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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시퀀스, 영화의 프롤로그 혹은 영화의 진짜 얼굴

로드365 2003. 2. 3. 18:54


타이틀 시퀀스의 세계

영화의 프롤로그 혹은 영화의 진짜 얼굴,타이틀 시퀀스의 명작 탐구


‘빨리가기’ 누르면 후회할걸? 영화는 여기서 시작된다


새삼스럽게 묻자. 당신이 한편의 영화를 처음으로 ‘보는’ 것은 언제인가 개봉 광고 잡지 기사 극장 간판 틀렸다. 야박하게 말해서 그것들은 영화가 아니라 전시용 액자에 들어맞도록 가공하고 도려낸 복제물의 파편일 따름이다. 우리가 최초로 접하는 영화의 진짜 얼굴은, MGM의 사자가 으르렁거리고 이십세기폭스의 팡파르가 잦아든 다음 2∼3분 동안 영화와 제작진의 이름을 싣고 흐르는 ‘타이틀 시퀀스’ 즉 ‘오프닝 크레딧’이다.

우리가 게으른 자세로 비디오를 감상할 때면, 심드렁하게 ‘빨리 가기’ 버튼을 눌러 감아버리곤 하는 그 성가신 영화의 말머리는 미약하지만 중대한 프롤로그다. 오페라 전편의 테마 선율을 들릴락말락 품은 서곡이며, 관객이 장차 맞닥뜨릴 2시간의 허구가 어떤 것인지 예시하는 일종의 계약이자 경고이며, 영화관 바깥의 현실로부터 우리를 번쩍 들어올려 영화의 문턱까지 데려다놓는 엘리베이터다. 중세의 수술기구가 즐비한 살벌한 시퀀스로 <데드 링거>를 시작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 점을 들어 타이틀 시퀀스를 ‘라마즈 호흡법’에 빗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리플리>의 앤서니 밍겔라 감독은 긴 타이틀 시퀀스를, 본 영화에 미처 담지 못한 이야기를 풀어놓는 마지막 기회로 이용했다.

아직도 많은 감독들이 모든 작업을 마친 뒤에야 타이틀 시퀀스에 주의가 미치기 일쑤고, 어떤 제작자들은 타이틀 시퀀스를 저렴하게 처리할수록 좋은 지출 항목으로 여기기도 하지만, 무성영화 시대에 대사 자막과 똑같이 손으로 글씨를 쓴 카드의 형태로 출발한 오프닝 타이틀은 영화역사와 더불어 진보해왔다. 1950, 60년대 타이틀 디자이너 솔 바스의 손에서 예술로 비약했던 오프닝 크레딧은, 소극적인 스타일로 후퇴한 1970, 80년대를 거쳐 1990년대 <쎄븐>의 카일 쿠퍼 등 걸출한 작가와 감독들의 협력으로 부흥했다. 그리고 올리비에 쿤첼과 플로랑스 데이가스가 디자인한 스필버그 신작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오프닝 크레딧이 호평받으면서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고다르는 영화에 시작과 중간, 끝이 있어야 하지만 반드시 그 순서대로일 필요는 없다고 했던가. 영화의 처음, 마지막, 또는 본체를 간결하게 농축한 3분 안팎의 촌철살인, 타이틀 시퀀스들을 유형별로 모았다.



주인공부터 잡을 테면 잡아 봐!
애니메이션부터 3D까지, 영화주인공을 소개하는 타이틀 시퀀스 BEST


실험영화가 아닌 다음에야 영화를 보러간다는 것은 결국 어떤 사람을 사귀고 그의 파란만장한 사연에 귀기울이는 경험과 비슷한 것이 아니겠는가, 라고 생각하는 적지 않은 영화들이 3분 남짓한 타이틀 시퀀스를 ‘표지 인물’을 소개하는 영화의 커버스토리로 활용한다.

