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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니오 살리에리 Antonio Salieri

로드365 2012. 8. 18. 14:40



1750년 8월 18일 이탈리아 레가노 출생, 1825년 5월 7일 빈에서 사망.


이탈리아의 작곡가, 지휘자.


아버지가 상인인 부잣집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형에게서 쳄발로와 바이올린 등을 배웠는데 음악적 재능에 상당한 두각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읜 뒤 이탈리아 곳곳을 옮겨다니며 살다 1766년 당시 베네치아에서 만난 빈의 궁정작곡가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Leopold Gassmann, 1729 ~ 1774)의 후원을 받아 빈 궁정으로 진출하였다.


1774년 궁정작곡가, 1788년 궁정악장 테크를 거쳐 당시 음악계의 정점에 선 인물이었으며, 프란츠 요제프 하이든 같은 동시대 작곡가들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은 물론이고 제자 양성에도 힘쓴 음악 교육자였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페터 슈베르트, 프란츠 리스트, 카를 체르니, 요한 네포무크 후멜, 지아코모 마이어베어 등의 저명한 음악가들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제자였던 프란츠 자버 쥐스마이어와 아들인 프란츠 자버 볼프강 모차르트 등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쳐간 제자들이다.


살리에리는 죽기 1년 전까지 궁정악장 자리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이런 성공이 바탕이 되어 위에서 언급되었듯 수많은 제자들을 키워냈으며, 생활이 힘든 제자들을 지원하는 등 자선 활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또한 실직한 음악가나 사망한 음악가의 유족을 위해 상조회를 조직하였고, 자선 콘서트를 매년 개최하는 대인배였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권에서 오래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인이기 때문에 독일어는 죽을 때까지 유창하게 말할 수 없었다고.(...)


그가 작곡한 것들은 오페라와 종교음악이 많아, 기악곡은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다. 특히 오페라는 실패한 경우가 거의 없으며, 빈 사람들은 모차르트의 오페라보다 살리에리의 오페라를 더 좋아했다고.


2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하지만 그 무엇보다 살리에리의 이름을 퍼뜨리게 만든 건 바로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와의 대립. 모차르트가 죽은 뒤 그의 작품을 베껴썼다든지 그를 독살했다는 누명을 썼으며, 모차르트 본인이 "자신이 빈에서 출세하지 못하는 건 살리에리가 방해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모차르트가 살리에리를 지나치게 경계한 탓도 있다. 물론 살리에리가 모차르트 후기의 작곡 활동에 인색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차르트가 빈의 메인으로 쉽게 진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좀 더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던 황제 요제프 2세가 죽고, 후임자 황제 레오폴트 2세는 그를 별로 대단치 않게 여겼던 것이다. 게다가 모차르트는 콜로라도 대주교 히에로니무스에게 개겼(...)다가 엉덩이를 까여 해고된 전적이 있어 종교계에서도 그렇게 고운 눈으로 보이지 못했다. 결정적으로 모차르트는 궁정작곡가 자리를 스스로 박차고 뛰쳐나온 프리랜서.[1] 이런 정도니 살리에리가 그를 좋게 볼 리 없었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누구와도 융화되지 않으려는 주제에 위로 올라가려는 건방진 모차르트를 싫어한 것은 살리에리 혼자가 아니었다. 베토벤의 제자 한스 슈미트 이그나츠 모셀레스가 일제포르슈타트 병원에 입원한 그를 찾아가서 들은 바는 이렇다.


나는 분명히 그를 싫어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가 싫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궁정에서 나만 그를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내 뜻으로 그를 죽게 만든 건 더더욱 아니다.

 

모셀레스의 이 말을 들은 베토벤은 자신이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두 사람에게서 모두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왈가왈부할 입장은 아니지만 살리에리의 말은 믿는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더군다나 모차르트의 시신을 살펴본 의사는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죽였다는 소식에 도리어 불쾌해하며 "아니 그럼 내가 틀렸단 말야? 모차르트는 틀림없는 자연사다. 그의 시체에 독살의 흔적은 없었다고!"라고 반문했다고(...). 모차르트의 시신의 행방을 모르기 때문에 진실을 밝혀낼 수는 없지만, 살리에리 외에도 누명을 쓰고 있는 사람은 모차르트의 아내 콘스탄체나 주치의사 등이 있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서는 살리에리가 검은 망토의 남자로 분장하여 모차르트를 찾아가 계속 레퀴엠 작곡을 재촉하는 바람에 모차르트가 죽었다고, 자신이 모차르트를 죽게 만들었다고 고백하는데, 모차르트 입장에서는 틀리지 않은 묘사다. 다만 진실은 검은 망토의 남자가 살리에리가 아니라 곡을 비밀리에 의뢰한 발제크 백작의 하인이었다는 것이 좀 다를 뿐이다.


이를 한 2차 창작물로는 알렉산데르 푸시킨(1830년) 및 니콜라이 림스키코르사코프(1898년)의 '모차르트와 살리에리', 피터 셰퍼의 희곡이 원작인 아마데우스, 뮤지컬 모차르트 오페라 락 등이 있다. 여기에서 살리에리의 포지션은 당연히 모차르트에게 열폭하는 비운의 2인자 역할.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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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차르트는 세계 최초의 프리랜서 음악가라고도 한다. 그래서 베토벤이 무리 없이 뒤이어 프리랜서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이다.  출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