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ㅗ

봉만대는 이렇게 말했다

로드365 2002. 8. 21. 10:16


충무로 데뷔하는 에로 감독 봉만대 상봉기

이 글은 한 감독과의 네 번의 만남과 십여 차례의 전화 통화, 그리고 그가 만든 열다섯 편의 영화와 아직 만들지 않은 한 편의 영화에 대한 애증을 간추린 기록이다. 이것으로 그의 모든 것을 알 수야 없지만 모든 것을 안다 한들 또 어쩔 것인가. 그저 음지에서 일하며 양지를 지향해온 어느 영화감독의 습한 인생에 난생 처음 햇살이 비쳐든 이 순간, 그 따스한 촉감을 백만분의 일이라도 짐작할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리라.

고자질 - 상서로운 태몽

봉만대를 배기 전에 어머니 김금애 여사는 꿈을 꾸었다. 잘생긴 사내아이가 아랫도리에 매달린 고추에서 쌀을 쏟아내는 꿈이었다. 아니, 이것이 뭣이다냐? 자고로 태몽이라 함은 용이 승천하거나 거북이가 기어다녀야 하고, 하다 못해 뱀이나 자라라도 나와서 깝죽대야 하거늘, 기껏 쌀을 뿜는 고추라니. 설마 이것이 태몽은 아니것제. 웬걸, 태몽이었다. 얼마 후 김여사는 아이를 가졌고 열 달 후 셋째 아들을 출산하였다.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어느덧 자신의 태몽을 궁금해 할 나이가 되었고 하루는 어머니께 그 소상한 스토리를 여쭈었다. 여사는 마지못해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이 태몽은 아닐 것이고 그저 한순간 스쳐 지나간 꿈에 불과하다는 요지의 추측성 발언을 덧붙였다. 그러나 만대는 생각이 달랐다. 이는 필시 "뭔가 성적인 일로 성공할 것"이라는 운명적 암시리라. 그로부터 십수 년. 과연, 만대는 어머니의 꿈처럼 되었다. "뭔가 성적인 일"로 성공하고야 만 것이다.

모모 - 하음 봉씨 묵헌공파 28대손

봉만대는 에로 비디오 감독이다. 그것도 성공한 에로 비디오 감독이다. 봉만대가 에로 비디오 감독이라는 사실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인터넷 검색 엔진도 안다. 하지만 사람들은 아직 그의 이름 석 자를 알지 못한다. 행여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 즉 돼지 치는 큰형과 목사하는 작은형, "초등학교 5학년 때 함께 담을 넘어 영화관에 들어갔던" 고향 친구들과 봉만대의 영화계 입문을 도운 "비디오 유통업을 하시는 사촌형"이라면 "사람들이 봉만대를 모른다니, 알고 있는 우리들은 짐승이냐?"며 불쾌할지도 모르겠다(돼지 치는 큰형이 제일 불쾌하겠다). 하지만 4천 7백만 국민 중에 봉만대를 아는 사람 몇이나 되느냐며 다그치면 그들도 더는 대들지 못할 것이다.

봉만대라는 사람을 알지 못하니 그가 성공했는지 여부는 더더욱 알 턱이 없다. 데뷔 3년 만에 벌써 15편을 찍은 중견감독에다 한 편 한 편 비디오 가게에 깔릴 때마다 홈페이지에 "형님 존경합니다" 따위의 격려 멘트가 쇄도하는, 이 바닥에서 몇 안되는 스타 감독의 실체를 아는 자 매우 적다. 자기 말마따나 "여배우가 1순위이고 감독이 2순위"인 한국 에로 비디오 시장에서 그는 여전히 이름 없는, 아니 이름은 있지만 남들이 알지 못하는 '모모 감독'으로만 남아 있다. 그러나 머지않아 사정이 달라질 것이다. 얼마 전 영화사 '기획시대'는 하반기 라인업에 <사랑>(가제)을 올려놓았다. 연출 봉만대. 장르 에로틱 멜로. 예로부터 뼈대 있는 충무로 명가로 자리매김해온 전통의 기획시대가 영화판의 불가촉 천민과 다름없는 에로 비디오 감독과 손을 잡다니. 사건이었다.

그러나 FILM2.0에게 이것은 뜻밖의 사건이 아니다. 지난 2000년 우리는 이미 봉만대를 주목한 바 있다(FILM2.0 제2호 참조). 그의 예사롭지 않은 작가주의 영상에 주목했고 미학적 베드신에 감탄했다. 당시 "작금의 한국 에로영화는 내공을 쌓아가는 무사들의 도장"임을 역설했던 우리가 마침내 강호에 도전장을 던진 무사를 반기는 건 당연하다. 돼지 치는 큰형, 목사하는 작은형, 고향 친구들, 그리고 사촌형과 함께 봉만대를 알고 있는 한 사람으로서 기자는 일종의 사명감으로 다시 봉만대를 말한다. 한국 관객들은 봉만대를 알아야 한다. 주민등록번호는 7*****-******이고, 본적이 임권택 감독 고향과 같은 전남 장성군이며, 서울 성북구 안암 5가에서 벌써 2년째 거주한다는 '민쯩적' 사실 말고 아주 조금만 더 알아야 한다. 류승완의 입지전적 삶을 궁금해 하고 홍상수의 작품 세계에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봉만대에게도 그리 해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느냐?"고 항의해도 소용없다. "왜 그러지 말아야 하느냐?"고 반문할 테니까.

서설이 길었다. 이제 그를 만날 때다. 1970년 1월 21일, 아버지 봉현순과 어머니 김금애 슬하의 4남 1녀 중 3남으로 전남 광주에서 출생. 상서로운 태몽의 계시대로 일찍이 내밀한 성생활의 시각화에 탁월한 재능을 발휘한 하음 봉씨 묵헌공파 28대손 봉만대. 그와의 역사적인 인연은 20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년 7개월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천 년 - 받들 봉(奉), 일만 만(萬), 큰 대(大)

때는 2000년 12월 크리스마스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오후. 압구정동 구 키네마 극장 앞. 겨울답지 않게 따뜻한 날씨. 기억이 맞다면 그는 낡은 엑셀 자동차 운전석에서 첫 인사를 건넸다(옆자리에는 여자친구가 타고 있었다). 그날 두 번 놀랐는데 한 번은 예상보다 퍽 젊은 사람이라는 걸 눈치챘을 때고, 또 한번은 그 이름이 본명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다. 믿기 어렵지만 봉만대는 본명이다. 받들 봉(奉), 일만 만(萬), 큰 대(大), "많은 사람들이 크게 받든다"는 뜻쯤으로 해석하며 서른 해 넘게 쓰고 있는 이 이름은 만대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작고한 아버지의 유일한 유산이다. 자식들한테 번듯한 집 한 칸이라도 남겨주고 싶은 게 모든 아버지들의 마음. 그러나 팔자에도 없는 사업한다고 덤볐다가 그나마 남은 재산 다 들어먹은 처지라 고작 이름 석 자밖에 남겨줄 게 없었다. 그 사연 알고 보니 슬픈 이름이지만 모르고 들으면 여전히 웃긴 이름 봉만대. 아이들이 이 좋은 놀림거리를 그냥 지나칠 리 없다.

