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ㅗ

복거일卜鉅一 “時流에 반역하는 자유주의 論客”

로드365 2002. 8. 9. 10:14
[金成東의 인간탐험] “時流에 반역하는 자유주의 論客”卜鉅一

『이제는 대통령직도 외국인에게 개방해야』

『시류를 거스르는 글 한 편을 쓰는 데는 큰 도덕적 용기가 필요하다』

●『문학은 위기가 아니라 제 영역으로 퇴각하고 있는 것』
●『태백산맥은 좌파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좌파의 압력 속에서 편향적으로 씌어진 민중소설이다』
●『미군기지촌에서의 삶이 나를 친미주의자로 만들었다』
●『지식인에게 사회적 책무를 지우지 마라』
●『문화권력은 소설가가 아니라 학자가 잡아야 한다』
●『히딩크의 성공은 한국 사회에서 그가 지연, 학연, 혈연 등에 얽매이지 않았기 때문』
●『논쟁을 싫어하지만 논쟁을 피하지도 않는다』
●『영어공용화에 대한 반론 가운데 쓸 만한 반론은 하나도 없다』

卜鉅一 1946년 충남 아산 출생. 서울대 경제학과 졸업. 소설 「碑銘을 찾아서」로 등단. 소설 「목성잠언집」 「캠프 세네카의 기자촌」, 시집 「오장원의 가을」 「나이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평론집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등 펴냄.



「시골스러운」 사람


한 시대의 대표적인 論客(논객)을 만난다는 일은 부담스러운 일이면서 재미없는 일이기도 하다. 論客들의 삶 속에서 흥미로운 드라마를 찾기도 어렵거니와, 설령 드라마가 있어도 그 드라마조차 재미없는 논리로 설명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서는 진지함 외에 다른 것이 비집고 들어갈 틈을 찾기가 어렵다.

論客의 말에 추임새를 넣기에도 벅찬 얄팍한 지식, 정확히 말하면 상식만을 갖고 긴 시간을 論客과 마주 앉아 있어야 한다는 것은 생각만 해도 고역스런 일이다. 소설가로서 세상에 이름을 드러냈지만 경제평론가로, 사회평론가로, 시류에 끊임없이 「반역」하는 당대의 論客으로 더 많이 알려진 卜鉅一(복거일·56)씨를 만나러 가는 길에서의 생각이 그랬다. 자유주의자로 불리는 그는 좌파적인 사람들에 맞서 자유주의 논쟁, 영어공용화 논쟁 등 우리 사회에서 근래에 벌어진 최고의 논쟁들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이미 우리는 5월24일에 만나 두 시간 가량 이야기를 나눈 터였고, 지금(5월29일)은 최소한 그것보다 두 배 이상의 시간을 빼앗기 위해 찾아가는 중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우리는 코리아나 호텔 커피숍에서 아주 편안하게 차를 마셨고 함께 식사를 했다. 그 편안함은 기자가 애써 卜鉅一이라는 사람의 사상과 철학을 드러낼 수 있는 질문들을 피해가며 가벼운 이야기로 시종일관한 결과였거나 아니면 충청도 사투리(그의 고향은 충남 아산이다)와 헐렁한 남방과 얼굴을 덮을 만큼 커 보이는 뿔테 안경, 그리고 촌스러운 가방을 손에 든 그의 「시골스러움」이 편안함을 주었거나, 둘 중 하나다.

어쨌든 기자는 그가 지난 5월 초에 개정판을 낸 「2002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도 채 읽지 못한 상태였고, 금년 1월에 낸 장편소설 「목성 잠언집」도 절반 이상 읽지 못한 상태였으므로 진지한 대화는 일단 피하기로 작정을 하고 그를 만났다. 그날의 이야기는 「소설가 복거일」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문열도 전업작가하는데 나도 못할 건 없지』


―대학생 때부터 문학청년이셨습니까.



『아뇨. 저는 대학 다닐 때는 그냥 지식인이 되고 싶었어요. 재미로 탐정소설을 엄청나게 읽었어요. 영어로 된 탐정소설을 한 달에 대여섯 권씩 읽었으니까. 그걸로 영어 공부를 했어요. 영국에서 1920년대에 나온 그런 탐정 소설들이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소설 수업이 됐는데, 그 당시 실은 재미로 읽었지 문학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저는 사람들 하고 문학 이야기를 별로 안 합니다』

卜鉅一씨는 1987년 전작 장편소설 「碑銘을 찾아서:京城, 쇼우와 62년」을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당시는 관례였던 新春文藝(신춘문예)나 문예지 추천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단행본을 내며 등단함으로써 당시 문단에서 화제가 됐다. 특히 한국 문단에 큰 줄기를 이루고 있는 김병익, 김현, 김치수 등이 중심이 된 「문학과 지성」 동인들이 추천을 했다는 점에서 당시는 파격으로 받아들여졌다. 「碑銘을 찾아서」가 발표되면서 문단에는 「대체 역사(alternative history) 소설」이라는 新種(신종) 용어가 등장했는데, 그 용어를 만든 이는 작가 卜鉅一 자신이다.

「碑銘을 찾아서」가 대체 역사 소설로 불리게 된 데는 이 소설이 우리나라가 여전히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假想(가상)의 역사를 전제로 씌어졌기 때문이다. 卜鉅一씨는 이 작품을 쓰기 위해 1983년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출간 후 베스트셀러가 된 「碑銘을 찾아서」를 세상에 내보내는 데 작가는 4년여의 시간을 투자한 것이다. 1983년에 직장을 그만 둔 후 지금까지 그는 직장을 갖지 않았다. 모일간지에서는 논설위원 자리를 제의해 오기도 했지만 그는 전업작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그는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


『이문열이가 전업작가하는데 나도 못할 이유가 없죠, 하하』

―전업작가로서 살려면 어느 정도는 경제적인 궁핍을 각오해야 할 텐데요.



『끼니 걱정합니다(웃음). 전업작가로서 버틴다는 것이 힘들어요. 저도 어떻게 버티는지 모르겠어요. 책도 많이 안 나가고. 어쨌든 지금까지 20년 가까이를 글로 먹고 버틴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제가 글을 쓰면 쉽게 쓰는데, 원체 주제가 어려워서 그런지는 몰라도 사람들이 어렵다고 그래요. 그래서 대중성은 확보하기가 어려워요. 제가 주장하는 것과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문학의 패러다임이 달라요. 일반적인 문학은 「현대문명이 인간성을 억압하고 황폐화시킨다, 재벌이나 다국적 기업들은 문제가 많다, 도시보다 농촌이 좋은 거다」 하는 식으로 묘사하지만 저는 그런 것들을 거스릅니다. 일반적인 문학의 패러다임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독자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는 건 당연하죠』

―문학을 하겠다는 생각이 없었는데 왜 등단은 했습니까.