2D애니메이션과 3D애니메이션 촬영을 결합한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재기만점의 타이틀은 가까운 모범사례. 버진 애틀랜틱 항공사의 기내 안전수칙 영화를 제작했던 런던 넥서스 프로덕션의 작품인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오프닝 크레딧은 추적자로부터 딱 한 발짝 앞서 달아나는 남자를 따라간다. 파일럿 차림의 청년은 도망치는 도중 의사로, 다시 변호사로 옷을 갈아입는가 하면 풀장의 미녀들을 희롱하는 망중한도 즐긴다. 1960년대 클래식영화의 애니메이션 인트로를 연상시키는 이 2분40초짜리 복고적 애니메이션은, 영화광 스필버그 감독의 아이디어. 넥서스의 디자이너들은 플롯을 구체적으로 설명했던 시제품을 폐기하고 둔갑하는 사기꾼과 중절모를 쓴 FBI, 그리고 추적 상황만 실루엣으로 명쾌히 드러내는 현재의 산뜻한 버전에 안착했다.

<오스틴 파워>의 타이틀 시퀀스는 정력이 곧 탁월한 첩보 능력으로 직결되는 주인공 오스틴 파워의 모든 것, ‘모조’에 초지일관 집중한다. 그래서 말 그대로 오스틴의 국부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신혼 초야에 아내가 가미가제 병기임을 발견한 새 신랑 오스틴 파워는 슬픔을 극복하고 나체로 호텔을 천방지축 활보하지만, 바나나, 로스트 비프, 바게트 빵 같은 편리한 소품과 크레딧이 번갈아 오스틴의 몸 가운데를 가린다. 영화의 핵심 펀치라인을 강조하고 크레딧의 주목도도 끌어올린 실속있는 경우다.




오스틴 파워가 캐리커처처럼 단순 명료한 캐릭터라면 타인의 삶을 훔치는 남자 리플리는 잡히지 않는 신기루다. 톰 리플리의 얼굴에 드리운 휘장을 한장씩 걷어올리듯 시작하는 <리플리>의 오프닝에서 맷 데이먼은 정물처럼 앉아 있다. 그의 옆얼굴이 완전히 빛의 반대편에 놓이는 순간, 원제 타이틀의 ‘재능있는’(talented)은 열정적인, 혼란스런, 고독한, 지적인 등의 수많은 형용사로 뒤바뀌면서 인물의 카멜레온적 속성을 대변한다.

경찰의 감시사진과 주인공의 클로즈업을 콜라주한 <도니 브래스코>의 오프닝 크레딧 역시 주인공의 아웃사이더적 성격과 강박관념을 포착한 애수에 찬 명작이다. 흑백 화면에 쓴 상이한 스타일의 형사 박중훈과 장동건의 무용담으로 허두를 떼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타이틀 시퀀스는 인물의 극적인 등장에 중점을 둔 오프닝이다. 이처럼 액션과 정지 화면을 이용해 콘서트 무대에 선 밴드의 리더가 멤버를 하나씩 호명하듯 비장하게 인물을 소개하는 타이틀 시퀀스로는 <와일드 번치> <태양은 없다> 등이 대표적이다. <포룸>은 고군분투하는 호텔 벨보이 팀 로스를 익살스런 애니메이션 캐릭터로 변신시켰다. <쥬라기 공원>의 극중 애니메이션을 만든 밥 커츠가 연출했다. <저수지의 개들>의 미스터 오렌지가 타란티노의 제작사 밴드 어파트 로고에서 빠져나와 벨보이로 환골탈태하는 서두의 윙크가 백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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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과 <핑크팬더> 시리즈
본드, 관객을 향해 총을 겨누다, 또 겨누다, 그리고 또다시…


제임스 본드가 스크린으로 걸어나와 총을 쏘는 ‘건배럴’(Gunbarrel) 로고는 MGM의 사자나 유니버설의 지구만큼 유명한 상징이다. 첫 번째 007 영화 <007 살인번호>부터 지금까지 이어져온 이 로고는 모두 열네편의 007 오프닝 타이틀 디자인을 담당한 모리스 바인더의 작품. 숀 코너리와 로저 무어, 피어스 브로스넌 등이 아주 조금씩 다른 포즈로 관객을 향해 총알을 날렸지만, 가장 먼저 권총을 쥔 사나이는 스턴트맨 밥 시몬스였다. 숀 코너리의 대역이었던 시몬스는 모두 세편의 007 시리즈 오프닝 타이틀에 출연한 뒤 본래 주인공 숀 코너리에게 자리를 넘겼다. 실루엣만 드러나는 여체가 각각의 영화에 어울리는 오브제를 희롱하는 오프닝 타이틀 역시 1편부터 계속된 버릇이다. 바인더의 조수 트레버 본드가 여체를 활용하자는 제안을 낸 이래, 007 시리즈는 <007 골드핑거>의 황금빛으로 빛나는 도금된 여체와 레닌 동상 주변을 유영하는 <007 골든아이>의 검은 실루엣, 고문받는 본드를 잔혹하게 덮치는 <007 어나더데이>로 이어졌다. 최근 007 시리즈는 ‘건배럴’에 3D 기법을 더했지만, 장수 시리즈다운 고집은 잃지 않고 있다.