만대는 일제 치하에서 우리 말을 지키듯 난무하는 별명들 속에서 제 이름을 지키며 컸다. 봉만이, 만봉이, 봉달이, 뽕... 창의력 좀 있다 싶은 놈들은 "봉으로 만대 맞으면 졸업하겠다"며 작문 실력을 뽐낼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만대는 상관하지 않았다. "애들이 어떻게 부르든 내 이름은 봉만대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조롱과 멸시 속에서도 꿋꿋하게 에로 비디오를 만들었던 뚝심이 어쩌면 그때 단련된 건지도 모르겠다. 광주 광덕 고등학교 5회 졸업생으로 학창 시절을 마감할 때까지 만대는 그렇게 숱한 별명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가명이라고 의심한 사람이 없었다. 사회에 나오니 사정이 달라졌다. 통성명을 마친 사람들은 은근한 눈빛으로 이렇게 물어오기 일쑤다. "이름 참 재밌군요. 근데, 본명은 뭔가요?" 이게 다 봉만대의 직업 때문이다. 그가 큰형처럼 돼지를 쳤거나 작은형처럼 목사가 됐더라면, 혹은 아버지처럼 박제 사업을 하거나 어머니처럼 살림을 했다면 사정은 달랐을 것이다. 헐벗은 여배우들이 저마다 자신의 한가함을 자랑하는 비디오 재킷 한 쪽 구석에 깨알 같이 박힌 이름 봉만대. 그 공교로운 어감 때문에 가명의 혐의가 씌워질 만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나마 그 이름 기억해주는 게 어디냐며 고마워하는 것뿐이었다.

<휴머니스트>를 프로듀싱한 곽정덕 PD도 그 이름이 처음엔 가명인 줄로만 알았다. 봉만대의 다른 팬들처럼 그 역시 한국 에로 비디오 시장에 일대 파란을 일으킨 <이천년>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는데, 봉만대의 다른 팬들과 달리 직접 만날 결심을 했다. "잘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뭔가 다른 것만은 분명한" 이 영화를 누가 만들었는지 궁금했다. 그러나 쉽게 찾을 수 없을 것 같아 이내 포기했다. 에로 감독 중에 가명 쓰는 사람이 많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충무로에서 안 되니까 에로 비디오업계로 흘러간 사람, 방송국에서 밀려난 후 산 입에 거미줄 칠 수 없어 카메라 든 사람, 내 비록 오늘은 이따위 에로나 찍는다만 내일은 불후의 명작을 찍으리라 다짐하는 자들은 가명을 썼다. 사랑을 연필로 쓰듯 이름은 가명을 써야 이 다음에 성공한 뒤 인생의 오점을 지우개로 깨끗이 지워낼 수 있다는 계산이었다. 봉만대는 달랐다. "자기가 에로영화를 찍는다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더라구요. 딴 데서야 감독이 자기 작품에 이만한 전권을 행사할 수 있겠냐면서" 겨우 알아낸 연락처로 전화를 걸어 대뜸 "당신의 팬인데 한 번 만나고 싶다"며 봉감독의 안암동 자택으로 찾아간 곽PD는 첫인상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다. 내친김에 소주 한 병을 같이 비운 인연으로 그는 지금 봉만대의 충무로 데뷔작 <사랑>의 프로듀서를 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FILM2.0과 만났을 때도 봉감독은 "비록 지금은..." 따위의 말을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은 것으로 기억한다. 대신 "진짜 찍고 싶은 에로도 못 찍고 있다"며 영세한 인프라를 한탄하거나 "진정한 에로는 남녀가 손잡고도 볼 수 있는 영화"라며 관객층의 다변화를 고민하는 모습을 보였다. 심지어 "관객이 내 영화를 보고 섹스가 하고 싶어지길 바란다"며 에로영화의 비아그라적 효능을 염원하기도 했다. 물론 봉감독 역시 "언젠가 기회가 오면 극영화 연출을 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다. 대신 적어도 4,5년은 기다려야 할 거라고 했다. 아직은 이 시장에서 해볼 것이 남아 있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거사일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연어 - 야할 땐 확실히 야할 겁니다

봉만대를 다시 만난 건 2002년 7월 29일. 구 키네마 극장 건너편 한 카페였다. 이번에도 두 번 놀랐는데 한 번은 그때와 다른 여자를 데리고 나타났을 때고, 또 한번은 그 사람이 여자친구가 아니라 기획시대 기획실 직원이라는 걸 눈치챘을 때다. 봉만대의 달라진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장면이다. 달라진 건 또 있다. 웃음이 많아졌고 비유가 늘었다. 솔직히 첫 만남에서는 지나치게 진지했다. 본인 말대로 "인터뷰가 낯설어서"였겠지만 혹시 남이 진지하지 않게 볼까 봐 일부러 진지한 면모를 강조한 건 아니었을까 싶을 만큼 진지하고 또 진지했으며 이제 됐다 싶을 때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진지했다. 그랬던 사람이 이번에는 말을 한 번 끝낼 때마다 입술 양쪽에 가벼운 미소를 내걸었다. 그 미소 뒤엔 어김없이 갖가지 비유가 따라붙었다. 저번 인터뷰에서도 "가슴이 작으면 실리콘을 넣으면 되지만 연기력이 부족한 건 채울 수 없다"는 명언을 남긴 봉만대는 그 사이 더욱 화려해진 화술을 선보였다. "에로 감독이 아니라 애로(愛路) 감독"으로 불러달라거나 "충무로 시스템이 거품이라던데 우리 시스템은 게거품"이라 표현하는 대목에서는 전에 없던 노련미마저 느껴졌다. 종합해보건대 이 모든 변화는 오랜 헝그리 시절을 마감하고 마침내 주류 질서에 편입한 '가진 자의 여유'라고 잠정 결론지을 만했다. 그런데도 봉만대는 극구 "변한 건 모자뿐"이라고 말한다. 에이, 농담도. 하지만 그것이 농담이 아니며 정말 변한 건 모자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건, 우려낸 허브차 한 잔을 다 비우고 막 새 물을 부을 때 튀어나온 한 마디 때문이다. "이 영화 제 첫 영화 아니거든요. 열여섯번째 작품입니다."

사실 <사랑>은 그의 열여섯번째 영화가 아니다. 엄연히 데뷔작이며 고로 첫 영화다. 충무로의 계산법에 따르면 그러하다. 하지만 봉만대는 자기 필모그래피를 충무로 영화와 비충무로 영화로 나누는 데 결사 반대한다. 이건 단지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 제 영화에 고루 애정을 쏟는 감독의 아량으로만 볼 수 없다. 애초 계획보다 일찍 충무로에 발을 들인 계기가 "비디오로는 다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지 "더이상 비디오로는 찍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허브차를 다시 우려내기 위해 새 물을 붓는다고 해서 더이상 허브차가 마시기 싫다는 의미가 아닌 것처럼. 심지어 "이 영화 이후에도 다시 비디오 영화를 찍을 수 있다"고까지 말했다. 이건 약간 오버다 싶었지만 따져 묻지 않았다. 왠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약속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왜 그런 것 있잖은가? 배고팠던 시절 잊지 않겠다고 배고픈 사람 거두어 밥먹여주는 사람들. 그러나 이미 충무로의 선악과를 베어 문 그가 다시 비디오업계로 돌아가 쓰디쓴 쓸개를 씹으며 버티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충무로 감독이 에로 비디오 찍네, 얼레리 꼴레리 손가락질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그가 무서운 건 따로 있다.