『글쎄, 그냥 지나다 보니까… 타고난 詩人이라고 할까, 제가 詩를 좋아했고. 그 전부터 詩를 썼거든요』

―詩를 써서 문예지 1차 추천을 받기도 했지요?


『1983년에 김춘수 선생님의 추천을 받았습니다. 현대문학이었는데 詩 제목이 「봄바다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몰랐어요. 김현 선생한테 원고를 맡겨 놓고 나중에 찾아갔더니 제 詩가 현대문학에 추천이 됐다고 그러시더라구요. 그래서 알았습니다』


문단의 스승 김현


―문학 평론가 김현 선생 하고는 원래부터 잘 아는 사이였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평소에 그분 글을 보고 이 분은 작가를 아끼겠다 싶어서 찾아간 거예요. 찾아가서 詩 써놓은 것 좀 봐 달라고 했지요. 그렇게 한 10년 이상 사귀었어요』

―김현 선생이 1990년에 작고하셨으니까 1970년대 후반부터 詩를 써가지고 김현 선생을 찾아다닌 거네요.



『그랬어요. 당시 제가 문단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아는 사람은 그분 딱 한 분이었어요. 문학 얘기도 하고 가끔 논쟁도 하고 그랬습니다. 문학 얘기하면서 김현 선생은 「기업체에 다니면서 詩를 쓰는 당신 같은 사람이 있어 고맙다」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문단 쪽으로는 스승이나 다름 없는 분이군요.



『그렇죠』

문학의 위기라는 말은 문단에서 흔히 나오는 말이다. 대부분의 문인들은 그렇게 느끼고 있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卜鉅一씨의 생각은 다르다. 문학이 위기에 처한 것이 아니라 문학이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

―2001년도 동인문학상 수상작 평에서 평론가 유종호씨는 『문학에 기운이, 힘이 빠지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문학의 위기를 얘기하는 것 같은데 현재의 문학이 위기라고 보십니까.


『글쎄요. 저는 문학에 기운이 빠지고 있다, 하는 식으로 보지 않습니다. 다른 영역까지 들어갔던 문학의 영역이 제자리로 퇴각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요? 유신 때부터 시작해가지고 역사나 정치 이런 영역에서 자유가 줄어드니까, 거기서 해야 될 일을 안 하니까 진공이 생긴 거예요. 그 자리에 문학이 들어간 거예요. 역사가 담당할 몫을 문학이 담당하게 된 거죠. 좋은 예가 소설 「태백산맥」이에요』

―태백산맥을 역사로 보십니까.



『그렇지는 않구요. 사람들이 다루지 않은 분야(역사)가 있다는 거죠. 남부군을 예로 들면 역사가 그것의 존재를 다루지 않으니까 그걸 문학이 다뤄버린 것이죠. 사람들은 당시 남부군이 무언지 제대로 몰랐어요. 태백산맥은 문학 작품인데 사람들은 문학 작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역사로 자꾸 바라본다 이거죠. 그런 쪽으로 수요가 있으니까 문학이 갑자기 팽창해서 역사의 자리를 차지해버린 거예요. 그랬던 것이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정치, 역사 등의 분야가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하니까 문학이 원래의 분야로 퇴각을 하고 있는 겁니다. 밀려나고 있는 거죠.

태백산맥은 좌파적이고 민중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이 좌파의 압력 속에서 편향적으로 씌어진 민중소설이라고 볼 수 있어요. 저는 문학적인 가치를 떠나서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는 않는데 그런 작품이 역사의 자리를 비집고 들어가서 그걸 차지해버렸어요. 사람들이 그러니까 태백산맥에 나오는 이야기를 역사라고 생각하는 거죠. 어느 정도냐 하면 모 방송사 사장 같은 사람이 「남한이 잘못된 것을 알려면 태백산맥을 읽어보라」는 얘기를 할 정도가 된 거예요』

―문학 본령의 위기는 아니라는 말인가요?


『역사와 정치의 영역에서 퇴각하고 있다는 면에서 문학 본연의 위기가 아니라고 볼 수 있어요』

―문학의 위기를 말하는 분들의 주장에는 과거 1950년대, 1960년대 우리 사회의 문화권력을 잡은 집단이 작가들이었는데 지금은 상대적으로 왜소해지고 있다는 푸념도 들어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어요. 「이제 이광수는 없다」고 말예요. 20세기 전반기 대한민국의 문화, 문화인, 지식인을 대표했던 것은 이광수였어요. 소설가가 대표한 겁니다. 이제는 그런 일은 없다는 겁니다. 소설가가 지식인을 대표하는 그런 경우는 이제 안 나온다는 거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겁니까.



『그렇죠. 이광수가 지식인을 대표했다는 사실이 식민지 시대의 우리나라 문화가 얼마나 초라하고 척박했는지를 반증해주는 것이죠』

―어떤 사람이 지식인을 대표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학자가 해야죠. 학문을 하는 사람이 해야 돼요』

―소설가도 학자가 될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그런데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그렇게 되기에는 지적 기반이 약해요. 문학의 본질은 이야기이고 재미이기 때문에 깊이를 추구하기는 어렵죠』

잠시 지식인 이야기로 넘어갔다.



지식인이란 지식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


―지식인이라는 말을 많이 하시는데 지식인은 누구를 말하는 겁니까.



『어떤 사람이 지니고 있는 지식의 양이 지식인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는 아닙니다. 지식인은 첫째, 지식의 중요성을 깨달은 사람이죠. 두 번째는 지식을 다른 목적 때문에 얻는 게 아니라 지식 그 자체를 위해 지식을 얻고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죠.

제가 「쓸모 없는 것을 찾아서」라는 과학평론집을 냈는데 바로 그거예요. 지식인의 뚜렷한 징표는 쓸모 없는 지식들을 사랑한다는 거죠. 당장 실용성은 없는 지식이지만 세상을 파악하는 데는 그게 중요하거든요. 그걸 사랑한다는 거죠. 제 머릿속에도 그런 쓸 데 없는 지식들이 그득하죠.

저는 대학생 시절에 평생 지식만을 추구하는 지식인이 되겠다고 결심했어요.