93년이 마지막 출연이었지만, 핑크팬더는 제임스 본드와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60, 70년대를 풍미했던 오프닝 타이틀의 주인공이다. 워너브러더스의 애니메이터 프리츠 프렐렝은 <핑크팬더> 시리즈의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의 부탁으로 100여 가지에 달하는 팬더 캐릭터를 디자인했다. 마치 영혼의 동반자를 알아본 연인처럼, 에드워즈가 한눈에 지목한 팬더가 바로 지금의 핑크팬더. 가냘픈 팔다리가 커다란 손발을 주체하지 못해 휘청거리는 핑크팬더는 아홉편의 <핑크팬더> 시리즈의 처음을 열었고, 지금은 DVD 광고용 트레일러에서도 활약 중이다.



인간의 위선과 배반을 한눈에
영화 제목에 담긴 뜻을 설명하는 타이틀 시퀀스


타이틀 디자이너 솔 바스는 “<싸이코>는 워낙 많은 뜻을 가진 단어이기 때문에 오프닝 타이틀이 제목의 의미를 분명하도록 만들어야 했다”고 말했다. 제목이 지나치게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거나 심오하다면, 그리고 그 제목을 포기할 수 없다면, 단어를 깎고 다듬어서 관객에게 안기는 가이드 역할은 오프닝 타이틀이 해야 한다는 것이다. 스파이크 리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와 주로 작업했던 랜디 볼스마이어는 <차이니스 박스>에서 바로 그런 역할을 떠맡았다. 당시로선 드물게 100% 컴퓨터그래픽으로 작업한 이 오프닝 타이틀은 홍콩의 그림엽서와 염주, 우표가 붙은 편지봉투 등 기억이 담긴 물건들을 차이니스 박스 속으로 차곡차곡 밀어넣는다. 식민지로 보낸 백년의 시간이 뒤섞여 오래된 나뭇결 안에 봉인되는 것이다. 볼스마이어는 “나와 웨인왕 감독은 끝나지 않는 나선과도 같은 차이니스 박스가 홍콩의 반환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라는 주제를 반영하고 있다는 데 합의했다”고 말했다.

솔 바스가 디자인한 <현기증>과 <살인의 해부>는 제목을 곧이곧대로 따라가는 것 같으면서도, 간단한 그래픽 안에서 쉽게 파악할 수 없는 의미를 풀어낸 타이틀이다. 인체를 조각조각 나눈 애니메이션이 퍼즐을 맞춰가는 듯한 느낌을 주는 <살인의 해부>는 바스가 “영화의 미스터리와 함께 인간의 위선과 배반을 메타포로 응축한” 걸작. 이 간결한 오프닝 타이틀은 싸움과 화해를 반복하면서 오랜 파트너로 인연을 맺었던 오토 프레밍거와 솔 바스가 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를 각기 다른 형태로 완성한 듯한 느낌을 준다. 앨프리드드 히치콕의 <현기증>은 제목의 의미가 그대로 몸 속으로 뚫고 들어오는 타이틀이다. 타이틀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정말 현기증이 나기 때문이다. 히치콕이 좋아하는, 커다랗게 뜬 여자의 눈동자는, 검은 동공이 확대되면서 소용돌이치는 태극문양 나선으로 변해간다. 암흑 속에서 출렁이는 네온빛 그래픽은 다시 카메라와 함께 여자의 눈동자 바깥으로 물러나온다. 마치 현기증에 비틀거리는 한 여자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나온 것처럼.