"적어도 극장에는 리모컨이 없잖습니까?" 곽PD가 들으면 서운하겠지만 봉만대는 자기를 충무로에 밀어넣은 일등 공신으로 리모컨을 꼽았다. "에로 비디오는 리모컨으로 돌려봅니다. 내용에 상관없이 장면에 집착할 수밖에 없어요" 결국 봉만대는 '극장 감독'이 되고 싶었다기보다 하루라도 빨리 '극장 관객'을 만나고 싶었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극장 관객은 비디오 관객보다 인내심이 많은 사람들이다. 하지만 아무리 극장 관객이라 해도 리모컨 생각이 간절한 영화를 견딜 재간은 없다. 게다가 천 원짜리 한 장을 지불하는 비디오와 달리 극장은 최소 7천 원을 내고 들어온다. 산술적으로 따지면 7배의 재미를 줘야 한다. 그는 그 차이를 알고나 있는 걸까. "야할 땐 확실히 야할 겁니다. 돈을 지불하고 온 고객(관객이 아니라!)을 무시하면 안 되죠" 그렇다고 공중부양섹스와 풍차돌리기를 기대하는 건 안 될 일이다. 봉감독의 목적은 해보고 싶은 체위가 아니라 해보고 싶은 사랑을 보여주는 데 있다. 마치 고향으로 돌아가는 연어처럼 봉만대는 맨처음 자기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로 돌아왔다. 지난 열다섯 작품 속에서 미처 하지 못했던 이야기, 하긴 했지만 리모컨이 앗아간 이야기, 바로 사랑이다.

"길을 가다가 두 연인을 봤어요. 서로 너무 사랑하길래 그들의 사랑 이야기를 카메라에 담기로 했죠. 그러다 6개월 뒤에 헤어지더라구요. 그 만남과 헤어짐의 과정을 모두 찍어두었습니다." 하도 분위기 잡고 얘기하길래 <죽어도 좋아>의 청년판이냐고 물었다가 괜히 핀잔만 들었다. 실제로 그렇게 찍었다는 게 아니고 그런 느낌으로 찍는 영화라는 설명이다. 주인공은 대전에 살고 있는 두 남녀다. 둘은 서로 모르지만 우연히 서울에서 마주친다. 자기 제품을 납품하기 위해 동대문 의류상가에 들른 의상 디자이너 신아는 유니폼을 사러 온 호스피스(간병인) 동기를 만난다. 동대문 인파 속에서 이루어진 운명적 만남. 충동적인 잠자리로 이어진다. 그리곤 주인공의 대사, "우린 손부터 잡았어야 했는데" 그로부터 15일 후. 동기는 자기가 입었던 옷이 걸려 있는 옷가게를 발견한다. 그건 신아가 동기를 기억하며 걸어둔 옷이다. 그때부터 둘은 데이트를 시작한다.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는 일반적 연인의 단계를 뒤늦게 밟아나간다. 그러다가 권태기에 접어들고 어느새 사랑은 서로에 대한 짜증으로 변해 있다. 일반적 연인들의 단계대로.

그 다음은 "자신의 땀구멍까지 모두 열어 보이는" 여자가 결국 사랑하지 않는 다른 사람과 충동적인 섹스를 하고 그 때문에 갈등하다 헤어지는 연인의 이야기를 그릴 예정이라고 했다. 순간, 역시 기획시대가 만들었던 <미인>의 그림이 두둥실 떠올랐다. 어떻게 알았는지 봉감독이 서둘러 그 그림을 지워버린다. "절대 관념적으로 찍지 않을 겁니다. 철저하게 대중영화로 갑니다. 경쾌하게 가다가 슬퍼지고 그러다 다시 희망이 넘치고." 하긴, 잘 모르시겠지만 봉감독 영화는 늘 그랬다. <이천년>부터 <고자질>까지 그의 영화는 웃긴 주인공들의 슬픈 사랑이야기, 혹은 슬픈 주인공들의 웃긴 사랑이야기였다. 그 묘한 정서를 그저 "밑바닥 인생들의 삶이 원래 그렇다"고밖에는 설명하지 못하더니 이번엔 대답을 준비한 듯했다. "환갑잔치 같아요. 처음엔 밴드 부르고 흥겹다가 중간에 어버이 은혜 한 번 부르면 서글퍼지잖아요. 둘의 사랑이 꼭 그래요." 역시 봉만대, 비유가 많이 늘었다.

일심 - 그는 어떻게 에로영화에 입문하였나

봉만대가 <사랑>을 구상한 건 오래 전이다.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곽PD를 처음 만나 소주 한 병을 나눠 마시던 그 날이며, 가깝게 보면 올해 초다. 첫 만남 이후 언젠가 "작지만 매력 있는 영화" 한 번 같이하자고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작지만 매력 있는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고, 작지만 매력 있는 영화사를 찾았다. 그러다 큰 데다 매력까지 있는 기획시대가 제작을 결정한 게 올 2월 초에 계약하고 그 달 말에 합숙을 시작했다. "이 시대에 어떤 에로를 해야 할 것인가를 놓고 토론했죠." 웬지 에로영화 시나리오는 술 한 잔 걸치고 낄낄대며 만들 것 같지만 곽PD 말을 들어보니 실상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사랑으로 인해 생겨나는 모든 일들을 다루고 싶다. 그중에 섹스도 있겠지. 단순히 성에 집착하거나 성에 빗대어서 다른 얘기로 만드는 짓은 하기 싫다. 이미 훌륭한 감독들이 한 일을 흉내낼 필요는 없잖아?" 봉감독 얘기에 곽PD는 쉽게 동의했다. 이미 한 번 크게 다투었던 전력이 있어 새삼 다툴 일은 없었다.

봉만대와 곽PD의 갈등이 극에 달했던 건 <아파바>를 만들 때였다. "하루는 제가 에로영화는 결국 동어반복 아니냐고 말했어요. 만대가 그 말에 많이 삐쳤죠." 곽PD는 에로영화는 인물만 바뀌지 결국 같은 얘기 아니냐고 말했고 봉만대는 그 안에서도 얼마든지 실험할 영역이 있다고 버틴 것이다. 따져보니 그 시점이 첫 인터뷰 전이었다. 당시 봉만대의 진지하고도 또 진지한 표정은 어쩌면 자기 일에 대한 근본적 회의의 과정에서 뿜어나온 오기였던 모양이다. 사실 봉만대의 에로영화 사랑은 유별난 데가 있다. 비록 태몽이 상서롭기는 했어도 그가 처음부터 에로영화에 청춘을 바칠 이유는 없었다. 스물한 살에 "비디오 유통업을 하시는 사촌형" 소개로 뛰어든 충무로 판에서도 그가 처음 참여한 영화는 <돌아온 손오공>. 코미디언 이원승이 만든 아동영화였다. 두 번째 영화는 <영웅 후레쉬 맨>. 역시 강남길이 주연한 아동영화였다. 아동영화를 하다보니 아동이 만들어진 과정이 궁금해진 것도 아닐 테고 그는 어떻게 에로영화에 입문하는가? 군대에 다녀와서 강용규 감독(얼마 전 <턴잇업>을 만들었다) 조감독으로 들어가 <휘파람 부는 여자>를 만들 땐가? 성인이 만들고 성인이 보았으니 성인영화였지만 에로영화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96년 CF에 뛰어들면서인가? 그럴 리가 없다. 곧 죽어도 제 손으로 뭔가 해보겠다며 이를 악문 봉만대는 98년,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영화사를 차렸다. 에로영화와 이때 인연을 맺었다. 돈 적게 들이고 많이 벌 수 있는 게 에로영화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얘기를 하면서 자기 생각을 구체화 하는 버릇"처럼 에로영화에 대한 애정과 신념은 일단 영화를 만들면서 생긴 것이다. 어느 조폭 팔뚝에 새겨져 있다는 일심(一心)이 언제부터인가 그의 것이 되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한 우물을 파자고 다짐했다. 동생 하는 일이 이거라며 비디오 하나 줬더니 그 뒤로 얘기도 없는 작은형, 누가 목사 아니랄까봐 밤마다 "우리 만대 하나님 품으로 돌아오게 해주세요" 기도한다는 작은형에게도 이제는 말할 수 있다. "형도 그거 하잖아. 그래서 조카들 낳은 거 아냐. 근데 왜 이상하게 봐?"