「내가 문학을 하든 경제학을 하든, 역사를 하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지식을 추구하겠다」 고 생각을 한 것이죠』

―지식인은 이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지식인 하면 사회적 책임이라는 말이 나오잖아요. 저는 그런 등식은 아주 안 좋아해요. 지식 자체가 좋으면 좋은 거죠. 그런데 지식을 많이 알게 되면 사람이 자기가 가는 길이 보이니까 자연스럽게 훌륭한 사회인이 되죠. 꼭 지식인이 의무감을 느껴가지고 무얼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지식인이다. 그러므로 사회적 책무를 져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게 되면 실용적인 지식에 집착을 하게 돼요. 그러면 지식인이 못 되는 거죠. 지식인은 그냥 자기가 자유롭게 지식을 얻으면 되죠. 그렇게 하면 나중에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갈까 하는 것이 보여요. 그러니까 책만 읽으면 나중에 공부가 저절로 되듯이 너무 지식인과 사회적 책무 사이를 엄격하게 상관 관계를 맺으려고 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봅니다』

이야기를 나누면서 卜鉅一씨 자신은 『사람을 만나는데 청탁을 가리지 않는다』고 했지만 기자가 보기에 그는 사교적인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자주 어울리는 문인은 누가 있습니까.



『서울 서교동에 있는 「문학과 지성사」에 가끔 나가서 거기 나오는 사람들 하고 어울리죠. 이른바 문지파 작가들이죠. 그러니까 저를 인도해 주셨다고 스승으로 꼽는 분들이 문학과 지성 동인들인데 원래 여섯 분이셨죠. 김현, 황인철 선생님은 돌아가셨고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 오생근 이렇게 네 분이 남아 있는데 그분들하고 어울리죠. 그분들이 바둑을 좋아해요』

―이문열, 최인호, 조정래, 황석영 등 현재 우리나라에서 이름이 알려진 작가들에 대해서 평가를 해주실 수 있습니까.



『(웃음) 저는 그분들을 잘 몰라요. 안면이 있는 사람은 그 중에서 이문열씨 하나인데, 제가 그분에 대해 얘기할 만한 것은 없고, 저는 그래요. 우리나라에서는 세상을 낙관적으로 바라보고 긍정적으로 사는 사람들을 긍정적으로 묘사하는 작가들이 시세를 못 얻어요. 홍성원 선생이 대표적인데 그분은 아주 비참한 환경에서도 항상 세상을 밝게 바라보는 사람들을 그리거든요. 그분은 작품도 많이 냈죠. 근 20권을 냈는데 대중들의 호응이 그리 많지 않아요. 홍성원 선생 같은 이들의 책이 많이 읽히지 않는 게 안타까워요. 그분이 쓴 「남과 북」은 우리나라 문학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손창섭 선생도 중요한 작가라고 생각해요. 요즘 비평가들이 옛날에 있던 작가들의 작품을 안 읽어요. 그러니까 큰일이라는 거예요. 요즘 비평가들을 보면 자기들끼리 모이는 사람들, 모여서 술 마시고 차 마시는 사람들끼리만 이야기를 하지 선배들이 남긴 걸 전혀 읽지 않아요. 얘기를 해보면 전혀 몰라요. 손창섭 같은 분들이 잊혀진다는 것은 문제죠.

이문열이나 최인호 같은 작가들은 대중들에게 인기가 있으니까 신경을 안 써도 되는데 손창섭 작가 같은 분들은 비평가들이 독자들에게 이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으면 잊혀질 수밖에 없죠』


『기지촌에서 살다가 親美주의자가 됐다』


卜鉅一씨는 1987년에 등단을 한 이후 여덟 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그 가운데 가장 애착을 갖는 작품이 「캠프 세네카의 기지촌」이다. 미군 기지촌의 풍경을 담은 소설이다. 소설가 卜鉅一이 이 작품에 유독 애착을 갖는 이유는 자신과 자신 가족들의 삶이 투영된 이른바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이다.

卜鉅一씨는 미군 기지촌에서 성장했다. 그의 표현을 빌면 『대전 이북에 있는 미군 기지촌은 다 돌아다니며 자랐다』고 한다. 아버지 卜榮基(복영기·1995년 사망)씨가 6·25 전쟁 중 남로당 계열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다. 충남 아산군 신창면 도고초등학교 교사였던 그의 아버지는 일제 때 원래 민족주의 계열 조직에 속해 있었는데 그 조직이 남로당 계열로 바뀌면서 남로당 당원이 됐다고 한다.

국군과 유엔군이 진주한 후 고향에서 도망을 친 아버지는 미군과 인민군의 전선을 따라 이동하다가 미군부대에 합류하게 된다. 영어를 잘 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한국인 노무자들을 감독하는 일도 하고, 페인트를 칠하는 일도 했다. 그런 인연으로 미군과 인연을 맺게 된 아버지는 고향에 있던 가족들을 기지촌으로 불러 함께 살게 됐던 것이다. 나중에 자수를 했지만 정상이 참작돼 무죄로 풀려날 수 있었고, 페인트 칠을 업으로 卜鉅一씨네 가족은 기지촌에서 생활을 했다.

卜鉅一씨는 『기지촌 생활을 통해 우리를 굶주리지 않게 하는 것이 미국이라는 걸 체험했고 그로 인해 親美(친미)주의자가 됐다』고 말한다.



『아버지가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주한미군이 떠나가는 거였어요. 미군부대가 떠난다는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늘 5년만 더 있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입버릇처럼 하셨죠. 생존이 걸린 문제였기 때문이죠. 미군이 떠나고 나면 그곳 기지촌의 수많은 사람들은 실업자로 전락했어요. 그 사람들의 삶은 6·25로 한 번 뿌리뽑히고, 미군 철수로 또 뿌리가 뽑혔어요. 양공주만 기구한 게 아니라 그곳에 사는 사람 모두가 기구했던 거예요』

기지촌에서 직접 산 경험 때문일까. 卜鉅一씨는 기지촌 문제를 다룬 일부 소설들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황구의 비명」 같은 기지촌을 소재로 해서 反美 감정을 부추기는 소설들이 있는데 그건 소설도 아니에요. 상식적인 선에서 기지촌을 다룬 것이고 전형적인 외부인이 본 기지촌 이야기예요. 몇 년 간 기지촌 생활을 체험한 것을 바탕으로 기지촌 이야기를 쓴 작가도 있는데 그것 역시 마찬가지예요. 그 작가들은 이미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기지촌에 들어간 거예요. 그 이데올로기로 기지촌을 보는 거죠』

卜鉅一씨와의 첫 만남은 비교적 한가로운 이야기로 그렇게 끝났다.



