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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지아, 나는 고백한다 I confess

로드365 2011. 8. 5. 17:26


서서 오줌 누는 여자들과 불편한 누드
우회로를 타지 않고 알몸으로 직행하는 ‘여성 작가’ 장지아는 개인전 [나는 고백한다]에서 가학, 권력, 성적 굴종을 혼용한다. 이번 전시회에서도 작가는 ‘성적 모럴 해저드 극한까지 밀어붙이기’를 감행한다.

유년에 납치되어 18년간 성 노예로 감금된 채 납치범의 애를 둘씩이나 낳은 비운의 11세 소녀가 20대 후반에 구출된 소설 같은 사건. 이른바 제이시 두가드 납치 사건은 전 세계 토픽 감이 될 만했다. 납치 강간범에게는 징역 431년형이 선고되었다. 전대미문의 엽기 행각 때문에 이 실화에 대한 지구촌의 주목은 대단했지만, 완력으로 상대를 제압해 원하는 걸 가로채는 흉포한 속성은 정도 차만 있을 뿐, 동서고금 도처에서 폭넓게 자행되어왔다. 약자를 굴복시키는 고전적이고 원초적인 수단 그리고 고백을 짜내는 극한 해법, 그것이 고문이다. 

전시할 때마다 일정한 기대치를 충족시키는 장지아의 결과물의 단서를 단순히 환원하면, 만인이 거부하지 못하는 ‘본능의 호수’에서 주제의 모티브를 퍼 올려서이리라. 성적 모럴 해저드 극한까지 밀어붙이기는 이 작가를 규정하는 코드처럼 인식되었다. 장지아는 개인전 <나는 고백한다>에서 가학·권력·성적 굴종을 혼용한다. 국제법은 고문을 금지하지만 시야 밖에선 제이시 두가드 사건이 숨어 있고, 급기야 시야 안에서조차 아부그라이브 수용소에서 이라크 포로에 대한 미군 고문이 터져 나오고야 만다. 고문으로 표상되는 권력 의지는 시공을 초월하여 산재된 인류의 현재진행형 성품인 것일까?   

우회로를 타지 않고 알몸으로 직행한 ‘여성 작가’ 장지아의 초기 작업은 그 전까지 한국 화단에선 생소한 현상이었다. 선정적인 시각 충격을 매개 삼지만, 작업의 귀결은 제도적 규약과 관습이 초래하는 권력의 부당성을 향한 냉소였다. 그렇지만 쟁점을 향해 돌진하는 사실주의자의 직설법을 전철 삼진 않았다. 의사전달의 매뉴얼이 변모한 시대이므로. 대신 그녀가 정한 선택지는 견고한 제도 권력에 대한 야유의 메시지를 욕망의 포장지로 과도하게 부풀려 이목을 솔깃하게 하는 것이었다. 견고한 가부장 사회에서 여성 미술인의 이런 도발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섹슈얼리티라는 주제 군으로 범주화되긴 했지만. 

4회 개인전 <오메르타> 대안공간 루프, 2007

장지아는 전시회 <오메르타>에서 여성에게 선 채 오줌 누기(위)를 주문했다. 선 채 오줌 누기는 여성주의 운동이 취하는 공격적인 제스처 중 하나다.

사진·동영상·설치로 드러내는 중의적 긴장감

앞선 개인전 <오메르타>는 암전된 배경 속에 집중 조명이 떨어진 젊은 여자의 하얀 알몸을 사진과 영상으로 재현한 작품을 보여준다. 화면에 등장한 여자 모델들은 선 채로 오줌을 눈다. 어두컴컴한 배경 앞에서 도드라진 나체는 고전미로 빛난다. 사생활 보호 차원인지 화면 위로 모델 얼굴이 화면 밑으로 무릎 아래가 잘려, 마치 흑백 토르소 조각을 사진으로 반복한 인상을 준다. 무릇 동일한 알몸을 응시하면서도 여체 관음과 고전미 감상이 경합을 벌이며 공존한다. 

<오메르타>의 코드가 이번 <나는 고백한다>에서는 어항 위에 단아하게 앉은 날렵한 웬 여자 누드의 ‘뒷태’로 바통을 이어받는다. 작품 ‘앉아 있는 어린 소녀’는 상투적인 제목 같지만 벗은 여성의 뒷모습을 감촉하고픈 본능을 건드리며 관능미를 뿜어댄다. 피상적으로 <오메르타>의 원색성이 흑백 누드의 중후한 포맷 속에서 완화된 것처럼 ‘앉아 있는 어린 소녀’에서 유리 어항 속 뱀장어 무리는 상투적이지만 여성의 성기를 뚫고 들어갈 남근의 상징물로 풀이하고픈 조건반사가 생긴다. 하지만 이런 정직한 풀이도 S곡선 소녀의 인체가 품위 있는 잿빛 배경 정중앙에 배치되면서, 관음과 감상 혹은 스타일과 메시지 사이의 팽팽한 접전 속에 슬쩍 고개를 숙인다(이 관능적인 젊은 여성 모델이 작가 본인이라는 소문이 있다!). 

