 실패작 중 하나이긴 하지만 감독의 경력을 7년이나 멈춰세울 졸작은 아니었다(그렇다면 <컷스로트 아일랜드>를 만든 레니 할린은 영원히 메가폰을 압수당해야 옳지 않은가). 적어도 비글로는 재미있는 잠수함 영화를 만들었다. 볼프강 페터슨의 <특전 U보트>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조너선 모스토의 <U-571>과는 충분히 겨룰 만하지 않은가 말이다. 어쨌거나 <K-19> 이후 7년간 영화를 만들지 못한 비글로가 무명 배우들을 데리고 이라크가 무대인 저예산(제작비 1100만달러) 액션영화를 만든다는 소문이 들렸을 때 진정으로 귀를 기울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모두가 틀렸다. 캐스린 비글로는 자신의 최대 걸작이자 이라크전을 다룬 가장 훌륭한 상업영화를 만들어냈다.


가장 비글로스러운, 가장 예술적인


<허트 로커>는 이라크 참전 중인 미군 폭탄제거팀의 이야기다. 폭탄제거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주인공인 윌리엄 하사(제레미 레너)를 중심으로, 영화는 이라크의 현재와 파병 군인들의 정신상태를 집요하게 파고든다. 그런데 <허트 로커>가 오스카 최우수작품상 후보로 오르리라 예견한 사람은, 적어도 2008년 베니스영화제에서 첫 공개될 당시에는 없었다. 그건 <허트 로커>가 작정하고 이라크전의 치부를 파헤치고 전쟁의 참상을 애도하기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 그저 재미있으라고 만든, 끝내주는 장르영화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를 두고 비글로가 갑자기 심적으로 성숙한 감독이 됐다고 말하는 건 옳지 않다. 비글로는 여전히 비글로다. 그녀는 그냥 아드레날린이 솟구치고 손바닥에서 땀이 샘물처럼 솟아나고 좌심실, 우심실이 박동하는 비글로식 액션영화를 만들었다.


주인공인 윌리엄은 자신의 직업에 회의를 느끼거나 한명의 생명을 구하는 데 목숨을 느끼는 타입도 아니다. 그는 그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직업이 주는 스릴 자체에 중독된 남자다. 바로 거기서 <허트 로커>는 지금껏 만들어진 다른 이라크전 영화들보다 훨씬 뻔뻔하게 정직해진다. 비글로는 말한다. “솔직히 까고 말해보자. 전쟁의 더러운 비밀 중 하나가 뭔지 아나? 어떤 남자들은 전쟁 자체를 정말로 사랑하고 즐긴다는 거다. 나는 그걸 바라보고 해독하고 싶었다. 21세기 전투의 컨텍스트에서 영웅이 된다는 게 대체 어떤 의미인지를 말이다.” <허트 로커>는 순수한 장르영화가 정말 순수한 경지에 이르면 작가영화가 될 수 있다는 명쾌한 증거처럼 보인다. 마치 두기봉의 영화처럼.


누군가는 물을 거다. 혹시 캐스린 비글로가 너무 늦은 나이에 새로운 전성기를 되찾은 건 아니냐고. 시나리오작가 마크 볼의 증언을 들어보자. “요르단 사막의 촬영현장에는 마초 사내들이 엄청 많았다. 영국 SAS 특수부대 출신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르단의 사막에서는 모두가 나가떨어졌다. 나는 사막의 언덕을 차로 올라가고 있었다. 미치지 않고서야 걸어 올라갈 생각은 없었다. 자동차로 언덕을 오르는데 길 한쪽에서 스탭 한명이 토하고 있었다. 모든 스탭들이 언덕을 오르며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자동차로 꼭대기에 올라갔더니 비글로가 제일 먼저 도착해 있었다. 걸어서 말이다. 그녀는 모든 마초 사내들을 완전히 제쳤다.” 주연배우 제레미 레너도 증언한다. “나는 젊고 몸도 건강하다. 그런데도 사막에서는 완전히 기력이 떨어졌다. 그런 상황에서 비글로는 낙타에게 사과를 먹이면서 고등학생 소녀처럼 사막을 막 뛰어다녔다.” 캐스린 비글로는 58살이다. 일생일대의 역작을 만들었다. 어쩌면 오스카를 전남편의 손에서 앗아갈지도 모른다. 더 중요한 사실이 하나 있다. 그녀는 여전히 아드레날린을 뿜어내는 액션영화 만들기의 스릴에 중독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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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트 로커>에 이르기까지 감독 캐스린 비글로의 여섯 가지 사건


1. 뱀파이어 장르를 현대적으로 뒤범벅한 1987년작 <니어 다크>(Near Dark)를 감독. 초보 감독다운 연출에도 불구하고 컬트적인 인기를 서서히 불려나가기 시작. 비글로는 마침내 할리우드 제작자들의 부름을 받음.


