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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랜시스 스콧 피츠제럴드

로드365 2012. 8. 17. 20:39



목차  

1 개요

2 생애

3 이야기거리

4 작품 목록

5 미디어 믹스 관련

6 다른 작가들에게 준 영향



1 개요 

미국의 소설가. 그의 작품인 위대한 개츠비는 대서양 서쪽에서 보통 20세기 최고의 작품으로 꼽힌다.



2 생애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이름으로 보면 켈트 계열로 보인다. 실제로는 아일랜드계. 프랜시스 스콧 키란 이름은 미국의 국가인 성조기를 작곡한 프랜시스 스콧 키에게서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먼 친척이기도 하다.


1896년 9월 24일 아버지 에드워드 피츠제럴드와 어머니 몰리 피츠제럴드[1] 사이에서 났다. 미네소타 세인트폴에서 태어났고 집안은 가톨릭을 믿는 상류층이었다. 주로 스콧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유명한 친척에게서 따온 것도 있지만 죽은 손윗누이의 이름이 스콧이라 다시 붙인 것도 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엔 주로 뉴욕의 버펄로에서 살았고 2년 정도 시라큐즈에서 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스콧의 아버지가 스콧 10살 때 P&G에서 잘리는 바람에 미네소타로 돌아간다. 고향인 세인트폴의 세인트폴 아카데미를 다니며 대부분의 작가가 그렇듯이 학교 신문에 글을 기고하거나 하는 식으로 13살부터 작가의 커리어를 시작했다. 그치만 공부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16살 때 퇴학당하고 뉴저지의 예비학교[2]인 뉴먼스쿨에 입학했다. 1913년엔 프린스턴 대학교에 입학했다. 프린스턴에서 여러 동아리나 학회 같은 활동을 하며 글을 썼고 유니버시티 코타지 클럽이란 곳은 아직도 스콧이 썼던 책상을 전시해놓았다고 한다. 1917년 졸업했는데 가난뱅이였던 탓에 미군에 입대했다. 그러나 입대한지 얼마 안 되 1차대전이 끝났다. 


이 와중에 컨트리클럽[3]에서 앨러배마 몽고메리 출신의 젤다 셰이어를 만나게 되는데 돈이 없단 이유로 약혼이 파토가 난다. 그러다가 로맨틱 에고이스트란 작품을 개작해 낙원의 이쪽을 썼고 1919년 가을에 스크리브너에서 출판하기로 결정하자 다시 약혼한다. 1920년 3월 26일 소설은 출판되고 히트를 친다. 젤다와 스콧은 결혼한다.


1920년대 미국의 황금시대인 재즈 시대가 열린다. 재즈 시대의 사교적이고 강한 주체성을 보이는 여성들인 플래퍼를 다룬 소설을 써낸 스콧은 공전의 인기를 누린다. 당시 그의 단편소설들은 잡지들에 연재됐다. 1925년에 쓴 위대한 개츠비는 플래퍼나 재즈 시대를 다룬 작품 중에 최고로 친다. 스콧은 젤다와 파리로 건너가 여러 문화적인 활동을 벌이는데 이때 사귄 사람들 중 하나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다. 헤밍웨이는 젤다한테선 그다지 좋은 인상을 못 받은 것 같은데 젤다가 스콧에게 술이나 왕창 먹여 글을 못 쓰게 한다고 생각했고 정신 나갔다(insane)고 평가했다.


그의 단편들이 연재된 잡지들은 당시 최고로 잘 나갔던 잡지였던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The Saturday Evening Post), 에스콰이어(Esquire)[4], 콜리어즈 위클리(Collier's Weekly) 등이었다.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의 후기에 따르면 고급손목시계 하나를 쓰려고 하루 만에 써내려 간 소설도 있다.[5]


무수히 많은 단편소설을 써냈지만 뉴욕의 명사로서 부부가 써낸 돈이나 젤다의 치료 비용[6] 등에 돈이 많이 들어 스콧은 경제적으로 굉장히 쪼들리게 된다. 당시 부부의 기행을 들어보면 미국의 재즈 시대가 어땠는지 감이 올 법도 하다. http://twww.golfsky.com/column/column_read.asp?code=112&key=&keyword=&num=278859&page=1 참고.