딴따라 - 형님 수고하십니다

평생 스파링 파트너만 하던 선수가 프로무대에 데뷔하는 설렘이 이와 같을까? 스페인 팀 네번째 키커 호아킨의 슛을 기다리는 이운재의 불안이 이와 같을까? 막상 시작은 했는데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여기는 충무로다. 6mm디지털 카메라로 6일 만에 영화 한 편 완성하던 때와는 상황이 다르다. 곽PD는 "협동작업을 한 번도 안 해본 친구"라며 내심 걱정을 감추지 못한다. 그 문제라면 누구보다 봉감독 자신이 절감하고 있다. 비디오로 찍을 때는 자기 생각을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었고 그럴 새도 없었다. 속된 말로 봉만대가 '필이 꽂히는 대로' 찍으면 그게 곧 봉만대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충무로는 다르다. 감독 생각을 공유하지 못하면 영화는 만들 수 없다. "차라리 마네킨을 두 개 달라고 그랬어요. 내가 혼자서 찍어올 테니 한 번 보라고. 비디오는 찍어서 보여주면 되는데 이걸 말로 다 하려니까 미치겠더라구요. 내가 사기꾼이 아닌 이상." 그는 그걸 "홍역을 앓았다"고 표현했다. 홍역은 한 번 앓으면 면역이 생긴다. 비주얼로 보여주는 데 익숙한 봉만대 감독을 대신해 밤새워 시나리오를 글로 옮겼야 했던 곽 피디는 그런 면역력이 이 영화에도 생기길 기대한다.

상황이 이렇다고 주눅이 들 봉만대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에로"라고 내세울 영화를 만들기 위해 머리를 감싸쥐고 있다. "필요하다면 하늘의 구름조차 엉덩이 모양으로 만들까 생각중"이라는 그의 말에 도리어 스탭들이 머리를 감싸쥐겠지만. 그런 봉감독을 가리켜 곽PD는 "노력하는 광대"라고 부른다. 광대는 늘 대중의 반응을 염두에 두는 사람이다. 대중과 호흡하며 대중들이 스스로 즐거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부추기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자기도 섹스하면서 남들에게 섹스를 부추기는 봉감독이야말로 기꺼이 광대로 불려야 마땅한 사람이다.

<사랑>은 곧 촬영을 시작한다. "사랑도 섹스도 진짜처럼 연기할 신인배우가 정해지는 대로" 찍을 예정이니 아마 9월이 될 것이다. 이 영화가 2002년 한국영화의 지형도를 읽는 데 키워드가 될지 맥거핀이 될지 지금으로선 알 수 없다. '에로 비디오 감독'이라는 출신 성분이 낙관이 될지 낙인이 될지도 아직은 알 수 없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충무로에 갔다고 해서 봉감독의 작품 세계가 변하길 원치 않는" 사람이 곽PD 하나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의 홈페이지에는 오늘도 그를 아끼는 팬들의 글이 오른다. "형님 수고하십니다"

사진 한희성

*이 글의 각 장은 지금까지 봉만대 감독이 만든 에로 비디오 제목에서 힌트를 얻었습니다. 인용한 영화는 다음과 같습니다.

고자질 2001 | 출연:김한, 오희림
모모 2001 | 출연:김한, 시마무라 가오리
이천년 2000 | 출연:이천년, 이규영
연어 2000 | 출연:이규영
일심 2000 | 출연:이천년
딴따라 2001 | 출연:김한, 박진위


2002.08.13 / 필름2.0 김세윤 기자  




˝넌 멜로 하냐? 난 에로 한다˝

Q:처음 섹스한 게 언제죠?
A:고등학교 졸업한 뒤 여자친구하고 했는데요. 사실 마스터베이션을 알게 된 것도 얼마 안 된 상태였어요. 주위 친구들에 비해 굉장히 발육이 늦었죠. 뒤늦게 눈떠서 그런지 욕심이 과하게 생기더라구요. 군대가기 전까지 정말 많이 했어요. 나이트클럽에서 통성명하고 나면 곧장 자러 가곤 했으니까. 그렇게 1년 정도 보냈더니, ‘만나서 하는’ 과정이 너무 지겹던데요. 그뒤로는 시들해졌죠
Q:성이란 게 어차피 호기심으로부터 출발하죠. 어떨 때 섹스하고 싶은 욕구가 일어요?
A:비오는 날 있잖아요. 부슬비말고. 우박만한 굵기의 빗방울이 떨어지는 날. 그런 날은 창 밖을 보고 있으면 증상이 정말 심해요. 반대로 너무 밝은 날은 죽어도 하기 싫어요.
봉만대(32) 감독은 엉뚱한 데가 있다. 오디션 보기 위해 찾아온 남자배우에게 ‘별걸’ 다 물어본다. 동석한 매니저가 여자인데도 거리낌없다. 심지어 중간에 자신의 경험까지도 친절하게 들려준다. 영문 모르는 이로선 “웬, 성상담 클리닉?” 할 것이다. 조금 지나자 매니저도 뻘쭘했는지 은밀한 대화에 끼어든다. ‘별난’ 오디션이지만, 기겁할 필요까진 없다. “섹스해봤냐?”고 대뜸 묻는 무뢰한도 아니고, 섹스 이야기만 줄줄이 늘어놓는 호색한은 더더욱 아니니까. 그렇담 왜 하필 섹스? “저요. 봉만대. 에로감독이거든요. 근데요. 그냥 에로감독은 아니거든요.”

충무로, 1%에 10억원을 걸었다

예정대로라면, 기획시대에서 제작하는 봉 감독의 <사랑>(가제)은 9월 초에 크랭크인한다. 불과 한달 뒤다. 남자배우는 대강 윤곽이 그려지는 중이다. 여배우는 좀더 만나서 캐물어야 한다. 어찌됐건 감독이 일대일 만남을 느긋하게 즐길 만한 상황은 분명 아니다. “공개 오디션을 하면 배우들의 우열을 가리기 쉽다”는 사실을 모르는 걸까. 물론 안다. 동시에 그는 우려한다. 이 경우, 배우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자신이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는 몇 가지 테스트만으로 ‘가능성’까지 판단할 순 없다고 믿고 있다. 스스로 ‘인물탐구’라고 명명한 특이한 오디션 작업을 택한 것도 오차를 줄일 수 있기 때문에서다. 그는 오디션에 “내 자신을 상대에게 설명하는 과정도 필요하다”고 덧붙인다.

말하지 않아도, 이건 그의 전력(前歷)과 관련이 있다. 그는 자신이 충무로 데뷔전의 기회를 거머쥘 수 있었던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제작사에서 내 영화를 만드는 건 일종의 모험이다. 보일까 말까한 가능성 1%에 10억원을 걸었기 때문이다.” ‘음란하고 저속하기 그지없는’ 15편의 에로비디오가 그 1%의 근거다. 부연하면, 그는 천출(賤出)이다. ‘에로비디오 출신’ 감독인 것이다. 에로비디오 재킷에 붙은 ‘빨간’ 딱지를 보라. 단순히 18세 관람불가를 의미하지 않는다. 대다수는 여전히 ‘불량식품’이라고 여기고 있으며, 딱지는 이를 판별하기 위한 손쉬운 표식이다. 정리해보면, ‘불량식품’ 만들던 그 감독, 어찌하여 지금 충무로에 있단 말인가 정도다.