『논쟁에 휩쓸렸지 자발적으로 한 적은 없다』


두 번째 만남은 서울 지하철 6호선 수색역 부근에 있는 그의 집에서 갖기로 했다. 외동딸(恩照·은조)이 올해 연세대학교 이과대학에 입학하면서 대전에서 살다가 이사를 와 둥지를 튼 집이다. 기자가 가진 중압감을 씻어주기라도 하듯 그는 미소로 기자 일행을 맞아주었다.

마침 그날은 卜鉅一씨가 계간지 「철학과 현실」에 「친일 문제」를 주제로 기고한 글이 동아일보에서 대문짝만하게 요약돼 소개된 날이었다. 「친일논쟁보다 항일운동史 정립 힘써야」라는 제목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동안의 親日 문제 논의와는 대치되는, 時流에 반역하는 주장의 글이다.

―1990년대 초반의 자유주의 논쟁, 후반의 영어공용화 논쟁에 이어 또다시 親日 문제와 관련된 논쟁이 벌어질 것 같은데요.



『저는 논쟁을 벌이는 걸 싫어해요. 자유주의 논쟁이라는 것도 처음에는 논쟁 참여를 거절한 거였는데, 한겨레신문에서 저를 설득하더라구요. 지금은 중앙일보에 있지만 상대였던 정운영씨가 당시 한겨레에 몸을 담고 있었지 않습니까. 그래서 한겨레 측에서 「형평을 맞추기 위해서 당신의 의견을 게재해야겠다」고 해서 한 번 게재한 겁니다. 그런데 제 글에 대한 반론이 나왔어요. 그래서 나도 반론을 한 거죠.

그렇다면 한번 본격적으로 해보자는 생각에 또 했더니 한겨레 쪽에서 한 번만 더 내 글을 싣고서 논쟁을 그만하겠다고 그래요. 논쟁도 제대로 못하고 끝났어요. 비로소 이제 논쟁이 시작되는가 했더니 끝나버렸어요. 親日 문제도 가급적이면 논쟁을 안 하고 싶지만 누군가가 논쟁을 하자고 하면 피할 이유는 없지요』

―논쟁을 싫어한다는 것은 예상 외의 대답인데요?


『제가 소설가로서 출발을 했기 때문에 제 글이나 생각에 대해서 남들이 비판을 하면 그런가 보다 하고 받아들이지 대꾸를 않습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욕을 먹었어요? 그래도 대꾸 거의 안 했습니다. 끌려 들어가서 한 거지. 밖으로는 논쟁을 잘 하는 사람으로 비춰졌지만 제가 쓴 엄청난 글에 비해서 실제로 논쟁에 휘말린 것은 많지 않아요』

―혹시 논쟁을 벌일 때 나름대로 비법이 있습니까.



『제가 비교적 논쟁을 잘 하는 편입니다. 어떤 비평가는 근본적인 해체를 하는 사람이라 그렇다고 얘기하더군요. 상대편의 논지가 담고 있는 드러나지 않은 假定(가정)들을 밝혀내서, 그 假定들에 기초한 사실과 논리에 대해서 이의를 제기하는 방식을 쓰기 때문에 논쟁을 효과적으로 한다는 얘기를 하더군요. 저도 그런 얘기에 동의해요.

대개 좌파와 논쟁을 많이 벌이게 되는데 좌파의 논리를 가만히 보면 실제로 자기가 생각하는 건 거의 없어요. 다른 사람들이 생각한 것을 그대로 달달 외우다시피해서 받아들여요. 자기 편 사람이 얘기를 하면 그것이 타당한가에 대해 근본적인 성찰도 하지 않고 옮기기 때문에 그것에 대해서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반론을 제기하면 의외로 논리가 쉽게 무너집니다. 그 사람들의 생각의 바탕을 둔 그 假定들을 한 번 드러내 놓고서 살피는 일부터 시작하는 게 중요해요. 저쪽의 논리나 이론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들을 알아야 효과적으로 논쟁을 펼칠 수 있어요』

―여러 가지로 예민한 시기에 親日 문제를 거론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라기보다는 계간지 「철학과 현실」에서 親日 문제를 주제로 글을 써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와서 쓴 거예요. 친일파 문제는, 왜 하필 이 시기에 그런 문제가 부각되고 있느냐 하는 문제가 있어요. 친일파로 지목된 사람들 중에도 좋은 일을 한 사람이 많아요. 그 사람들의 잘 한 일은 드러내고 거기에서 나쁜 일을 덜어내는 식이 돼야 한다고 봐요.

용어도 문제인데 친일파라는 말보다는 親체제파라는 용어가 더 적합하죠. 이완용은 친일파라고 부를 수 있지만 일제 시대는 법적으로 합방된 상태였으므로 그때 활동한 사람들은 親체제파로 불리는 게 마땅하죠. 친일파니 親日 행위니 하는 개념들을 정치의 영역이 아닌 역사의 영역으로 돌리고 독립운동가 등 항일운동사 정립에 힘쓰는 게 옳다는 생각이죠』


태어날 때부터 아웃사이더


卜鉅一씨는 금년 1월 펴낸 그의 장편소설 「목성 잠언집」의 작가後記에다 『다수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거나 時流를 거스르는 글 한 편을 쓰는 데는 큰 도덕적 용기가 필요하다』는 요지의 글을 적어놓았다.


―時流를 거스르는 글을 쓰는 데는 도덕적 용기가 필요하다고 하셨는데 그동안 쓰신 글들을 보면 時流를 거스르는 일을 즐겨하는 것 같습니다.



『(웃음) 저는 태어날 때부터 아웃사이더였던 것 같아요. 누가 저를 가리켜 소론이라고 했는데 저는 어려서부터 그런 시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 말썽이 나기도 했어요. 수업시간에 선생님 말이 틀렸나 안 틀렸나를 보느라고 학교 다닐 때 필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선생님 말을 들으면서 저게 맞는 말인가, 아닌가 하는 것 그것에만 관심을 가졌어요. 필기는 안 하고 선생님 얼굴만 빤히 쳐다보면서 있으니까 당연히 미움을 많이 받았겠지요』

―사회생활을 할 때도 그랬습니까.