2. 1989년 <어비스>를 찍고 있던 제임스 카메론과 결혼. 제이미 리 커티스 주연의 액션영화 <블루 스틸>(1990)을 감독해 특히 페미니즘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아냄. 사진은 젊은 카메론과 비글로.


3. 제임스 카메론이 제작자로 참여한 액션영화 <폭풍 속으로>(1991)로 커리어 사상 최대의 성공을 거둠. 그러나 제임스 카메론과는 이혼. 어쨌거나 <폭풍 속으로>는 <허트 로커> 이전까지 캐스린 비글로의 대표작으로 남음.


4. 전남편 제임스 카메론이 시나리오를 쓰고 제작에 참여한 사이버펑크 스릴러 <스트레인지 데이즈>(1995)가 비평과 흥행에서 큰 실패를 거둠. 4200만달러를 들여 800만달러를 벌어들인 이 영화는 카메론이 제작한 영화 중 가장 손실이 큰 영화로 기록됨. 영원히 그럴 가능성도 있음.


5. 5년 만에 규모가 작은 스릴러영화 <웨이트 오브 워터>(2000)를 감독하며 복귀. 숀 펜과 엘리자베스 헐리가 출연한 영화에서 캐스린 비글로는 여전히 섬세한 감정을 묘사하는 데 큰 소질이 없다는 걸 증명.


6. 1억달러 예산의 잠수함 블록버스터 <K-19>를 2002년에 연출. 박스오피스에서 겨우 3500만달러를 벌어들이며 장렬하게 침몰. 이 영화 이후 비글로가 감독직에 복귀하기까지 무려 7년의 세월이 소요됨.


2 수상경력 

2009년에 허트 로커로 뉴욕 비평가협회에서 감독상을 받았다. 2009년 뉴욕비평가협회시상식 결과
2012년엔 제로 다크 서티로 감독상을 받았다. 2012년 뉴욕비평가협회시상식 결과


2.1 캐서린 비글로우의 작품들 

  • 러브리스(1983)
  • 니어 다크(1989, 국내명: 죽음의 키스)
  • 블루 스틸(1990)
  • 폭풍속으로(포인트 브레이크)(1991)
  • 스트레인지 데이즈(1995)
  • 웨이트 오브 워터(2000)
  • K-19(2002)
  • 허트 로커(2009)
  • 제로 다크 서티 (2012)



[인터뷰] <허트 로커>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 “최대한 사실적으로 찍었다”

기사입력 : 2010.04.15 16:06  |김규한 기자 asura78@maxmovie.com


[맥스무비=김규한 기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주인공은 캐서린 비글로우 감독이었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허트 로커>로 여성에게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아카데미에서 금녀의 벽을 허물고 당당히 감독상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아카데미만 그에게 찬사를 보낸 것이 아니었다. 캐서린 비글로우는 이 영화로 무려 22개의 감독상을 수상했다. 언론과 평단만 뜨거운 찬사를 보낸 것이 아니었다. 관객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폭발물 제거반 대원들의 공포와 긴장감을 세밀하고 밀도 있게 그려낸 감독의 연출과 배우들의 완벽한 연기는 이 영화를 화제작 반열에 당당히 오르게 했다. 국내에서는 오는 4월 22일 개봉을 앞둔 <허트 로커>를 연출한 캐서린 비글로우와 맥스무비가 단독으로 이메일 인터뷰를 가졌다.




< K-19 > 이후 6년 만에 새 영화를 내놓았다. 


<허트로커>의 각본을 쓴 마크 보울과는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였다. 그가 쓴 기사를 TV 시리즈로 만들면서 친해졌다. 2004년 그가 바그다드에 파견되어 간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난 그곳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얼마 후 그는 영화로 만들어도 될만한 소재를 가지고 돌아왔고, 우리는 각본의 뼈대를 만들기 시작했다. 작업에 필요한 돈을 투자받고 나서야 촬영에 들어갈 수 있었다. 촬영한 분량을 편집하는 시간도 오래 걸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 편의 영화가 완성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리는지 모른다. 공백 기간이 긴 것처럼 보이지만 쉰 적은 없었다.