이에 비해 <몬스터 주식회사>는 명료한 제목이 귀여운 애니메이션으로 살아난 경우다. <몬스터 주식회사>는 밤이 되면 벽장 속에서 괴물이 나온다는 옛날이야기에서 힌트를 얻었다. 그 때문에 이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을 구성하는 요소는 문과 괴물 딱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그 문과 괴물은 결코 단조롭지 않다. 전세계 모든 아기방의 문을 열고 들어가 비명소리를 빨아들이는 ‘몬스터 주식회사’는 몬스트로폴리스를 먹여살리는 거대 전력회사. 그 회사의 모든 문과 모든 괴물 직원이 출동한 것 같은 이 타이틀은 문들이 모여 글자를 뱉어내고, 몬스터들이 종횡무진하며 다시 글자를 집어삼키는 생기발랄한 애니메이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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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탭 직업 따라가는 타이틀
LP판은 음악감독, 타자기는 시나리오 작가


<델리카트슨> 오프닝 타이틀은 그림엽서처럼 아늑하다. 거친 면포대와 손길에 닳아 희미하게 빛나는 나무탁자, 아직도 선명한 흑백사진은 오래 전에 버려진 어느 작은 방 안에 좋았던 시절을 향한 향수를 흩어놓는다. 그 소품들을 만날 때마다 잠시 멈추는 카메라도 조심스럽다. 그러나 그 세심한 행보는 고운 먼지 위에 바람을 일으킬까 마음쓰기 때문은 아니다. 소품 하나하나에 얹힌 글씨, 그들이 하는 일을 따라 주어진 스탭들의 이름을 읽기 위해서다. <델리카트슨>은 검은 잿가루가 앉은 책 위엔 시나리오 작가를, 나란히 인화된 두장의 흑백사진엔 편집을, 분홍색 스티치가 수놓인 천조각 위엔 의상을, 나무로 만든 자 위엔 프로덕션디자이너를, 구식 수동카메라 위엔 촬영감독을 올려놓았다. 함께 영화를 만든 수십명의 스탭들은 자기 이름이 먼저 나가길 바라겠지만, 이런 정성이라면 이름이 언제 나가느냐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하지 않을 것도 같다.

<애들이 줄었어요>는 <델리카트슨>의 배려를 고스란히 애니메이션으로 재현한 타이틀이다. 영화 내용처럼 조그맣게 줄어든 아이들은 집안과 정원에서 커다란 글자들 사이를 미끄러지는 모험을 겪는다. 쏜살같이 돌아가는 LP판은 음악, 거대한 타자기 자판이 찍어내는 글씨는 시나리오 작가, 연필과 도화지는 프로덕션디자이너를 위한 것이다. 결국 우체통까지 휩쓸려 들어간 두 아이가 아우성치는 편지봉투 바깥엔 감독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이 재미있다.




두근두근, 레드커튼이 올라간다
영화의 양식미를 엿볼 수 있는 ‘예술적인 정보’로서의 타이틀 시퀀스 BEST


좋은 전채 요리가 그렇듯, 좋은 타이틀 시퀀스는 그 자체로 향기로워야 하지만 향신료가 지나쳐서 메인 요리의 풍미를 해쳐도 불합격이다. 그래서 많은 감독들은 타이틀 시퀀스가 최선의 경우, ‘예술적인 정보’가 되기를 희망한다. 오프닝 크레딧의 톤과 무드가 다음에 이어질 영화를 가장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로 관객의 근육을 이완시키고 정서를 고양시켜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바즈 루어만 감독의 뮤지컬 <물랭루즈>는 영화의 양식미를 미리 맛보게 하는 유형의 타이틀 시퀀스 중 프리마돈나로 손색이 없다. MTV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수공업적 스펙터클의 파노라마를 세기말 파리의 카바레에서 거침없이 펼치는 <물랭루즈>의 타이틀 시퀀스는 프로시니엄 아치(연극무대 위쪽 테두리를 이루는 아치)에 늘어진 붉은 커튼을 걷으며 시작한다. 무대 앞에 조그맣게 보이는 지휘자의 과장스런 제스처에 맞춰 이십세기 폭스사의 팡파르가 울리고 예스런 크레딧이 흐른다. ‘레드 커튼 시네마’라고 불리는 루어만의 미학을 직설적으로 반영한 타이틀 시퀀스의 기습으로 졸지에 영화 관객이 아닌 카바레 청중이 돼버린 관객은 오프닝의 붉은 휘장을 젖히는 동안 자연히 <물랭루즈>의 시대착오적 세팅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무도회에의 권유에 화답하게 된다.