『그 버릇 때문에 입사한 지 사흘 만에 쫓겨난 적이 있어요. 대한항공에 합격해서 연수를 받을 때였는데 강사가 하는 얘기를 듣고 있다가 계속 질문을 한 거예요. 질문한 것 중에 하나가 임금에 관한 것이었어요. 임금 등 대한항공의 인사제도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자와 대학을 졸업한 여자가 임금 수준이 같아요. 그래서 제가 손을 들었어요. 「강사님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남녀차별 아닙니까」 하고 물었죠. 당장 인사부에서 부르더라구요. 인사부 사람이 「뭐야, 당신 여기에 들어와 가지고 회사 사람들 선동하려는 거야」 하는 거예요. 거기서 논쟁이 벌어졌어요. 「내가 잘못을 지적했으면 당신들이 그걸 바꿔야지 왜 내 입을 틀어막느냐, 당신들이 내 말 들어라, 나 같은 사람들의 의견을 받아들여야 회사가 발전할 것 아니냐」고 말했지요. 한 30분 간 싸우다가 제 입사서류를 달라고 해서 그 자리에서 받아가지고 나왔어요』

卜鉅一씨가 직장생활을 한 기간은 서울 상대를 졸업한 해인 1967년부터 1983년까지 16년 간이 전부다. 16년 간 그는 대한항공 같은 경우를 빼고도 네 곳에서 직장생활을 했다. 그 기간중에는 포병 장교로 복무한 기간도 포함돼 있다.

―이력을 보면 은행, 제조업체, 연구소 등 여러 곳을 옮겨다녔던데 아웃사이더적인 성격 때문입니까.



『제가 대학을 졸업할 때는 은행이 가장 좋은 직장이었어요. 게다가 저는 商大를 나왔구요. 또 軍 미필자를 받아주는 곳이 은행이었고 해서 시험을 치렀고 합격을 했어요. 들어가서 6개월이 되니까 은행에서 배울 것은 다 배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서 무작정 그만두었어요. 나왔어요.

그 다음 들어간 직장에서는 노동조합운동을 했어요. 알루미늄 제련 업체였는데 해외차관 기업이었어요. 우리나라의 비리가 거기에 다 집약돼 있더군요. 社主의 전횡이 굉장히 심했어요. 그래서 유일한 代案이 노동조합이라고 생각하고 노동조합운동을 했어요. 화이트 칼라 노동조합 운동이었죠. 결과는 실패했죠. 아웃사이더적인 제 성격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아요』

―時流와 어긋난 주장 때문에 협박을 받으신 적은 없습니까.



『있죠. 신문에 쌀개방하라는 칼럼을 썼다가 농민들이 낫들고 찾아오겠다고 협박해서 안 식구가 두 달 동안 전화를 못 받았어요. 떨려 가지고』

―언제였습니까.



『金泳三 정부가 들어서기 직전으로 金泳三 前 대통령이 당선자 신분이었을 때였어요. 당선된 후 金泳三씨가 盧泰愚 대통령을 많이 깎아내렸잖아요? 그래서 盧 대통령을 깎아내리지 말고 부탁을 해라. 어차피 개방해야 할 건데 盧대통령 임기 중에 쌀시장을 개방해서 金泳三씨 당신의 부담을 덜어달라고 부탁을 해라, 그런 내용이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金泳三씨 자기 손으로 쌀시장을 개방하게 됐고 인기도 떨어지게 된 것 아닙니까』


『대처 등 검증된 외국의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卜鉅一씨가 최근 개정판으로 펴낸 「2002 자유주의 정당의 정책」은 그런 당대의 時流에서 어긋난 주장들로 가득하다. 정치적 시장의 자유화, 募兵制(모병제)의 지원병제와 용병제로의 전환, 대마초 등 일부 마약의 허용 등의 주장은 그를 夢想家(몽상가)로 보이게 한다. 그는 정말 「夢想」이 현실화할 것이라고 믿는가.


『사람들의 생각의 「바운더리 컨디션(boundary condition·경계 조건)」이 깨지면 겉잡을 수 없는 변화가 와요. 댐이 무너질 때 일거에 무너지지 조금씩 무너지지 않는 것처럼 변화도 그렇게 와요. 불과 5년 전만 해도 방송에서 머리를 물들인 가수들을 출연시키지 않았어요. 지금은 아이에서 노인까지 머리를 염색하고 있고 그게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지고 있잖아요?』

―정치적 시장의 자유화를 이야기하면서 대통령직도 외국인에게 개방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정치적 시장의 자유화의 골자는 대통령직 개방으로 읽혀집니다.


『그게 제 혁신적인 주장인데, 대통령 후보를 외국에서 불러오자는 거죠』

―선진 외국에 그런 선례가 있었습니까.



『왕조 시대에는 있었죠. 민족 국가 발생 이후에는 없었구요』

―대통령에게 필요한 것은 지도력인데 외국인 대통령이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겠습니까.



『아니죠. 지도력을 이미 확인한 분들을 불러오면 되니까요. 대처나 레이건 같은 사람들이 그 예인데 그분들의 지도력은 이미 확인된 것 아닙니까. 지역적인 대립이 강할수록 지역적 기반이 없는 게 오히려 장점이 아닐까요』

―너무 몽상적인 주장 아닙니까. 현실에서 가능하리라고 보십니까.


『교향악단 지휘자 불러오는 것이 문제가 안 된다면 이게 왜 문제가 되겠습니까. 몇 해 전만 해도 우리나라 기업에 외국인 CEO(최고경영자)가 들어오는 것에 대한 저항이 많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저항이 없잖아요. 국가대표 축구팀 히딩크 감독도 외국인이지만 지도력을 잘 발휘하고 있잖아요』

이날 히딩크 감독이 잘 하고 있다고 한 것은 월드컵 경기 전 열린 우리 국가대표 축구팀과 잉글랜드, 프랑스 대표팀과의 평가전만을 보고 한 말이었다. 월드컵이 개막되고 우리나라가 폴란드와의 1차전에서 승리한 후 기자는 卜鉅一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폴란드戰에서 한국이 승리한 후 私席에서 『대통령도 외국에서 수입하는 게 어떨까』 하는 弄半眞半(농반진반)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폴란드戰 승리는 대통령직을 외국인에게 개방하자는 그의 주장을 더욱 견고하게 해놓은 것 같았다.


『히딩크가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지연, 학연, 혈연 같은 이해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에요. 정치적 고려를 할 필요없이 오직 실력으로만 선수를 기용할 수 있었고, 자기 신념대로 선수를 지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봐요. 저는 차범근 감독이 히딩크보다 크게 못한 것이 없다고 봐요. 차범근 감독이 실패한 것은 한국에서 나고 자랐기 때문이에요. 지연, 학연 등 정치적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거죠. 사실 얼마나 간섭이 심했고 말이 많았습니까. 외국인인 히딩크는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 있었지만 한국인인 차범근은 그런 것들을 무시할 수 없었던 거죠. 대통령도 마찬가지예요. 외국에서 이미 지도자로 검증된 이를 우리나라 대통령으로 뽑으면 그 지도자는 히딩크가 축구에서 올린 것 같은 성과를 충분히 올릴 수 있으리라고 봅니다』


大選 후보의 가족도 철저히 검증돼야


자연스럽게 大選 이야기로 넘어갔다.