‘에로비디오 출신 감독 1호’라는 세간의 수식은, 그래서 봉만대 감독에겐 부담이다. 그는 “이번 작품이 데뷔작이 아니라 16번째”라고 말한다. “이번에는 35mm 카메라로 작업하는 것이 다를 뿐”이라고 여러 번 강조한다. 또한 충무로가 인생 최대의 목표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어떤 영화를 만들어 내느냐에 따라” 주류와 비주류를 나누는 경계에 균열을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기대한다. 역풍을 뚫고서 그는 과연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까. 구로사와 기요시나 수오 마사유키 같은 일본의 핑크빛 기린아의 탄생을 기대하는 건 무리일까. 지난 3년 동안 그가 치른 ‘밑바닥 분투’로 판단해보시길.

눈물나는 15년 전 한마디, “무슨 학예회냐”

“크는 애, 기죽이지 맙시다.” 그의 여덟 번째 AV(Adult Video) <아파바>에 나오는 대사다. 래퍼를 꿈꾸는 파도라는 이름의 남자주인공은 오디션장에서 수모를 당한다, 결국 분을 이기지 못하고 심사위원에게 독하게 한마디 내뱉는다. 부탁이니, 제발 기 좀 죽이지 말라고. 지금으로부터 15년 전. 그 또한 똑같은 대사를 속으로만 읊었다. 당시 서울예대 동랑예술제에 참가하기 위해 친우 셋과 함께 서울행 기차에 올랐던 그는 “이게 무슨 학예회냐”는 핀잔만 듣고 낙향하면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 경멸의 시선을 잘근잘근 씹어 삼켰다. 촌놈 넷이서 연극을 한다는 것 자체가 고매하신 심사위원들 눈엔 우스꽝스런 쇼로 보였을지 모른다.

“뭘 좋아하는지 몰라, 뭘 해야 할지 모르던” 시절, 무대를 찾고, 배우를 꿈꾼 건 뜻밖에 얻어들은 칭찬 때문이었다. ‘너 얼굴보니 배우해도 되겠다’는 친구 애인의 말에 ‘혹’한 것. “넌, 이거 하면 잘하겠다”는 기대 한번 받지 못한 터라, 그는 곧장 연기학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잠재된, 아니 숨겨진 끼라도 있었던 것인지, 이후 학교에서 행사가 열리면 으레 사회를 도맡는 처지가 됐고, 슬그머니 솟은 용기를 무기로 내친 김에 서울에서 벌어진 큰 무대에 도전했다 쓴잔을 들이켠 것이었다. 그는 “상을 달라는 게 아니었다. 이왕 내준 무대라면, 내버려둬도 될 텐데. 대사 버벅거린 게 무슨 큰일이라도 난 듯 면박을 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공부가 뒷전이어서였는지, 연기 실력이 모자랐는지. 그는 대학 문턱을 밟지 못했다. 당구장 아르바이트를 해가며 번 돈으로 연기학원에 등록해서 이듬해 재기를 노렸지만, 그가 독학으로 해낸 건 눈대중만으로 ‘짠 80’이라는 당구 실력(?)만을 얻었을 뿐이었다. “불 꺼놓고 당구장 다이에 누웠는데, 내가 뭐하는 놈인가 싶어 여러 차례 울었다”는 그는 결국 배우에의 꿈을 접는다. “어느 날 전자대리점의 캠코더에 찍힌 내 얼굴 보니까 아무래도 배우 얼굴은 아니었다”는 판단도 작용했다. 이후 상경해서 친척집에 기거하면서 눈칫밥을 먹던 그는 사촌형의 소개로 충무로 언저리를 맴돌다, 90년 이원승 주연의 아동영화 <돌아온 손오공>의 조감독으로 발탁되어 첫 월급 30만원을 받아들었다. “말이 조감독이지 완전히 시다바리였다”는 그는 이후 강남길이 <한지붕 세가족>의 인기를 등에 업고 출연했던 <영웅 후레쉬맨>에 참여한 뒤 군에 입대한다.


촬영장에서 생긴 일-
....<도쿄 섹스피아>
연이은 밤샘촬영 때문이었나. 3일째 헤드폰을 쓰고 있는데 환청이 시작됐다. 분명 한국말로 대사를 줬는데, 어찌 된 게 배우들의 대사가 내 귀엔 일본어처럼 들렸다. 나뿐 아니라 조감독도 헤드폰이 이상하다고 그랬다. 그나마 마리아 역으로 출연했던 사이키 교코가 아니었다면 마지막까지 견뎌내지 못했을 것이다. 예쁘냐고? 아니다. 미안한 말이지만, 외모는 좀 아니었다. 미모까지 갖춘 배우들을 쓰려면 하루에 1천만원이나 줘야 하는데, 그 돈이 어디 있나. 하지만 촬영에 들어가자 교코는 누구보다 열심이었다. ‘마리아’ 하고 부르면 그녀는 항상 뛰어왔는데, 괜히 불렀다고 여겨질 만큼 황송했다. 질문이 많은 배우기도 했다. 신혼여행을 한국으로 왔었다는 그녀는 초짜 감독인 내게 서툰 한국말로 왜 왼손으로 담배를 펴야 하는지, 왜 여기서 치마를 벗어야 하는지를 끊임없이 물어댔다. 그녀에게 수치심 같은 건 볼 수 없었다. 모두들 녹초가 된 마지막 날. ‘엔딩 대강 찍고 접자’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던 그날도 교코는 5차례 테스트가 맘에 안 들었는지 감정에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을 더 달라고 졸랐다. 어쩔 수 있나. 열성에 감복하는 수밖에.

....<연어>

한달 전 찍었던 <이천년>에서도 주연 여배우가 출연 사실을 알게 된 부모에게 촬영 도중 붙들려가서 애를 먹이더니 이번에도 마지막 날 대형사고가 터졌다. 이규영이라는 배우가 출연키로 했는데 갑자기 증발한 것이다. 촬영 당일까지도 몰랐던 일이라 황당함은 극에 달했는데, 더 갑갑한 건 대타로 나온 정희빈이라는 이름의 여배우가 도대체 대사 암기가 안 된다는 사실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었지만, 그렇다고 화를 낼 수도 없었다. 본인도 갑작스런 일이라 놀랐을 법도 해서 할 수 없이 대사를 줄이고 상황만 설정해서 표정만 따오기로 결정했다. <이천년>이 사건을 중심으로 동적으로 끌고가려 했던 것과 달리 어차피 이번엔 심리묘사라든지 정적인 느낌을 강조해보자는 의도였으니 오히려 잘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더 큰 난제가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배우가 노출은 죽어도 싫다고 했다. 에로영화 찍는데 안 벗겠다니. 시간이라도 충분했다면 설득이라도 했겠지만, 그러고 말고 아웅다웅할 겨를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겨울에 바깥에서 옷 입고 관계를 갖는 설정으로 바꾸었고, 주로 얼굴만으로 섹스의 느낌을 전달해야 했다. 나중에 영상원 학생들이 “<연어>가 죽인다”고 했다는데, 이런 사정을 알았다면 글쎄.

....<고자질>

2001년 4월이었으니까 멀쩡한 봄날이었다. 지원받은 외제 오픈카까지 굴리면서, 강원도 속초에서 촬영하고 있었는데 난데없이 눈이 왔다. 뭐 별 뾰족한 수가 있는가. 시나리오에 없던 겨울장면을 추가로 집어넣기로 하고 일단 찍는 수밖에 없었다. 또 처음으로 내 영화에 부유층 자제를 등장시키긴 했는데, 헌팅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일단 속초에서 부티나는 집을 찾는 것도 힘들었고, 간혹 발견한 집이라 하더라도 우리에게 선뜻 촬영을 허락해줄 리 만무했다. 죽도록 돌아다니다 발견한 곳이 그나마 분위기 낼 수 있는 방갈로. 사정해서 겨우 찍었는데 이 장면은 나중에 심의에서 잘려나갔다. 그러다보니 재력을 가진 인물임을 드러낼 수 있는 설정이라곤 영화 속에선 오픈카밖에 없었다. 야외에 오픈카를 세워두고 정사를 벌이는 장면을 집어넣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실제로 갑작스레 엄습한 추위 때문에 닭살 돋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면서 인간적인 미안함과 함께 우리나라가 동방예의지국일 수밖에 없는 건 필시 기후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겨울엔 추워서 못하고, 여름엔 더워서 못하고. 남는 건 봄, 가을인데 즐기기엔 너무 짧은 것 아닌가 하는.