여성 최초로 아카데미상에서 감독상을 수상했다. 자신의 이름이 호명되었을 때 기분이 어땠는지?


어떤 말로도 당시 기분을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 생애 최고의 순간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훌륭한 시나리오를 써 준 마크 보울이 없었다면, 정말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 제레미 레너, 안소니 미키, 브라이언 개러티가 없었다면 그 자리에 설 수 없었을 것이다. 수상 소감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이 영화를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전세계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걸고 일하는 모든 군인들에게 바치고 싶다.




마크 보울이 쓴 각본이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 같다.


마크 보울이 이라크에서 돌아 왔을 때, 나에게 폭발물 제거반 대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군인들이 너무 열악하고 취약한 상황에서, 아주 작은 펜치만을 사용하여 폭탄을 제거 한다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위험천만한 일에 그들이 스스로 지원하는 것을 알았고, 그들이 다른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상상했을 때, 나는 이 소재를 가지고 영화를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현지인들을 캐스팅했다고 들었다.


최대한 시나리오에 가깝게 만들고 싶어 현지인들을 엑스트라로 기용했다. 맨 마지막에 나오는 자살폭탄 테러범은 바그다드에서 꽤 유명한 배우다. 우리가 촬영할 때 그는 이라크 전쟁 난민이었다. 우리는 그에게 역을 주였고, 그는 정말 대단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나는 지금도 그와 계속적으로 연락을 하고 있다. 그는 지금 뉴멕시코에 살고 있다. 나는 그가 계속해서 연기활동을 했으면 한다.


바그다드와 비슷한 공간을 찾아내는 작업이 관건이었을 것 같다.


사실 바그다드에서 찍고 싶었다. 하지만 그곳은 너무 위험했다. 이라크로 가게 되면, 스나이퍼에 대한 위험을 피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차선책으로 택한 곳이 바로 요르단이었다. 요르단 정부는 촬영에 대해서 협조를 잘 해주었다. 하지만 날씨가 우리를 도와주지 않았다. 7월 중순에 촬영을 시작 했는데, 평균 온도가 45도에서 65도 정도 였다. 죽음의 날씨였다. 열사병의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배우들에게 폭탄제거 수트를 입히는 일이었다.


폭발물 제거반 대원이 입는 폭탄해체 수트는 어떻게 만들었나?


폭탄해체 수트는 의상팀이나 아트팀에서 만든 것이 아니었다. 폭탄해체 수트는 실제 군인들이 사용하는 것이었다. 그 수트는 케블러(타이어나 다른 고무 제품의 강도를 높이는 데 쓰이는 인조 물질)와 세라믹 플레이트로 만들어졌다. 무게는 약 45KG 정도였다.




영상도 그렇고 이야기도 그렇고, 다큐멘터리를 보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의도한 건가?


마크와 나는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영화를 만들고 싶었다. 나의 의도는 관객들을 군인들의 군화에 넣고, 험비에 태우는 것이었다. 관객들에게 4번째 팀원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이 나의 의도였고, 군인들이 느끼는 것을 경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목표였다. 나는 관객들이 극장에서 나오면서 바지에 묻은 흙을 털었으면 했다. 폭발물 제거반의 삶은 정말 사실적이고, 가미가 되지 않았다.


제작비가 한정되어 있어 촬영 전부터 고심이 많았을 것 같다.


<허트 로커>는 메이저 영화가 아니라 독립영화다. 제작비는 작았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돈을 아껴야 했지만 촬영에서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우리는 4개의 카메라 팀을 꾸려 촬영했는데 이 같은 일은 독립영화에서는 흔하지 않다. 필름에 돈을 쓰는 것을 아까워했다면 지금과 같은 결과물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서 해석이 엇갈릴 수 있는 결말이다. 지금 결말이 처음부터 정해둔 결말이었는지 궁금하다.


원래 계획되어 있던 결말이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결말을 만들 수 있다. 영화인으로서, 한 관객의 결말을 내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를 인간적인 군인과 그들의 이야기로 본다.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영화고, 나와 다르다고 해서 그들의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 영화에 지지를 보낸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위험한 상황을 헤쳐 나가는 인물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애를 보여주고 싶었다. 외로운 길을 걷는 그들이 거기에 있어야 되는지 없어도 되든지 간에, 목숨을 걸고 자신들의 일을 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