―정치지도자의 가족문제를 말하면서 대통령제에서는 현실적으로 가족과 권력을 나눠가질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대통령을 뽑을 때 그 가족도 엄밀한 검증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 아닙니까.


『제가 바로 그 얘기를 한 거 아닙니까. 대통령의 가족은 대통령과 권력을 나누어가질 수밖에 없어요. 언론이 오히려 그 문제를 소홀히 하고 있죠. 그런 걸 안 밝히는 걸 사생활을 보호하는 미덕이라고 생각하는데 천만에요. 적어도 미국 수준으로 해야 해요. 미국에서는 공인에게 사생활은 없다는 원칙이 나왔지 않습니까. 다음 정권에서 권력을 나누어 가질 가족에 대한 검증은 당연히 이루어져야지요』

―우리나라에서는 왜 세금 문제가 大選 이슈로 등장하지 않는 걸까요.



『미국에서는 항상 세금 문제가 大選 이슈가 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안 그래요. 국민들이 그 문제에 둔감한 것 같아요. 국민들이 그 문제에 예민하게 반응하면 大選 주자들도 그 문제를 거론하겠죠. 세금 문제가 거론돼야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감세를 해야 돼요. 법인세가 특히 급한데, 盧武鉉 후보는 「법인세 폐지는 특권층을 위한 것이다」고 말하는데 그건 무지의 소치예요. 법인세는 결코 특권층에서 부담하는 세금이 아닙니다. 대부분 종업원과 소비자가 부담하는 겁니다.

예를 들어서 고급 밍크코트를 봅시다. 밍크코트를 만드는 회사가 있는데 밍크코트에 특별소비세를 물게 하잖아요. 그러면 부자들이 그걸 삽니까. 안 사요. 밍크코트를 만드는 가난한 종업원들만 죽어나는 거예요. 그래서 사치품에 대한 과세는 항상 서민들에게 인기메뉴지만 실제는 서민층을 괴롭히는 겁니다. 지금 법인세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이유로 법인세를 반대하는 것은 있을 수 있어도 특권층을 위한 것이라는 이유로 반대한다면 그건 경제학의 ABC도 모른다는 겁니다. 경제원론을 안 읽었다는 얘기거든요』

―다음 대통령이 시급히 해야 할 일이 무어라고 보십니까.



『교통질서 같은 기초질서확립이에요. 金大中 대통령의 통치에서 가장 나쁜 것은 교통질서를 확립 안 한 거라고 생각해요. 가장 결정적인 거예요. 교통질서는 돈 안 들이고 할 수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전부 다 벌금으로 충당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것도 안 해요. 대통령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니까 안 하는 거예요. 사회의 발전은 그같이 사소한 교통질서 하나를 지키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묘지 문제만 해도 그래요. 대통령이 솔선수범하면 해결될 일이에요. 대통령이 먼저 묘지를 파헤치고 선조들을 화장시킨 후 납골당에다 모시면 全국민이 볼 것 아닙니까. 그러면 화장문화가 확립되는 것 아닙니까. 그걸 안 해요. 金泳三 정부부터 金大中 정부까지 기본적인 질서가 퇴보했지 진보된 것은 없어요. 기초질서를 확립하는 일은 지금 李會昌 후보나 盧武鉉 후보가 내거는 어떤 정책보다 중요합니다.

자유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의 차이는 공산주의자는 당대에서 갑자기 지상낙원을 건설한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자유주의자들은 수세대에 걸쳐서 약간씩만 진보시키면 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에요. 한 세대 안에 지상낙원을 건설한다는 것은 오만이고 사기예요. 갑자기 세상을 밝게 만드는 그런 거는 없어요. 다만 불합리한 것들이 많은데 그걸 하나씩 고쳐 나가면 그게 좋다는 거죠』


『색깔론이 제기되는 것은 당연하다』


卜鉅一씨는 자유주의자를 자처하고 주변에서도 그를 자유주의자로 부른다.


―행동양식에 있어서 자유주의자는 어떤 규범을 갖고 있습니까.



『저는 제 생각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습니다. 자유주의라는 것은 선택의 자유죠. 다른 사람들의 가치체계에 대해서는 시비를 안 걸어요. 가치체계에 대해서 시비를 거는 사람들이 잘못된 거죠. 가치체계가 뭐냐에 대해서 따로 나열하지 않고 그것을 사회가 허용하는 도덕적·법적 범위 內에서 뿌려 나가면 되는 거예요. 그런데 요새 좌파들은 가치체계 자체에 시비를 걸죠. 자유주의자와 좌파의 차이가 그것입니다』

자유주의를 지탱하는 힘은 무얼까. 그는 경쟁이라고 말한다.


『경제학자 하이에크는 경쟁을 통해서만 학습이 된다는 중요한 말을 했습니다. 사회가 가장 효율적으로 가치를 생산할 수 있는 길이 무언지를 알려면 경쟁을 시키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이 이루어지지만 사회주의 사회에서는 경쟁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요.

경쟁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사람의 몸을 신발이나 옷의 크기에 맞추어야 하는 일도 일어나게 되는 거죠. 철도 회사를 예로 들면 한 기관사에게 일정한 시간 동안 10만km를 운행하라는 지시가 떨어질 경우 화물칸에 물만 채워서 왔다갔다하는 일이 벌어진다고 합니다. 효율과는 상관없어도 10만km만 운행하면 실적이 되는 것이니까요.

세상에는 과당경쟁이라는 게 있을 수 없어요. 그것은 경쟁에서 실패한 사람들이 보았을 때 과당경쟁인 거죠. 신문시장의 예를 들어도 메이저 신문들은 과당경쟁이라는 말을 안 쓰지만 군소신문들은 과당경쟁이라고 하잖아요?』

―자유주의자는 왜 소수파일 수밖에 없습니까.



『첫째 자유주의는 설득을 해야 하기 때문에 복잡합니다. 단순하지 않아요. 좌파들은 「때려 잡자」 하면 간단하게 끝나요. 우리가 설득을 하기 위해 외칠 때 저쪽은 총을 쏜다 이거예요. 모택동이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고 했는데 그 얼마나 화끈하고 명료합니까. 설득하고 토론하고 얘기해야만 상대를 이해시킬 수 있는 그러한 이념은 평생 소수가 될 수밖에 없어요.