....<모모>

조건은 예전보다 좋았다. 일본쪽 업자들이 촬영장소뿐만 아니라 이름있는 배우를 캐스팅해주기로 약속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은 드라마를 원한다고 했다. 어차피 노출과 표현 수위로만 따지면 일본 포르노물과의 경쟁이 안 될 테니 그 안에서 뭔가 재밌는 이야기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내 영화 역시 어차피 일본처럼 실연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영화적인 구성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촬영이 진행되는 도중 일본쪽 배우들이 ‘못 벗겠다’는 선언을 한 것이다. 처음엔 누굴 생각하고 시나리오를 썼냐고 묻기에 별 생각없이 한국 사람을 염두에 두고 썼다고 말했다가 일본 여주인공의 기분을 언짢게 한 것이 화근인 줄 알았다. 결국 한국과 일본, 양쪽 제작사쪽의 의견 차이가 있어 그런 것인데. 어쨌든 우리쪽도 그때는 ‘카메라 걷어’라는 초강경 대응으로 맞서기도 했다. 물론 난 ‘이거 접으면 안 되는데’ 하는 생각뿐이었다. 말을 하진 못했지만 말이다. 곧잘 촬영현장에서 우황청심환을 먹지 않았더라면 그때 어떻게 버텼을까 싶다. 양쪽의 강경한 기류가 사그라들고 나서 촬영은 재개됐는데, 쫑 하던 날 일본 배우들이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저 여배우가 날 좋아하는 거 아닌가’ 하는 착각도 잠시 했었다.




강용규, 내겐 형님 같은 스승
제대한 뒤 <휘파람 부는 여자> <용호의 권> 등의 영화에 조감독으로 복귀했고, 이듬해인 95년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한다. <언더그라운드>는 제작사의 원안을 각색했고, <킬링게임> <킬러> 등의 시나리오를 썼다. 스스로 재주가 남달랐기보다는 현장이 자신에게 그걸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심지어 감독이 “다음 대사 뭐야?”라고 물었을 정도로 촬영현장에서 급하게 시나리오를 써낸 영화도 있다. “지금이야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만, 그땐 예를 들어 살수차 오기만을 기다려선 안 됐다. 시간이 지연되면 중간에 호스를 뚫어서라도 물을 뿌려봐야 했다. 시나리오 작업도 마찬가지였다. 현장에서 습작한 셈이다.”

그는 영화촬영이 없는 날이면 광고, 방송쪽 일을 맡아 촬영스탭으로도 활동했다. 혹시 경제적인 이유? 아니다. 조감독 때 곧잘 배우로 카메라 앞에 서곤 했는데, 매번 감독말 듣고 가서 서 있으면 촬영감독이 그 위치가 아니라고 화를 내더라는 것이다. “도대체 촬영감독들은 왜 그리 곤조가 센가” 궁금해서 직접 촬영부에 들어가기로 맘먹었다는 그는 몇편의 광고를 찍은 뒤 “촬영감독의 오케이 사인은 현상을 해보기 전까지는 알 수 없는 것이라 매순간 긴장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처지를 이해하게 됐다”고 말한다.

길지 않은 충무로 생활 동안 그가 잊지 못하는 감독은 무술감독 출신의 강용규다. 이전에도 여러 차례 밝힌 적이 있어, “사부의 명망이 그리 높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존경하는 이유가 뭐냐”고 대뜸 무례하게 물었더니 그는 “들어갈 때 타이틀 보고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충무로에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고, 내게 이야기를 한번 써보라고 기회를 제공해 준 사람은 그분이 유일했다”며 자신에겐 ‘형 같은 존재’라고 답한다. 실제로 같이 작업할 무렵, 다른 곳에서 같이 일하자는 제의를 수차례 받았지만 모두 거절한 것도 강용규 감독 때문이다.

IMF 한파로 인한 제작편수 감소를 몰고 왔고, 그는 결국 백수 신세가 된다. 그 무렵, <휘파람 부는 여자>의 제작부장을 했던 형이 연결해준 제작사에서 에로비디오 연출 제의를 받는다. 이른바 한·일 합작 프로젝트. 편당 개런티가 100만원 수준이라는 것도 구미를 당겼지만, 무엇보다 카메라를 들 수 있다는 기쁨에 냉큼 받아들였다. 일본까지 가서 찍은 <도쿄 섹스피아>는 열성적인 일본 배우들을 보면서 놀라기도 했지만, 핸드헬드로 공들여 찍었던 5분 이상의 후반부 드라마 장면이 제작자에 의해 무참히 잘리는 치욕을 당하기도 한 작품이다.

에로비디오가 어때서?

그렇다고 에로비디오는 좀 너무한 것 아닌가. 하긴, 그는 어렸을 때부터 성에 관한 관심이 남다르긴 했다. 그가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하는 영화들은 <무릎과 무릎사이> <뽕> <나인하프위크>였고, 일찍이 <소녀경> 같은 고전과 <부부클리닉> 같은 실용서적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건강 다이제스트>를 두루 섭렵하고 꾸준히 독파해온 탓에 ‘에로’에 대한 특별한 거부감이 없었다. “충무로에서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두려움 같은 것은 없었다. ‘너 멜로 할래, 나 에로 할게’ 뭐 그런 주의였다. 에로가 저열하다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가져본 적이 없다.”

봉만대, 라는 이름 석자를 각인시킨 두 번째 작품 <이천년>의 원제는 <핑크 펑크>.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시나리오 쓰는 데만 6개월이나 공을 들였으나, 정작 자신의 스타일을 받아준 제작사가 없었던 터라 결국 섹스장면을 늘려 AV로 제작했다. 그는 이 작품에서 드라마를 전면에 내세웠다. 2000년이 시작된 순간 감방 신세를 지게 된 세 젊은 남녀의 행적을 플래시백으로 뒤집는 <이천년>은 매순간 빠른 호흡의 영상으로 끌고 들어가는 점도 돋보였지만, 무엇보다 돈에 젊음을 저당잡힌 이들의 엇갈린 욕망을 구체적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거친 이야기 구조지만 보기 드문 시도였다.

“노출이오? 그거 중요하죠. 근데 그건 누구나 다 찍을 수 있어요. 눈 맞아서 옷 벗기고 관계 갖는 것만 계속 찍는다면 무슨 소용이냐구요” 그는 매번 AV업계의 불문율을 어긴다. 가장 먼저 온갖 체위를 전시하며 벌어지는 성교장면. 다른 감독들에 비하면 턱없이 짧고 부족하다. 대신 앞뒤 시간을 잡아먹는 설정들은 무지 많다. 또 배우들은 진지(?)하지도 않다. 그들은 몰입해야 할 심각한 상황에서 장난을 치고 시덥잖은 대사를 쳐댄다. 그는 제작사는 안중에도 없는지 일부러 ‘컷’이라고 외쳐놓고서 릴렉스된 상태에서 배우들의 실제 대사들을 따서 편집 때 쓰기 위해 애쓴다. 그러니 신음소리는 그만큼 줄어든다. 이런 경향은 그의 열다섯편 AV 작품 중 뒤로 갈수록 더 심해진다.

