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박사의 부채에서는 장풍이라도 나올 듯했다. 의상은 직접 고쳐 만든 것이다. “나는 뽕짝 가수가 아니고 ‘뽕짝커’야. 앉아서 부르는 게 아니고 로커처럼 뒤집어엎는 거니까!”
새 노래 ‘아수라발발타’로 12년만에 돌아온 ‘이박사’
이박사의 부채에서는 장풍이라도 나올 듯했다. 의상은 직접 고쳐 만든 것이다. “나는 뽕짝 가수가 아니고 ‘뽕짝커’야. 앉아서 부르는 게 아니고 로커처럼 뒤집어엎는 거니까!” 장승윤 기자 tomato99@donga.com
33억 로또1등 당첨비법.. 충격 임플란트는 지고 세이프란트 뜬7일 오후 서울 종로구 세종로 동아미디어센터. 초록색으로 물들인 뽀글뽀글한 머리. 노란 셔츠에 노란 재킷, 노란 바지 차림의 그를 엘리베이터에 동승한 이들이 흘깃거린다. 손에 든 부채에 쓰인 ‘용(龍)’ 자와 한글 문구 ‘레이디스 앤 젠틀맨 뽕짝 킹 이박사 컴백’이라는 아주 촌스러운 문구가 보인다. 건네는 금색 명함에 박힌 ‘이박사(李博士)’ 세 글자. “12년 만의 일간지 인터뷰야. 잘 써줘야 돼.”
2000년 주류 가요계에 혜성처럼 나타났던 그, 이박사(58)가 마침내 돌아왔다. 그는 등장하자마자 트로트 메들리에 분당 박자 수 170을 상회하는 정신없는 테크노 리듬을 섞었다. 여기 ‘좋아좋아’ ‘미쳐미쳐’ ‘돌려돌려’의 추임새를 더해 10, 20대 가요 팬들까지 사로잡았다. ‘몽키매직’ ‘영맨’ 등이 수록된 1집 ‘스페이스 환타지’는 13만 장이 팔렸다.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들이 앞다퉈 ‘이박사 신드롬’을 보도했다. 2001년 후속곡 ‘학교매점 출출해’를 낸 그는 갑작스레 가요계에서 사라졌다.
지난해 조용히 신곡 ‘야야야3’가 담긴 새 앨범을 내고 칠순 잔치와 성인 가요 시장을 전전하던 그가 최근 주류 가요계를 다시 조준했다. 3곡짜리 새 앨범 ‘레알 뽕짝커’. 정신없는 테크노 트로트 곡 ‘아수라발발타’를 타이틀곡으로 민다. ‘다른 오빠’에는 장기하의 댄서로 이름을 알린 기이한 여성 듀오 미미시스터즈가, 히트곡을 재편곡한 ‘몽키매직-우주몽키’에는 레게 밴드 윈디시티가 참여했다. 서울 아차산에서 뮤직비디오 촬영을 하다 왔다는 그는 약간 피로해 보였지만 그의 입은 그렇지 않았다.
―진짜 박사님은 아니시죠.
“노래 박사죠.”
―박사학위 따고 싶은 분야는 있으신가요.
“아냐. 머리 아파.”
―박사님, 12년 동안 뭐하셨어요.
“나? 테크노, 디스코, 폴카, 룸바, 차차차, 슬로록, 트로트, 지루박. 이걸 다 섭렵했지. 레볼루션이에요. 칠순잔치나 중년들 원하는 데 돌고…. 그러다보니 관객 구성이 신세대 60%, 중년 40%인 거야. 신세대들이 날 다시 원하는구나! 그래서 컴백했지.”
―싸이 아세요?
“TV에서 공연하는 거 봤는데 이미 신(神)이 돼 있더라고, 신.”
―관광버스 가이드 출신이시잖아요. 버스 안에서 음악의 도를 깨치신 건가요.
“1978년부터 1989년까지 11년 가이드했는데, 버스 안에 리듬박스란 게 있어. 반주긴데. 속도를 최대로 올리고 수십 곡 ‘메들해서’(메들리로 만들어서) 추임새 넣으며 노래했어. 1989년에 메들리 음반 처음 내고 95년에 일본 소니에 픽업된 거야.”
―엽기 가수로서도, 케이팝 한류로서도 원조인 셈이네요.
“1996년 도쿄 부도칸 1만5000석 매진. 내 사인을 매니저가 복사해서 막 나눠줬어. 관객 반응? 아, 최고지. 메드리(메들리)로 다 그냥 후딱 뒤집어놨으니까. 그해 도쿄대 초청 받고 가서 ‘한국 트로트의 역사와 전통’ 특강도 했지. 살충제 CF 찍고 우리 돈으로 1억쯤 받았어.”
―공백이 꽤 길었어요.
