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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 겐야, '이것으로 충분하다'의 가치

로드365 2013. 4. 30. 10:43


하라 겐야의 ‘엑스포메이션’ 개념으로 그의 제자들이 작업한 디자인 작품들. ‘알몸’과 ‘여성’을 주제로 디자인한 작품들을 묶어 펴낸 책 <알몸 엑스포메이션>(아래)과 <엑스포메이션 女>(위)에서 소개한 이미지들이다. 어문학사 제공


역발상 디자인 무인양품 “아는 게 병이다”

일본 디자이너 하라 겐야 방한

인식 전환 ‘엑스포메이션’ 역설

“‘안다’ 아닌 ‘모른다’ 깨달아야

대상에 새롭게 눈뜰 수 있어”

알몸·여성 등 다양한 주제 실험



디자이너 하라 겐야


* 무인양품 : MUJI: 브랜드 내세우지 않고 성장한 잡화 브랜드

“우리가 무엇을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과 흡사하다. 색안경을 벗고,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처럼 대상을 바라볼 때 본질을 꿰뚫을 수 있다.”


일본을 대표하는 디자이너로 꼽히는 하라 겐야(사진)가 한국을 찾았다. 그는 브랜드가 없는 브랜드라는 역발상으로 유명한 ‘무인양품’(MUJI)의 디자인 책임자로 무인양품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키워낸 것으로 유명하다. 일본적이면서도 국제적인 그의 디자인은 보기 좋고 아름다운 디자인이 아니라 새로운 발상과 철학을 구현하는 디자인의 본질을 보여준 것으로 평가받는다. 26일 한국예술종합학교가 주최한 ‘익스포메이션 서울×도쿄’ 심포지엄에 무사시노미술대학 교수 자격으로 참여한 그는 지난 10년 동안 스스로 주창해온 ‘엑스포메이션’론을 펼쳤다.

엑스포메이션(Ex-formation)은 ‘정보’를 뜻하는 인포메이션(information)의 앞부분의 ‘in’을 ‘ex’로 바꿔 정보와 지식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역설하는 그의 지론이다. 이날 강연에서 그는 현대인들은 인포메이션의 고정관념을 뒤집어 인식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엑스포메이션 사고를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디자인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정보가 넘치는 시대다. 우리는 인터넷 검색만으로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제 우리한테 필요한 것은 인포메이션(정보)이 아니라 엑스포메이션이다. 이것은 인포메이션과 반대 개념인데, 인포메이션이 정보를 전달해 알게 하는 것인 반면 엑스포메이션은 얼마나 모르고 있었는가를 깨닫게 함으로써 대상에 새롭게 눈뜨게 하는 방법이다. 강제적인 정보의 주입보다 더 강렬한 기제가 된다.” 곧 ‘알고 있다’는 인식을 깨고 다시 인식의 근원으로 돌아가 ‘얼마나 알지 못하는가’를 깨달아 의식을 각성하면, 근본적으로 새롭고 생생하게 정보를 교환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는 이 엑스포메이션을 교육에 적용해 오랫동안 학생들과 함께 매년 공동 주제를 정해 새로운 디자인을 시도하는 작업을 해왔다. 하천, 리조트, 식물, 주름, 공기, 알몸, 여성 등의 주제로 연구했고, 국내에서도 이 중 알몸과 여성을 주제로 다룬 결과물이 책으로 나와 있다. 그는 이날 하천의 물길에 차로가 표시된 포장도로를 합성한 것, 스패너·고추 등에 팬티를 입힌 것, 소총·수류탄 등에 꽃무늬를 입힌 작업 등을 다양하게 소개했다. “작품들이 전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기왕의 것에 조금 다른 것을 첨가하거나 맥락을 어긋나게 조합함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만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학생들은 수업 토론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내놓고 동료들의 반응을 보면서 다듬어가게 된다. 그렇게 하니 서로 달라 보이면서 공유가 가능하게 되더라. 일종의 다중지성의 실현이다.”

그러려니 여겨왔던 대상을 낯설게 만들면서, 학생들의 작업 결과는 자연스럽게 사회를 향한 발언이란 성격을 띠게 된다. 예컨대 상류에서 하류로 옮겨가면서 수집한 하천쓰레기가 달라지는 모습에서 환경문제가, 다른 신분으로 변장해 연출한 임신부 사진에서 직장인의 육아문제가 도드라진다. “엑스포메이션은 사회문제 해결과는 다른 것이다. 사회에서 한발 물러난 상태에서 이뤄지는 작업을 위한 방법론이다. 일종의 근육 키우기랄까.”

그는 2002년 무인양품 아트디렉터로 활동하면서 엑스포메이션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무인양품은 ‘이것이 가장 좋다’ 또는 ‘이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이 아니라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기능성의 가치를 실현하는 제품을 만드는 데 주력해왔다. “디자이너는 사회변화에 따라 역할이 달라져야 한다. 활황 국면에서는 스타일링과 브랜딩에 집중하게 되지만 안정기가 되면 산업의 미래를 가시화해야 한다.” 그는 기업 이윤을 위한 작업 외에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시간의 절반을 할애한다며 3월 도쿄에서 열린 ‘하우스 비전’ 전시회를 소개했다. “집에는 핵가족, 노령화, 에너지, 통신, 가전 등 세대별·분야별 모든 고민이 집적돼 있다. 집 문제를 풀면 모든 문제가 풀린다. 디자이너의 다음 가치관은 집이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