지난해 출시된 <모모>의 한 장면. 카메라는 관계를 맺는 두 남녀를 잡지만, 전혀 미동하지 않는다.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다. 한참 흥분이 고조되려는 순간, 카메라는 갑작스럽게 90도로 우회전 해서 이동한 뒤 한발 물러선다. 그와 동시에 황급히 옷을 입고 도망치는 남자의 모습이 보인다. 일반적으로 에로비디오의 섹스장면에선 오직 숨소리와 살이 부대끼는 효과음에 힘입은 육체의 현란한 움직임만이 허용되어야 한다. 특히나 처음 보는 이를 사로잡기 위해선 필수다. 그러나 <모모>는 주인공이 일본으로 잠입해서 마약밀매를 하느라 언제나 쫓겨다니는 캐릭터라는 사실을 이 한 장면을 통해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섹스가 드라마를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가 섹스를 몰아내는 건 다른 AV에선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파격, 또 파격

일반적으로 AV 현장에서 하루에 찍는 평균 촬영분량은 10신이 넘는다. 봉 감독은 <아파바> 촬영시 제작자를 앞에 두고 겨우 2장면만을 찍은 적이 있다. 이유는 배우들의 연기가 자연스럽지 않다는 것. 섹스장면도 아니고, 단지 여주인공이 상대를 기다리는 장면의 느낌이 잘 살지 않는다는 이유가 전부였다. 배우를 다루는 테크닉도 그는 다양하다. 그는 배우에게 시범을 보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디지털 비디오>를 찍을 때의 일화 한 가지. 촬영이 이뤄졌던 때는 겨울이었는데 도저히 좁은 방 안에서는 앵글이 안 나왔다. 할 수 없이 창문 뜯고서 촬영을 진행했는데, 배우들이 추위 때문에 오들오들 떨었다. 그는 스탭들에게 옷을 벗으라고 했다. 그리고 자신도 팬티만 남겨놓고 다 벗었다. “촬영하다보면 팀워크라는 게 중요하다. 그건 오랫동안 같이 작업한다고 얻어지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김태원, 박진순씨 등 지난 3년 동안 그와 같이 작업해온 스탭들이 그를 떠나지 않는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래서일까. <딴따라>에 가면, 배우들의 연기는 자연스럽기 그지없다.

그가 2000년에 찍은 작품은 <연어> 일심> <이노미> <스파링파트너> <귀공녀> <아파바> 등 총 6편. 2001년엔 4편이다. 편수만 보더라도 사실 AV업계에서 봉만대 감독은 ‘잘 나가는’ 감독이라고 할 순 없다. 한달에 2편씩 찍어내는 감독도 상당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신생제작사에서 그의 유명세를 빌리기 위해 기회를 주긴 하지만, 정작 유통업계에선 “과감한 노출과 다양한 체위만이 최선은 아니라”는 지론을 갖고 있는 그에 대한 평판이 좋을 리 없다. “공중 부양 섹스? 그거 좋다. 근데 그건 액션영화에서나 해야 하는 것 아닌가? 정서가 전달되지 않는 섹스장면은 죽은 거나 마찬가지다. 섹스는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정서의 공유다.”

그의 삐딱한 기질은 때론 소비자를, 때론 영상물등급위원회의 심의위원을 향하기도 했다. <연어>의 미용실 섹스장면을 보자. 이 장면의 초반은 마치 비디오를 빠르게 돌려보는 식으로 편집되어 있다. 서치를 사용해서 에로비디오를 관람하던 이들에게 이 장면은 당혹감을 던져준다. “자, 앞으론 돌려보지 마십시오. AV라고 이야기가 없겠습니까?”라고 묻는 듯하다. 애초 그의 의도는 심의위원들의 가위 눈을 피하기 위한 것도 포함되어 있다. 실제 그는 촬영 당시 다양한 각도에서 찍다보니 미처 음모가 노출됐는지 알지 못했다. 그렇다고 심의가 무서워서 다시 찍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발견하지 못하도록 아예 빠른 속도로 편집했다는 것이다. 올해 출시된 <터치>도 마찬가지. 정사장면에서 <터치>는 화면이 4분할된다. 4개의 카메라로 서로 다른 위치에서 찍은 이 장면에 대해 그는 “감독의 편집본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이젠 관객에게도 골라볼 권리를 돌려줘야 한다.”


봉만대의 충무로 데뷔작 <사랑>
첫 섹스가 90%를 결정한다

봉만대 감독은 <사랑> 촬영이 한달 남짓 남은 지금까지도 시나리오를 초고 그대로 놓아둔 부분이 있다. ‘사랑’을 엮어가는 두 남녀, 신아와 동기가 중국집에서 격렬한 애무를 나눈 뒤 호텔에 가기까지의 첫 만남을 어떻게 설득하면 좋을지 결정하지 못한 것이다. “신아와 동기가 첫 섹스하는 장면은 영화의 90% 이상을 책임지는 부분이에요. 거기서 ‘아, 이거다’ 하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어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는 이 난제를 어떻게 해결하려는 것일까. “이 장면만 공간이 서울인데, 영화 다 찍고 나서 제일 마지막에 촬영하려구요. 그때까지 열심히 생각하면 갑자기 머리에 떠오르는 게 있을 거예요.” 성(性)을 키워드로 모든 문제를 풀어나갈 수 있다는 신조를 가진 AV 감독답게, 그는 “한번에 확 깨는 것처럼 다가오는” 섹스를 꿈꾸고 있다.
봉만대의 첫 35mm 장편영화 <사랑>은 우연히 서울에서 만난 신아와 동기가 자신들의 터전인 대전에서 함께 살고 섹스하고 헤어지는, 매우 일상적인 연애담이다. 그들은 자동차를 타고 교외를 달리거나 아기자기한 이벤트를 준비하는 대신 서로의 몸을 탐구하는 데 열심이다. 여자는 남자의 몸을 알면서 친밀함을 느끼지만, 남자는 여자의 몸을 갖게 되면서 점점 지루해지기만 하는 이율배반. 봉만대는 이 상반된 감정을 한 화면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정서가 넘치도록 담는 방법을 열심히 생각중이다. 그가 예로 든 한 장면은 동기의 방 안에서 치르는 섹스. “TV의 파르스름한 불빛을 비추고 방 안은 따뜻한 노란색 톤으로 처리하는 거예요. 달빛도 푸른색이지. 느낌이 다른 두 가지 조명이 깔리는 가운데 두 남녀가 알몸으로 엉키는데, 거긴 또 국소조명이야. 스탠드 불빛을 이용해서 가슴으로 갔다가 다리로 갔다가. 그렇게 일이 다 끝나고 나면 형광등을 켜서 적나라한 알몸을 보여줘요. 어떻게 보면 섹스가 끝난 다음이 더 야할 수도 있다니까.”

봉만대는 평범한 시나리오와 달리 문단 사이사이에 마음에 맞는 다른 영화의 캡처 화면을 삽입했다.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적나라한 정사와 냉장고 앞에 알몸으로 누운 누추한 일상이 모두 전시된 사진들이다. 그는 그 느낌을 따라 섹스를 진행할 생각이다. 낯선 사람과의 설레는 정사, 질퍽하면서도 지겨운 정사, 관계의 회복을 위한 절박한 정사. 하늘을 떠올려도 ‘우리 신아’의 알몸이 겹친다는 봉만대는 “에로가 너무 좋아서” 찍는 열여섯 번째 에로영화를 그렇게 고민하고 있다.