타이틀과 특수효과 디자이너 랜디 볼스마이어와 미미 에버렛 커플의 작품인 <패션쇼>의 오프닝 크레딧은, ‘그랜드호텔 스타일’이라는 별명을 가진 로버트 알트먼 특유의 대형 앙상블을 맞이하는 관객을 적절히 준비시킨다. 모스크바에서 출발한 카메라가 고속 회전목마처럼 유럽 도시들을 빠르게 도는 동안 오색의 옷감 견본 조각이 동시다발적으로 스크린 아래에서 위로 날아오른다. 가장자리가 올이 풀리고 핑킹가위로 잘린 천 조각들에는 줄리아 로버츠, 팀 로빈스, 소피아 로렌, 킴 베이싱저 등의 이름이 적혀 있다. 지금부터 영화가 입장할 패션 디자인 세계의 언어를 끌어들이면서 배역들의 무게를 저울질하거나 특정 스타에 집중하는 일이 애당초 무의미한 영화의 성격을 예고하는 셈이다.



볼스마이어와 에버렛은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단골 타이틀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수틀 같은 화폭을 경극 가면부터 기모노에 이르는 다채로운 동양풍 오브제로 꾸민 의 타이틀 시퀀스는 볼스마이어&에버렛사가 처음 컴퓨터로 제작한 작품. 수집가와 도서관의 도움으로 완성된 이 시퀀스는 대단히 아름답지만, 중국과 일본 문화의 도상들이 뒤섞여 있어 막연한 오리엔탈리즘에 경도된 장식주의가 아닌가 하는 의심도 부른다. 그러나 디자이너들은 <사이트 앤 사운드>와의 인터뷰에서 이같은 혼돈이 중국인 애인을 일본 여인 나비부인으로 부르며 매혹당하는 극중 프랑스 외교관의 의식을 투영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디 아더스>의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감독에게는 모든 영화를 암흑 속의 보이스 오버로 시작하는 기벽이 있다. “얘들아 편하게 앉았니” 역시 까만 어둠 속에서 첫마디를 던지는 <디 아더스>의 오프닝 크레딧은 창세기를 아이들에게 읽어주는 니콜 키드먼의 음성과 몇장의 드로잉으로 구성된다. 드로잉들은 처음에는 창세기의 삽화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디 아더스>의 슬픈 괴담을 미리 보여주는 그림으로 판명된다. 아메나바르는 책장을 넘기는 대신, 희미한 촛불 빛으로 동굴 벽화를 구경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비극의 소묘들을 훑어나간다. <디 아더스>의 타이틀 시퀀스를 통해 관객은 영화 전반에 드리워질 반전과 어둠에 미리 눈을 익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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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시퀀스 천태만상
“레이디 퍼스트 내 이름부터 넣어 줘!”

영화사의 각종 기록을 모은 책 <영화에 관한 사실들>(Film Facts)에 따르면 오프닝 크레딧의 세계에도 진귀한 기록은 풍성하다. 제작진 소개, 장면 전환 외에 크레딧이 가진 또 하나의 사회적 기능은 출연 연기자 사이의 위계질서 정리. 크레딧의 이름 표기(billing) 순서는 그래서 할리우드 스타들의 계약서에 포함되는 중요한 조항이다. <아담의 갈비뼈>(1949)에서 단짝이자 라이벌인 캐서린 헵번과 공연한 스펜서 트레이시는 “레이디 퍼스트도 모르냐”는 제작자의 참견에 “이게 영화지, 구명보트냐”고 반박하며 자기 이름을 먼저 쓸 것을 고집했다고. 영화가 많다보니 크레딧을 쓰지 않고 읽는 영화도 나온다. 오슨 웰스는 <위대한 앰버슨가의 사람들> 제작진 명단을 낭랑히 낭독했고 로버트 알트먼의 도 같은 방식을 택했다. 마이크 스노의 <>에는 크레딧이 영화 중간에 튀어나오고 스티븐 소더버그의 <스키조폴리스>는 어찌된 일인지 아예 크레딧이 없다.
한편 <버라이어티>는 어느 해 연말 일본영화 문화의 특색을 요약하면서 “관객 모두가 크레딧이 끝날 때까지 앉아 있다”는 점을 가장 큰 컬처 쇼크로 꼽기도 했다. 크레딧 시퀀스도 제작비가 문제되기는 마찬가지다. 미국의 가난한 독립영화 제작자가 타이틀 시퀀스에 투자하는 비용은 대개 1만달러 미만. 하지만 인디영화라고 검은 바탕에 흰 글씨만 쓰라는 법은 없다. 크레딧 디자이너를 고용하지 못해 카페에서 머리를 싸매던 감독이 카페마다 무늬가 다른 냅킨에 글씨를 써서 촬영하는 묘안을 낸 것도 좋은 예. 영화가 끝난 뒤에도 깊은 인상을 남기는 예가 드문 한국영화의 타이틀 시퀀스 개선에 필요한 자원도 돈만은 아닐 성싶다.




