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막장Deck

너는 멋지게 죽어라! 내가 맛나게 찍어줄께!

로드365 2012. 12. 6. 14:15

필사의 몸부림 보면서 셔터만…'충격 특종' 논란

선로에 떨어진 한국인 사진 게재한 뉴욕포스트와 뉴욕타임스에 비난 여론 쇄도



지난 4일밤 뉴욕 49번가 지하철 정류장에서 50대 후반의 한국인 남자와 흑인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한국인 남성에 비해 월등히 큰 몸집의 흑인은 언쟁 끝에 한국인 남성을 철로로 밀어버렸고, 때마침 들어오던 전동차를 미처 피하지 못한 이 남성은 끝내 목숨을 잃었다.


숨진 사람은 한국인 이민자 한기석씨였고, 범행 하루만에 붙잡힌 용의자는 나임 데이비스라는 맨허튼의 노숙자였다. 뉴욕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용의자 나임은 한기석씨를 철로에 밀어뜨린뒤 한씨가 열차에 치는 장면을 그대로 지켜보고 있었다고 한다. 헌데 사건 현장을 지켜보기만 한 것은 용의자만이 아니었다. 우마르 아바시라는 프리랜서 사진기자가 있었다. 그는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댔다. 그리고 그 사진은 뉴욕포스트 1면에 실렸다. 다음날 뉴욕포스트는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 기자 윤리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사진에는 선로에 떨어진 한씨가 다가오는 열차를 바라보며 필사적으로 플랫폼에 올라오려는 긴박한 순간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차마 쳐다보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안타까운 순간이다.


이 사진이 게재되자, 미국인들 사이에서는 기자와 신문사의 비윤리적인 처사를 놓고 비난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피해자를 구할 생각은 않고 사진을 찍어댄 우마르와 그 사진을 게재한 뉴욕포스트, 또 그 사진을 재게재한 뉴욕타임스에는 비난 여론이 쇄도했다.


사진을 찍은 우마르는 한씨를 구할 만큼 힘이 세지 않았기 때문에 전동차에 긴급 상황을 알리기 위해 카메라 플래쉬를 사용했다고 해명했다. 비난이 쏟아지자 뉴욕 포스트도 오늘자 인터넷판 신문에서 우마르의 플래쉬 신호가 열차 운전자에게 위험을 알리는 충분한 경고 역할을 했다고 밝혔다. 


또 용의자 나임이 한씨가 열차에 치는 장면을 그대로 지켜 봤다는 한 목격자의 증언을 실으면서, 사진의 비윤리성보다는 용의자의 잔혹함을 더 부각시키려는 듯한 의도를 보이기도 했다



1994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사진은 남부 수단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한 사진이다. 너무도 유명한 이 사진은 전 세계적으로 비윤리성 시비를 불러일으켰다. 이 사진을 찍은 케빈 카터는 퓰리처상을 수상하기 2주전 그의 자동차 안에서 배기가스를 유입시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케빈의 자살로 비윤리 논쟁은 수그러들었지만, 과연 케빈 카터가 굶어 죽기 직전의 소녀를 지켜보기만 했던 냉혹하고 비윤리적인 인간이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케빈 카터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이다. ‘아파르트헤이트’라는 흑백 분리정책으로 대변되는 인종차별이 극심했던 국가에서 차별당하는 흑인 친구를 보호하다 구타를 당하기도 했던 그는 사진으로 세상의 부조리를 알리기 시작했다.


그가 찍어 타전한 남부 수단의 비참한 현실은 전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키면서 아프리카에 구호의 손길이 미치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나중에 발견된 그의 일기장에는 이런 글이 남겨져 있다.


“절망적이다. 전화가 끊어졌다. 집세도 없고, 나는 살육과 시체들과 분노와 고통에 쫒기고 있다. 굶주리거나 상처를 입은 아이들, 권총을 마구 쏘는 미친사람, 처형자들의 환상을 본다.”


그는 극심한 생활고와 우울증, 여기에 사진논란이 겹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으로 보인다. 


이번 지하철 사고현장에 있던 우마르와 케빈 카터의 상황은 많이 달라 보인다.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카메라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그 남자에게 손을 뻗칠 것인가? 짧은 순간 그는 훨씬 쉬운 선택을 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종과 양심. 그 경계선에서 고뇌의 순간은 너무 짧고 그 후유증은 너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