'앉아있는 어린 소녀 Sitting young girl', 2009

<나는 고백한다>에 잔잔히 흐르는 중의적 긴장감은 세 매체를 번갈아 반복된다.
사진, 동영상, 설치. 이 가운데 설치는 현대적 설치 조형물 ‘내 죄를 고백한다(I confess my sins)’와 투명 유리 진열장에 오브제를 보관한 고전적 설치물 ‘아름다운 도구들(The beautiful instruments)’로 나뉜다. 유리 진열장 안에 유서 깊은 고문 도구의 재현물이 나열된 풍경이란 가히 역설적이다. 

용도를 추정컨대 끔찍한 반인륜적 고문 장비이지만 단아한 진열장 안에서 골동 취미가 투영된 유물인 양 감상 대상으로 전이되어 보여서다.  
본능이라는 화두로 제도적 억압과 권력의 부당함을 야유한 장지아도 창작 초반부(2000년 전후)에는 화면 속에서 배우 역을 도맡았다. 그런 공정이 차츰 변화해 <오메르타>와 <나는 고백한다>에서 보듯, 연출자의 지위에서 출연진을 정해 이야기를 구성하는 감독의 역할로 자리매김한다. 스토리텔링의 완결도를 높이려고 통제자로 역할을 설정한 채 뒤로 빠진 것이다. 

장지아는 몸소 그러했듯, 여성 모델들의 알몸 노출을 다채로운 방식으로 유도해왔다. 그들의 벗은 몸은 관음과 관찰의 대상, 그 모두가 가능한 알몸처럼 보였다. <Open your heart> (2007년)는 벗은 가슴이 인쇄된 티셔츠 차림의 여성 모델들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티셔츠에 인쇄된 가슴은 모델들 각자의 것을 찍었다. 간접 노출인 셈. 여성주의는 응시의 대상으로 타자화된 여성의 알몸을 스스로 관찰 그리고 관할하라고 권한다. 육체에 대한 자기 통제권을 상징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여성의 보편성이 육체에 있다고 본 여성주의 철학자 엘리자베스 그로츠는, 육체가 억압의 대상이지만 또한 저항 공간으로 사유된다며 육체를 투쟁의 장으로 해석한다.  

남성 포주의 지배 논리를 차용한 왕언니?

<오메르타>의 선 채 오줌 누기는 성가신 자세지만 여성주의 운동이 취하는 공격적인 제스처 중 하나다. 간접적인 저항의 제스처를 취했던 장지아의 지난 여성 모델들이 <나는 고백한다>에선 숫제 매질의 주도권까지 거머쥔 가녀린 여자로 떠오른다. 또 7분짜리 동영상 <Mouth to Mouth 마우스 투 마우스>에선 줄지어선 남녀가 입에서 입으로 캐러멜을 전해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구부정하게 엎드린 남성 알몸으로 변한 캐러멜을 뱉는 건 마지막 주자인 여성 배우이다.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있다 His Face Was Twisted With Pain', 2009 

<나는 고백한다>(위 사진)에서 배우는 사디스트가 되거나 나체로 카메라 앞에 서야 한다.

<오메르타>의 영상물을 보면 나체의 비전문 배우들에게 선 채 오줌 누기를 주문하며 격려하는 장지아의 육성이 들린다(얼굴은 안 나옴). 연출이 주 임무가 된 그녀는 <나는 고백한다>에선 가녀린 여배우의 손에 매를 쥐여 벗은 남자 배우의 엉덩이를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때리게 했다. 또 입으로 질겅질겅 씹은 껌을 입에서 입으로 배우들끼리 건네게 시켰다. <오메르타>와 <나는 고백한다> 모두에서 배우는 홀딱 벗은 채 카메라 앞에 서거나, 매를 치켜드는 사디스트로 변신해야 한다. 난처한 포즈와 수행을 배우에게 요구하는 이 까다로운 연출가는 여성 육체를 상대화하여 지배하려는 남성 포주의 지배 논리를 차용한 왕언니처럼 보인다. 
그러나 장지아의 연출은 매춘의 형식 논리를 차용하되 한낱 볼거리에 그치지 않고 불편한 진실을 슬쩍 탑재해놓는다. 그럼에도 관객의 본능을 잡아끄는 관능미마저 포기하는 일은 없다. 아무리 부인한들 여성 육체가 억압의 지점이자 저항 공간인 건 사실인가보다. (서울 종로구 대안공간 정미소, 7월30일까지)
 
-출처 반이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