두 번째는 자유주의자는 남을 잘 믿어야 돼요. 市場이 바로 그거든요. 시장을 못 믿는 사람들은 자기들 외에는 못 믿겠다는 것이 거든요. 그러니까 자기들이 정권을 잡아야만 하는 거죠. 자유주의자들은 자기 아닌 다른 사람들의 판단도 옳으리라고 믿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그거는 타고나야 돼요. 다른 사람들을 믿을 수 있다는 것, 그것도 지금 사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앞으로 올 10代, 20代 후의 사람들을 믿어야 되거든요. 사회가 점진적으로 개량될 거라고 믿는 것은 후대에 올 그들을 믿는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을 믿는 능력 그게 중요하죠. 그게 어렵다는 거죠』

한국 사회에서 자유주의자란 보수와 等價槪念(등가개념)으로 통용된다. 卜鉅一씨는 한국 사회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말의 사용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누가 진보고, 누가 보수인가를 따지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진보와 보수는 도덕적으로 등가개념이 아니라는 겁니다. 사회는 변화하고 진화합니다. 사회는 진보, 진화합니다. 그러니까 진보라는 말 속에는 본질적으로 좋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어요. 도덕적인 평가가 들어 있는 거죠. 가치중립적인 얘기가 아니에요. 보수라는 말에는 진화를 거부한다는 뉘앙스가 들어 있어요. 도덕적으로 보수는 폄하되어 있어요. 보수와 진보 둘 다 가치중립적인 말이 아니에요. 진보는 좋은 뜻으로 쓰이고 보수는 나쁜 뜻으로 쓰입니다. 그래서 左와 右라는 말을 써야지 보수와 진보로 쓰는 것은 그 자체가 문제라는 거죠. 그게 첫 번째 포인트입니다.

두 번째 포인트는 보수와 진보라는 것은 방향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닙니다. 상대적으로, 보수와 진보의 대상이 되는 객체, 체제와 이념이 어느 것이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죠. 그러니까 우리나라 같은 자유민주사회에서 보수는 자유민주주의를 지키자는 거니까 자유민주주의자가 보수고, 공산주의 국가에서는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사람이 보수죠. 논의 대상이 되는 이념과 체제에 따라서 그 말의 사용이 달라지기 때문에 左와 右로 써야 합니다. 원래는 左와 右로 쓰다가 左측이 체제 경쟁에서 지니까 갑자기 보수, 진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한 겁니다. 언론도 아무렇지 않게 보수와 진보로 나누는데 잘못된 거예요.

左와 右로 나누면 색깔론이라고 하는데 색깔이 다르니까 구분하는 것인데 그게 왜 문제가 됩니까. 빨갱이가 아닌 사람들을 빨갱이라고 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지 색깔 자체를 구분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나도 한글을 사랑한다』


論客 卜鉅一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게 1998년 7월 한 달 동안 전국을 뜨겁게 달구었던 영어공용화 논쟁이다. 논쟁의 불씨가 된 문제의 책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영어가 국제어로 자리잡은 마당에 영어를 모국어로 배우지 않으면 손해일 뿐이다. 중기적으로 영어와 민족어가 공존하는 상태를 지나면, 영어가 단 하나의 국제어로 남게 될 것이다. 반면 민족어는 갈수록 활력을 잃어 학자들에 의해 보존되는 「박물관 언어」로 남아 차츰 사라질 것이다>

이런 내용이 담긴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발간 사실이 1998년 7월2일자 조선일보에 실리자 이를 반박하는 학자들의 글과 옹호하는 글이 실리면서 치열한 紙上 논전이 벌어졌다. 卜鉅一씨의 주장은 『미국의 시장주의를 한국에 이식하려는 것』, 『극단적 경제 논리에 따른 위험한 처방』 등의 비판을 받았다. 4년여가 지난 지금 그의 생각은 어떻게 변했을까.


『제가 영어공용화 문제를 꺼낸 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어요. 갈수록 지식과 정보를 얻기 위한 영어 의존도는 높아질 수밖에 없어요. 미래 사회로 갈수록 富는 지식과 정보의 크기에 비례할 수밖에 없어요. 부자들은 다 사교육을 통해서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칩니다. 가난한 아이들은 공교육의 場 외에서 영어를 배우기가 어렵습니다. 영어공용화가 이루어지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영어를 배우는 기회가 늘어나고, 정부도 영어교육에 더 많은 투자를 하게 될 겁니다. 그렇게 되면 교육 기회의 불평등은 그만큼 줄어드는 것이고 영어로 인해 발생될 수 있는 富의 세습은 차단될 수 있는 거죠』

4년여가 지난 지금도 卜鉅一씨의 영어공용화론에 대한 소신은 여전히 확고하다.



『지금까지 영어공용화론과 관련한 제 주장에 대해 반론을 쓴 것 중 쓸 만한 것 하나도 못 봤어요. 그 사람들보다 내가 더 깊게 고뇌를 했다고 자신합니다. 한글이 없어지리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데 한두 달이 걸린 것도 아니고 1년이 걸린 게 아닙니다. 오래 생각한 결과입니다. 몇 년에 걸쳐서 고뇌한 결과예요. 영어공용화론을 띄운다는 게 절벽과 절벽 사이의 심연, 그곳을 뛰어넘다가 떨어지면 그대로 밑으로 추락해 죽는, 그런 심정으로 던졌던 거예요. 그런데 자기들 혼자서 애국자인양 하고 「너는 역적이다」하는 걸 보면 더 얘기하고 싶은 생각이 안 나요』

―「碑銘을 찾아서」는 주인공 박영세가 민족의 언어 찾기를 통해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고 뿌리를 찾아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고 그것 때문에 독자들이 감동을 받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11년 후에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하면서는 한글의 소멸을 예견하고 있습니다. 물론 소설이기는 하지만 「碑銘을 찾아서」를 쓸 때와 영어공용화론을 주장할 때와는 생각이 바뀐 겁니까.

그는 강하게 손사래를 쳤다.



『안 그래요, 안 그래. 제가 한글을 안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분명한 것은 제가 한글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한국어를 계속해서 쓸 경우에 이익과 불이익을 따져보자는 얘기죠. 영어는 미국만의 언어가 아니라 국제어가 됐어요. 미국의 언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국제어를 받아들인다는 겁니다.