오타 발견! 그래도 우아하도다
글씨체의 디자인과 크기의 배열이 낳는 스펙터클한 타이틀 시퀀스 BEST


영화 제목과 대사, 제작진의 이름을 종이카드 위에 손으로 써서 집어넣었던 초기 영화에서도, 지극히 궁한 예산으로 살림을 꾸려야 하는 현대 독립영화에서도, 글자는 모든 프릴과 장식을 떼어낸 타이틀 시퀀스가 버릴 수 없는 마지막 기본사양이다. 그러나 오늘날 타이틀 시퀀스 디자인의 세계에서는 더이상 글자가 정보를, 비주얼이 스타일을 분담하지 않는다. 글씨체의 디자인과 폰트의 배열만으로도 엄연히 지향하는 스타일을 선언할 수 있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핀처의 <패닉 룸>은 맨해튼의 거대한 빌딩 입면과 같은 앵글의 평면을 가정하고 공중의 가상 평면에 금속성의 글자들을 공중에 띄워 크레딧 하나하나가 권위있는 구조물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를 얻었다. 유리와 철골 구조의 건물에 크레딧을 박은 솔 바스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오프닝 시퀀스를 상기시키는 아이디어. 폴 버호벤의 <할로우 맨>은 크레딧의 알파벳을 유기체처럼 번들거리는 투명한 글씨로 표현했다. 투명인간이라는 영화의 소재를 강조하는 동시에 현미경으로 세포의 세계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감상을 자아낸다.

<로얄 테넌바움>의 웨스 앤더슨은 인형의 집을 짓는 듯한 편집증적 연출로 정평난 감독. 자기식의 노트 필기를 고집하는 모범생 사춘기 소년 같은 앤더슨은 자기 영화의 모든 타이틀과 크레딧의 글자를 푸트라 볼드체로 고집한다. 파블로 페로는 손으로 쓴 수제 크레딧으로 유명한 디자이너. <아담스 패밀리> <맨 인 블랙>으로 젊은 관객에게 익숙한 그의 대표작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는 수제품답게 오자도 발견된다.


잘린 손톱의 빅 클로즈업으로 시작하는 <가타카>의 정갈한 오프닝 크레딧에서 모든 g, c, t, a는 굵은 세리프체의 하이라이트로 표기됐다. 제목에 든 철자들을 특별대우함으로써 유전공학에 의한 신분제라는 영화의 소재를 부각시킨 것. <가타카>의 앤드루 니콜 감독은 최근작 <시몬>에서 알파벳 I와 O의 자리에 디지털 신호를 뜻하는 1과 0을 바꿔넣는 재간을 피우기도 했다. 당신이 가난한 감독이라고 해도 검은 바탕에 흰 글씨를 쓴 크레딧으로 쉽게 만족하지 말 것.

비명과 경찰의 무전교신이 뒤섞인 소음 속에 ‘세븐’이라는 단어를 두번 집어넣었다. <미믹>과 <쎄븐> 오프닝 타이틀을 모두 디자인한 카일 쿠퍼가 그 자신의 작품에 경의를 표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보수적인 영화계에 광고와 음반의 그래픽을 최초로 도입한 디자이너”라고 평가받는 카일 쿠퍼. 그의 초기작 <쎄븐>은 핀에 꽂힌 나방의 날개가 재앙을 예고하는 사운드와 겹치는 <미믹>의 오프닝 타이틀조차 ‘곤충판 <세븐>’이라는 비아냥밖에 얻지 못했을 정도로 강렬한 ‘예술’이었다. <쎄븐> 오프닝 타이틀은 관객이 이름없는 살인자와 단독으로 대면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면도날로 지문을 베어내고 옛 서적들을 뒤져 살인의 의식을 준비하는 빛바랜 영상, 오래된 필름을 영사하는 것처럼 초점을 잃으며 깜박이는 날카로운 글씨체, 신경을 긁어대는 트렌트 레즈너의 음악은 영화가 말하지 못한 살인자의 내면을 순식간에 각인시킨다. 쿠퍼는 에이젠슈테인을 공부하면서 이미지를 나열하고 조합하는 법을 익혔다. 때로 MTV의 영상을 모방했다는 비판을 받지만, 쿠퍼는 50년대 솔 바스가 했던 혁명을 90년대에 이룩했다.