김현정




AV가 부른다면 돌아가리라
이런 시도에는 AV를 둘러싼 열악한 환경에 대한 그의 불만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가 <디지털 비디오>에서 잠깐 설파했듯이, 유통이 판치는 상황에서 여전히 벗기기 경쟁만을 일삼는 제작관행은 유입되는 인력을 막아세우는 방벽이자 AV시장이 자멸하기 딱 좋은 지름길이다. 그는 무엇보다 일단 사회적인 시선이 좀더 관용적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음성화가 고질적인 병폐를 키우기 때문이다. 그는 얼마 전 한국독립영화협회에서 자신의 작품 <아파바>를 틀었던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반지하나 옥탑방이나 살기 힘든 건 마찬가지다. 어차피 그렇다면 햇빛이라도 보게 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공개적인 상영기회가 좀더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그는 충무로 진출 이후 미아가 될지 모른다. 여전히 1천만원 이하의 작품들이 양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제작비는 무조건 2500만원 이상이어야 한다고 못박는 삐딱한 그를 기용할지는 미지수다. 물론 그는 불러준다면 AV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자신은 AV든, 35mm든 평생 할 수 있다면 좋겠다고 했다. 카메라만 들려준다면. “언젠가 그런 날이 올까요? 아이맥스 상영관에서 AV가 상영되는 그런 날 말이에요.”

글 이영진 anti@hani.co.kr·사진 오계옥 klara@hani.co.kr·디자인 임정숙 norii@hani.co.kr

그리고, 에로영화가 진화하기 시작했다
어느 단편영화감독이 본 봉만대 감독의 작품들

하기호 / 단편 <전화><내 사랑 십자드라이버> 연출 · 현재 장편 극영화 준비중
나의 에로영화 여행은 80년대 중반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
<소금기둥>이니 <야누스>니 하는, ‘3S 정책’에 발맞춘 ‘에로물’들이었다.
80년대 말과 90년대 초반에 동시상영관을 수놓았던 ‘∼애마’ 시리즈는 87년쯤, 본격적인 에로비디오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괴로워하는 여성의 상체만을 고만고만하게 보여주던, ‘아주 많이 짜증나는’ 영화였다.
비디오 시장이 급격히 팽창하면서 등장한 ‘∼부인’ 시리즈마저도 사춘기를 지나 막 20대를 달리는 나의 성적 욕망을 채워주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아, 이 대∼한민국엔 나 같은 놈을 위한 영화가 정말 없단 말인가!’

이러한 현실을 아쉬워하며 비싼 돈을 들여 양키들의 ‘포르노’로 연명하던 그때, 가끔씩 같은 동양인이 나오는, 그러나 말도 안 되는 자기네 전설을 화면 위에 옮기며, 따라하기에도 요상한 그네뛰기 체위나 원숭이 십자꺾기 등을 선보였던 <옥보단>류의 영화에 점차 싫증을 느끼던 그때, 꽈배기와 만두, 흑심 품은 연필, 그외의 모든 부인들을 밀어내고 미소녀들과 더불어 혜성처럼 나타난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봉만대였던 것이다.

그의 영화는 분명히 여타의 에로비디오와는 달랐다.
<연어>에서는 90년대 말 당시만 해도 어느 에로비디오에서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마스크 정희빈을 등장시켰고, <이천년>은 강한 콘트라스트로 왕가위처럼 서울 시내를 휘젓고다니는 디지털카메라의 새로운 시선 속에 한국 에로비디오로서는 최초로 애널섹스를 보여주었다. 그 밖에도 영화에 대한 영화이자 에로영화업계의 감독과 제작자, 그리고 여주인공이 어떻게 파멸로 치닫는가를 세밀하게 보여준 <귀공녀>, 섹스는 스파링이다, 권투도장을 중심으로 질퍽하고도 코믹한 섹스신을 보여준 <스파링 파트너>(못 보신 분들은 상상만 하시라, 헤드기어와 권투 글러브를 끼고 링 위에서 하는 섹스란…), 곽경택 감독의 데뷔작 <억수탕>의 에로버전일 법한 <일심>, 에로비디오 마니아들을 위한 서비스 <여배우들의 볼꺼리>, 한·일 합작, 우리의 에로비디오 업계도 일본의 그것에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한 <모모>까지….

수많은 에로비디오 중에서 화면만으로도 자석이 철가루 골라내듯, 봉만대의 영화를 분리해낼 수 있을 정도로 그의 영화는 다른 에로비디오와는 확연히 달랐다.

봉만대의 영화들은 <털수선> <박하사랑>류의 기존 영화들의 제목 비틀기에 머물지 않고 작품마다 새로운 체위를 구사하기 시작했으며, 여배우의 애절한 신음소리 외에 ‘씨발놈아 제대로 좀 해’ 등의 리얼한 욕과 더불어 쩔쩔매는 남자들의 질퍽질퍽한 자연음을 화면에 그대로 담아냈다. 또한 CF와 뮤직비디오에서나 볼 수 있는 과감한 카메라 앵글과 편집의 구사는 우리 에로비디오의 수준을 한층 업그레이드했다. 그러다보니 나는 어느덧 그의 팬이 되어버렸고, 비디오 재킷의 감독 이름을 확인하는 버릇까지 생기게 되었다.

지난해에 출시된 <터치>는 이게 에로비디오인지 아닌지, 그러니까 나 같은 마초들을 꼴리게 만들고 싶은 건지 아닌지, ‘결정적일 수 있는 섹스장면’에 화면을 4분할해버리는 놀라운 발상까지 보여줬다. 올 3월에 독립영화협회에서 주최한 ‘독립영화, 관객을 만나다’에서 상영된(최초의 극장 상영이었을 거다) <아파바>는 매우 미묘한 문제인 양공주와 그의 딸 이야기를 다루기도 했다. 이쯤 되면 봉만대 감독은 스타일리스트로 불릴 법도 하다.

봉만대의 영화가 지나치게 밑바닥 인생들을 그림으로 해서 군데군데 맥빠진 캐릭터들이 나열되는 등 단점이 있긴 하지만 3∼4일에 한편의 영화를 제작해야 하는 에로비디오계의 현실을 감안하다면, 그의 영화는 수많은 AV 마니아들을 감동시키기에(?) 손색이 없다.

다음은 봉만대 감독의 영화 <디지털 비디오>에 나오는 도입부다.

한 남자(그는 비디오 대여점의 ‘알바’다)가 열심히 자위행위를 하고 있고, 뜬금없이 황당하고도 우스운 자막이 오른다. 이는 ‘애로’ 많은 에로영화감독의 자아비판이자 기존의 에로영화들에 대한 시비걸기, 혹은 본인이 영화를 만드는 태도를 설명하고 있다. 이건 봉만대의 ‘기도문’이나 다름없다. 이 문장을 내 글의 마지막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비디오는 혼탁한 세상을 살아가는 자의 영혼에 참이슬 같은 존재이며 적은 돈으로 여러 명이 돌려볼 수 있는 돌림빵 같기도 하고 담아온 비닐봉지론 쓰레기를 담을 수 있는 아주 여러모로 유용한 것입니다. 한 개인이 잘못 빌려간 비디오로 인하여 인생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주시고, 18세 미만의 자에게 성인물을 대여해주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옵고, 저 또한 사소하게 연체된 금액을 뽀리까는 일이 없도록 하여 주시옵소서. 비록 좁은 공간에서 적은 월급으로 비디오 대여하는 일을 해나가지만 그들에게 90분 동안 사랑과 낭만과 여유로움을 찾을 수 있는 비디오를 전달하는 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흥분한 남자, 대사가 점점 빨라진다.) 그리고 사랑의 배달부가 되어 아름다운 영화 같은 세상을 만들게 하여 주시옵소서…. 으어… 윽, 찍!”

- 봉만대 감독의 <디지털 비디오> 중에서


-기사 :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