쉽게 말해서 그겁니다. 우리는 이미 한국어에 투자를 한 사람들이죠. 한국어를 배웠거나 한국어를 사랑한다는 얘기죠. 그런데 제 이야기는 우리 얘기가 아니에요. 우리 아들·딸들의 이야기도 아니구요. 우리 아들·딸들의 딸 아들, 손주뻘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예요. 아직 안 태어났으니까 그 아이들에게 선택권을 주자는 이야기입니다. 그 아이들은 아직 안 태어났으니까 한국어에 대한 애착이 없죠. 그렇죠?』

―어차피 선택은 아이들이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을 낳는 윗세대가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물론 그렇죠. 그러니까 본질은 그겁니다. 영어를 쓰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영어를 쓰게 되리라고 저는 전망을 하는데,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선택권이 없었죠? 우리 아들·딸들에게도 이미 선택권이 없죠? 아마 우리 손주 때도 없을지 몰라요. 그 다음에 가서는 선택의 기회를 주자는 거죠. 선택은 물론 부모가 하게 되는데 그때 가서 부모가 「내 아이를 기를 때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게 낫겠다」 싶으면 그렇게 하도록 하자는 거죠.

그러려면 지금부터 영어를 한국어와 동등한 지위에 놓아야 가능하다는 그런 얘기죠. 그 이야기에 대해 나는 논리적으로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봐요.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렇잖아요. 생각을 해봐요. 우리가 한번 우주인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그들이 와서 자기 후손들에게 지구의 언어 중 무슨 언어를 가르칠 것인가를 선택하게 했을 때, 어느 언어를 선택하겠는가를 생각해 보세요. 저는 정직하게 얘기하면 논리적으로 반론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해요. 안 그렇겠습니까』

―나중에 「碑銘을 찾아서」의 주인공 박영세처럼 자신의 뿌리와 정서를 찾기 위해 몸부림치는 후손이 나오게 되지 않을까요.



『아니죠. 그 소설에서의 상황은 정부 권력이 강제로 한글을 없애버린 것이지만 이런 경우는 발전적으로 진화를 한 것으로 봐야죠. 우리가 영어를 쓴다고 해서 정체성이 바뀌는 것은 아니에요. 진화할 따름이지』

言語(언어)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국한문 혼용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를 물었다.



『글쎄요. 저는 애초에 한글전용은 무리가 있다고 봤어요. 그게 다 사회 표준이거든요. 사회 표준을 정할 때는 취지가 자연스럽게 흘러들어가도록 해야 하는데 강제로 하는 것은 문제가 있어요. 週 5일 근무제 같은 것도 마찬가지지만 사회의 표준을 정할 때는 자연스럽게 진화하도록 일반 시민들, 요새 말로 하면 시장에 맡겨야죠. 이런 문제는 시민들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었어야 했습니다』


『설득할 뿐 강요하지는 않는다』


기자와 대화하는 중에 그는 개인과 집단의 가치체계든 영어공용화든 「필요로 하는 당사자의 선택」이 중요함을 여러 번 강조했다. 자유주의자는 그렇게 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그는 기자에게 올해 대학에 입학한 외동딸 恩照가 전공을 선택할 때 『생물학을 전공하도록 할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당사자의 선택을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 왜 따님이 스스로 전공을 선택하게 하지 않고 강요하시려고 합니까.



『강요한 게 아니라 아빠로서 조언하고 설득을 한 거죠. 은조는 일러스트에 상당한 재능이 있어요. 제가 은조에게 「너의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게 일러스트인데 식물도감이나 생물도감에 네 재능을 사용할 수 있다. 또한 아빠가 볼 때는 네가 사회에 나갈 무렵에는 생물학 전공자들에 대한 수요가 클 것이다」고 했어요. 생물학을 전공하겠다는 결정은 딸이 했습니다』

卜鉅一씨와의 대화 도중 그의 아내 陳平姬(진평희·51)씨는 恩照가 고교 시절에 그린 일러스트를 가지고 나왔다. 댄스그룹 HOT를 그렸는데, 문외한인 기자의 눈으로도 「상당한 수준」의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陳平姬씨는 『은조가 여고 시절에 일러스트를 잘 그려서 친구들로부터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자랑했다.

거실 앞뒷면 양쪽에 있는 책장에는 만화가 가득했는데 恩照가 즐겨 읽는 만화책들이라고 했다.


―따님이 만화를 무척 좋아하나 봅니다.



『만화를 하도 좋아해서 만화가를 시킬 생각도 했어요. 그런데 은조가 하는 게 만화가 아니라 일러스트더라구요. 저는 만화는 평생을 걸 수 있어도 일러스트는 평생을 걸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은조에게 제 생각을 얘기하고 다른 필요한 지식도 배우라고 하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하더군요』

―역시 그때도 강요가 아니라 조언과 설득이었습니까.



『(웃음) 예, 아빠로서의 조언과 설득이었어요』

―주변에서 아이한테 만화책만 사준다고 핀잔은 듣지 않았습니까.



『12, 13년 전만 해도 사람들이 저한테 미쳤다고 그랬어요』

―남들보다 앞선 생각이었는데도 말이죠?


『요즘은 선구자였다는 소리를 듣죠(웃음). 글과 비교해서 만화로 전달하는 내용이 짧은 시간에 굉장히 많아요. 시각과 글을 동시에 쓰니까. 지식을 섭취하는 속도가 빠르더라고요. 이번에 대학 입시를 볼 때 어문이 어려웠는데 은조는 지문을 읽고 빨리 이해하는 데 만화 덕을 크게 봤다고 해요. 상위 1등급에 속했어요. 시골에서 연세大에 들어가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닌데 들어갔습니다.

정보 전달력에 있어서 사람이 주로 눈으로 봐야 하지 않습니까. 그림으로 보면 그림에 담겨 있는 정보량이 굉장히 많거든요. 우리가 텔레비전을 켜자마자 장면이 나오면 이게 코미디다 시트콤이다 아니면 스릴러다 딱 알지 않습니까? 저 사람은 악한이냐 아니냐를 알고 장소가 미국이냐 한국이냐를 딱 한 번에 알지 않습니까. 이걸 책으로 하면 그 정보가 몇 페이지가 되는 양인데 딱 한 번에 전달을 해줍니다. 정보전달력이 굉장히 크기 때문에 만화에 대해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해요』

論客의 모습에서 한 가정에 家長의 모습으로 돌아온 그의 모습은 보기 좋았다. 딸에게 그랬듯이 자유주의자 卜鉅一은 時流에 반역하는, 세상에 대한 조언과 설득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저는 건강도 가난도 글쓰는 데 큰 지장이 없으면 그냥 견딥니다. 모든 걸 글쓰는 걸로 집중시키면 사는 게 간단해집니다. 다행히 저는 최소한이나마 도덕적 용기를 가져서 남들이 말하기 꺼려하는 의견을 말하고 그런 자세를 견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위안을 얻습니다』

「부담스럽고도 재미없는 論客과의 만남」을 기자는 또 자청하게 될 것 같다.●


金成東 月刊朝鮮 기자(ksdhan@chosu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