1920년대 말이 되자 장편 소설을 쓰려고 했지만 재정적인 여건으로 계속 단편소설을 써야 했고 1930년에는 젤다가 정신병에 걸리면서 사정은 악화된다. 1932년에는 젤다를 메릴랜드의 볼티모어에 요양보낸다. 스콧은 메릴랜드의 투손이란 곳에 땅을 빌려 거기서 소설을 쓰는데 유망한 정신의인 딕 디버라는 청년이 니콜 워렌이란 여자를 만나 결혼하는 얘긴데 초고와 판본들이 여럿 나온다. 평론가들은 자신의 자전적인 문제를 이 소설에 투영한 것으로 본다. 한편 젤다는 유럽 생활을 바탕으로 비슷한 소설을 쓰는데 스콧은 여기에 빡쳐서 작품을 손질하고 젤다의 담당의한테 글 못 쓰게 하라고 했다고 한다. 부부 생활은 거의 파경상태였던 듯. 1934년에 위의 과정을 거쳐 써낸 밤은 부드러워가 출판된다. 젤다가 이 소설에 반영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와 마찬가지로 출판 당대에는 잘 안 팔렸는데 훗날의 평가는 굉장히 좋았다고 한다. 이 작품도 보통 영미권 100대 소설을 뽑을 때 들어가는 편이다.


1930년대 후반엔 돈이 쪼들리자 할리우드로 건너가 MGM을 위해 시나리오를 쓴다. 여기서 마지막 소설이자 다섯번째 장편인 마지막 거물의 사랑(The Love of the Last Tycoon, The Last Tycoon으로 부르기도 한다)을 쓴다. 할리우드의 유명 영화사 중역인 어빙 탈버그를 원형으로 삼은 이 소설을 쓰던 중에 찌라시 신문기자인 셰일러 그러햄과 연인이 된다. 그가 서부에 있는 동안 젤다는 동부의 정신병원에 있었다. 그때 스콧은 알콜중독 증세를 보였고 하루에 맥주를 30캔이나 마셨다고 한다. 의사가 술을 끊지 않으면 1년 내에 죽을 거라고 했는데 그 말대로 1940년에 심장마비로 죽었다. 그 해 12월 20일 애인인 셰일러와 영화 시사회에 참여한 뒤 돌아오던 중 어지럼을 호소했다. 다음 날 잡지를 보다가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벽난로 선반을 잡더니 숨을 쉬지 못 하다가 쓰러졌다고 한다. 셰일러가 매니저를 불렀지만 매니저가 보곤 이미 죽었다고 했다.


안치된 그의 시신을 봤던 도로시 파커의 말에 따르면 위대한 개츠비에서 개츠비가 죽었을 때 올빼미 눈의 사나이가 했던 유명한 대사인 "The poor son-of-a-bitch"란 말을 그의 장례식에서 누군가 중얼대는 걸 들은 적이 있다고 한다. 정말 위대한 개츠비와 그의 인생은 여러모로 겹치는 바가 많다. 그의 시신은 메릴랜드로 운구되어 베세다란 곳에서 그의 자식인 스코티 피츠제럴드(당시 19세)의 참관 아래 2,30명 정도의 인원으로 진행되었다고 한다. 볼티모어의 록빌 유니언 묘지에 묻혔다. 1948년 노스 캐롤라이나의 애슈빌에서 일어난 정신병원 화재로 젤다가 죽자 아들인 프랜시스 스코티는 볼티모어의 대주교구에 항의해 비가톨릭으로 죽은 피츠제럴드를 가톨릭으로 죽은 것으로 처리해달라고 요구해 가톨릭 식으로 장례를 치렀다. 원래 피츠제럴드는 가톨릭 집안이긴 했다. 본인은 냉담이었던 것 같지만. 1975년엔 두 사람을 합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