“2002년인가, 다리 다쳐 한 3년 쉬고 2006년 애기 엄마랑 헤어지고 하니까 밖에 나가기 싫어졌어. 18년 산 아내랑 헤어지고 만난 두 번째 아내인데 11년 살다 헤어진 거지. 이런 건 왜 자꾸 물어? 지금은 서울 성북구 장위동에서 보증금 500만 원, 월세 40만 원 내고 방 두 칸에 서른네 살짜리 아들이랑 같이 살아.”
―음악 말고 취미는 뭐예요.
“당구, 탁구, 계주…. 과학 좋아해. 저 달, 저 별, 은하수. 책? 그런 건 안 읽어. 스마트폰으로 별 봐.”
―박사님, 우주에서 오셨어요, 진짜?
“아니. 그냥 신비롭다 이거지. …보통 사람은 아니지.”
―후대에 어떤 가수로 기억되고 싶으세요.
“나는 나예요, 그냥. 음악은 모방이 없다. 창작이다. 개발이다. 노력이다. 예술은 멀다. 질리지 않는다. 재밌다. 재밌는 삶이다!” 임희윤 기자 imi@donga.com
1954년 10월 5일 경기도 출생. 본명은 이용석. 한국의 제임스 브라운
한류 스타 1세대[1]
"안녕하십니까? 저는 대한민국의 호리호리한 신바람, 李博士[2]~~!!"
기존의 트로트 가수들과는 상반된 자신만의 영역을 개척하고 있는 가수이다. 젋은 나이와 세련된 편곡으로 어필하고 있는 요즘의 신세대 트로트 가수와는 달리, 다른 장르와의 접합 등으로 '테크뽕'을 만들어낸 선구자이기도 하다.
관광버스 가이드로 일한 경력이 있으며, 관광객들에게 안내와 더불어 노래를 불러주기도 했다. 어렸을 때 부모님에게 판소리를 배운 경험을 바탕으로, 노래 중간중간에 독특한 추임새를 넣어 관광객들 사이에서 입소문을 타기 시작한다. 이러한 추임새는 현재까지도 '이박사'하면 먼저 떠오르는 그만의 트레이드 마크로 자리잡고 있다. 당시 인간시대에 TV를 탄 적이 있는데, 머리속에 넣고 있는 노래가 3000개라 한다.
1989년 가수로 데뷔한 그는 신바람 이박사 Vol.1 을 출시한다. 기존 고속도로 뽕짝과는 사뭇 다른 노래들로 테이프 판매량 1백만 장 이상을 기록하는 놀라운 인기를 얻게 된다. 이 인기의 여파로 각종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며, 그 이후 19개의 앨범을 내고, 앨범마다 큰 인기를 얻으며 고속도로에서 신바람나게 팔려나갔다.
하지만 제한된 영역에서의 히트였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고 판단, 이박사 측은 1995년 일본 진출을 기획하게 된다. 일본의 모 인디 레이블을 통해 일본 진출 가능성을 점쳐보려 했는데, 샘플을 들었던 사람 중에 운 좋게도 소니 뮤직 대표가 있어, 쉽게 앨범을 내고 일본에 진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후 일본에서 상당한 인기를 얻어 현재까지도 활동 중이다.
천편일률적인 뽕짝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추임새와 곡들로 주가를 올리기는 했지만, 여전히 한국에서는 '이박사'라고 하면 뽕짝 가수라며 별 가치없는 가수로 생각하고 있다. [3]
그러나 1999년 일본의 전위예술 그룹인 메이와 덴키(명화전기)와의 공동작업으로 オレは宇宙のファンタジー(나는 우주의 판타지)라는 제목부터 우주적인 센스를 가진 곡을 발매했다. 이 곡은 국내에서 1집 발매 때 테크노 뮤지션인 가재발의 재편곡으로 스페이스 판타지로 리메이크되었다. 이 외에도 의외로 일렉트로니카 영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임으로써 일본 등지에서는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다.
특히 1996년 전기 그루브와 함께 '이박사 덴키그루브 : 열려라 뽕짝'이라는 앨범을 작업, 크게 히트시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테크노씬에 손을 댄 탓에 당시 국내에서는 흔치 않았던 일본식 테크노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우리나라 일렉씬에서도 많이 알아주는, 어쩐지 평가가 묘하게 엇갈리는 가수.
이 앨범의 인기를 몰아 무도관에서 공연을 한 적이 있는데 17,000석이 꽉찼다고 한다. 그리고 도쿄대학의 초청을 받아 한국 트로트의 역사와 전통을 주제로 한 강연도 했다. 트로트가 엔카의 하위장르로 인식되던 시절의 일이다.