<닥터 모로의 DNA>는 그 자체로 완성된 영상물이면서 영화의 의미를 함께 담으려 하는 쿠퍼 특유의 오프닝 타이틀을 선보인다. <닥터 모로의 DNA>는 기형 생물들이 가득 찬 무인도가 배경. 유전자가 결합하고 세포가 분열하면서 웅크린 태아의 모습으로 다가가는 오프닝 타이틀은 유령선처럼 불길하게 흔들리면서 저주받은 섬을 향해 관객을 이끈다. 오프닝 타이틀의 개척자인 솔 바스는 <카지노>에서 쿠퍼와는 또 다른 분위기의 그래픽을 실험했다. 첫 장면에서 폭발하는 자동차와 함께 공중으로 던져진 에이스(로버트 드 니로)의 시체는 형광색 도시 라스베이거스를 부유하면서 어느덧 오프닝 타이틀로 스며든다. 네온이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그래픽을 뒤에 두고, 바스는 그리 행복하지 못했을 것 같은 이 남자가 카지노의 환락과 거짓 속에서 보냈을 삶을, 꿈꾸었을 사랑을, 흐르는 이미지로 들려준다. 솔 바스와 카일 쿠퍼는 감독들의 잔소리와 제작비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몇분 동안의 꿈같은 시간을 창조하는 데 성공했던 드문 디자이너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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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이틀 시퀀스의 장인 솔 바스(1920∼96)
황금 감각을 지닌 사나이


마틴 스코시즈는 “솔 바스의 타이틀이 스크린에 나타나는 순간, 진정한 영화가 시작된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는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이미 관객에게 그 영화의 감정을 전달하는 바스의 능력을 깊이 신뢰했고, <좋은 친구들> 이후 <카지노>까지 모든 영화의 오프닝 타이틀을 바스에게 맡겼다. 바스의 유작 <카지노>는 일흔다섯 나이에도 새로운 영화의 흐름에 주저없이 몰입했던 한 장인의 영혼이 담겨 있는 작품이다. 운명처럼 돌아가는 룰렛 위에 라스베이거스의 네온이 쓸쓸하게 비치는 <카지노>에는 40년 넘게 오프닝 타이틀에 매달렸던 바스의 평생이 함께 흘러가고 있다.

미술을 공부한 바스는 뉴욕에서 영화광고를 만들다가 오토 프레민저의 제의를 받고 오프닝 타이틀 제작을 시작했다. 바스가 “타이틀 디자이너들이 동굴 속에서 살고 있던 암흑시대”라고 회상하는 1950년대, 프레민저는 애니메이션 기법을 사용한 <황금팔을 가진 사나이>의 파격적인 오프닝 타이틀을 수용하면서 열한편의 영화로 이어지게 될 기나긴 동반의 시작을 다졌다. 프레민저와 함께 바스의 오랜 파트너가 된 감독은 앨프리드 히치콕이었다. 히치콕은 녹색 필드가 뉴욕 고층빌딩 유리창으로 바뀌는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오프닝 타이틀을 보고 영화에 뉴욕 풍경을 추가해야겠다는 영감을 얻었다고 고백했다.

바스는 오프닝 타이틀 최고의 거장이었지만, 명성에 안주하지 않으면서 실험을 거듭한 디자이너였다. 영화평론가 앤드루 새리스는 오직 바스의 타이틀을 보기 위해 영화 <워크 온 더 와일드 사이드>를 보러갔다고 썼다. 오프닝 타이틀을 홀로 설 수 있는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던 바스는 새리스가 보낸 경의에 어울리는 장인이었다.

씨네21  글 김혜리 vermeer@hani.co.kr·김현정 parady@hani.co.kr / 자료협찬 영화마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