일본에서의 평가는 높아서, 니코니코 동화에 올라오는 그의 영상에는 한국인에게 흔히 붙는 비하나 욕이 전혀 달리지 않는다. 아니, 애초에 영상에 붙는 태그가 '한국을 싫어하는 나도 인정하는 한류 슈퍼스타'. 일본에서 한국어로 노래하는 가수가 이 정도로 대우받을 수 있다는 건 역시 그의 범우주적 센스를 보여주는 듯. [4]
가히 한류스타 1세대라 하기에 손색이 없다.. 국내에서는 보기도 힘든 80년대 테이프나 음원들도 죄다 일본의 팬들이 발굴해서 유튜브 등지에 올릴 정도이니.. 흠좀무. 국내에서 뽕짝 가수라고 은근히 무시당하는 풍조와 참 대조된다. 유튜브에 음악과 라이브 영상이 업로드되면서 서구권 사람들에게도 컬쳐 쇼크와 재미를 동시에 주고 계신다(…).
하여튼 간에 일본에서 워낙에 인기가 많다보니 처음 일본에 진출했던 90년대 당시에는 일본인들이 "한국하면 Pon-chak아닌가요."라고 여기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여기서 저 pon-chak이란 곧 뽕짝을 이른다. 이미 그 당시부터 뽕짝하면 낡은 음악 취급하던 한국의 상황과는 판이하다.
물론 이 당시 일본이 뽕짝을 완전히 새로운 음악으로 받아들인것은 아니다. 1988 서울 올림픽 이후, 일본은 그때까지 관심이 없던 듣보잡한국에게 관심이 생기기 시작했는데, 당시 일본의 관점은 독특한 문화를 가진, 한국은 복잡하고 키치적인 나라였다. 그래서 한국 문화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집중되면서 한국의 음악도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사실 당시 대중음악의 수준은 한국보다 일본이 몇 수 위였고,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출판계와 대중의 입맛에 맞는것을 쉽게 찾을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발굴한 인물이 이박사인 것이다. 서양이나 일본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창법에 미니멀한 연주에 동양적인 멜로디를 지닌 이 독특한 아이덴티티가 인기를 끌게 되었고, 키치적이지만 새로운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비유를 하자면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간 개러지 록이 펑크 록으로 발전하여 미국으로 역수입된 격이랄까?
개그맨 컬투가 언제 이박사를 만날 일이 있어서, "일본에서 그렇게 인기던데, 그 비결이 뭡니까?" 라고 물었더니, 진지하게 "그 비결은…… 아이좋고! 야" 라고 답했다고 한다(…).
현재 서울특별시 성북구 월곡동 인근에 살고 있는 듯 하다. 날씨가 좋은 날 동네를 지나다니다 보면 금발머리를 휘날리며 자전거를 타고 다니는 모습을 간혹 볼 수 있다.
1996년 이집트 공연 영상.(....) 보다시피 '''스핑크스'''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디스코 메들리 뮤직비디오. 식당차 배경이 정겹다.
살충제 광고.
2010년 8월 4일에는 MBN 뉴스에 출연하여, 앵커들에게 굴욕을 주기도 했다. 야~ 야야야야! 신나게!
관련 내용
이것이 계기가 되어 MBN이 종편으로 전환할 때 광고에 출연하기도 했다.
현재의 근황?
천마산 인근에서 카페를 운영하고 있는 듯 하다. 링크 모 갈비집 정모에도 가는 듯 하다. 실제로 이 정모의 멤버인지 단순히 초청된것인지 모르므로 추가바람. 링크
한국 품바 예술협회에 고문으로 가입되어있다. 링크 (회원소계를 누르고 두번째 페이지를 보면 이박사님의 증명사진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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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본 내에서의 인기가 김연자, 조용필의 인기에 버금갈 정도이다. [2] '박사(博士)'라는 이름은 여러 가지 노래들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에 지은 예명이라 한다.뽕짝계에서 흔한 별명.마치 힙합계에서 힙합에 정통했다는 의미로 Dr.dre라든가 Masta woo라는 별명을 짓는것과 비슷하다. 한강식당차를 배경으로 한 뽕짝 디스코 메들리의 일본어 자막 참조. [3] 그가 한국에서 활동하던 시기는 젊은이들 사이에 뽕짝은 하급문화라는 인식이 강하게 퍼져있던데다 그의 음악에서 90년대 중반까지 길에서 흔히 보던 리어카 사운드가 연상되었다는 점도 작용했다. 즉 레코딩이 저질(...) [4] 이는 일본인들이 생각하기에 한류라 칭하는 문화현상중 드라마나 아이돌이 그리 새로울게 없는 것에 비해 이박사는 그 오리지널리티가 뛰어나다는 느낌을 받는 것에 기인하는 듯하다. 한국에서야 그저 테크노+뽕짝이라는 이미지이지만(...)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