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ㅓ

에셔 Maurits Cornelis Esher, 윤회하는 그로테스크한 공간세계

로드365 2011. 7. 4. 14:28

에셔(Maurits Cornelis Esher)는 1898년 네덜란드에서 토목 기사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미술 교사의 영향을 받아 그래픽 아트에 관심을 가졌는데 후일 건축을 공부하기 위해 대학에 들어갔으나(1919년) 그의 작품을 본 담당 교수의 권유로 본격적으로 그래픽 아트에 전념하게 된다. 1922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이탈리아로 가서 시골의 집, 산비탈의 마을, 기념비적인 옛 건축물들을 스케치해서 판화로 만드는 작업을 진행했고, 1924년에는 로마에 정착했다. 1926년 스페인 남부의 그라나다에 가서 무어 왕들의 옛 궁전인 알함브라를 본 뒤부터는 궁전의 벽과 마루를 장식한 타일의 모자이크에 완전히 심취했다. 이슬람교는 공공 건물에서 조형 미술을 금지했기 때문에 타일 장식의 무늬(아라베스크)는 추상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에셔는 모자이크를 이용한 조형 미술의 무한한 잠재력을 발견했다. 이태리는 풍경화가인 그에게 매우 좋은 소재들을 제공해 주었는데 그는 지중해 연안을 도보로 여행하면서 바다와 하늘을 배경으로 실루엣을 이루고 있는 마을들을 소재로 목판화 작품을 제작하였다. 에셔는 1922년 말에 스페인의 그라나다(Granada)에서 알함브라(Alhambra)궁전을 방문했을 때 그 궁전의 장식에서도 매우 감흥을 받았다. 에셔는 이곳에서의 감흥을 일기에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것은 놀랍도록 동양적이었다. 내게 기이한 것은 우아한 장식과 위대한 품위와 전체적으로 잔순한 미였다. 그들 아랍인들은 귀족이었고 오늘날에는 더 이상 발견될 수 없는 것이다. 이 무어 양식의 벽화와 마루의 장식들은 이상할 만큼 인간, 동물, 그리고 어떤 형태의 식물도 완전히 결여되어 있다."

  1934년 무솔리니의 파시스트가 득세하는 당시 이탈리아의 정치적 상황을 견디지 못한 에셔는 아내와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이탈리아를 영원히 떠났다. 스위스에서 2년, 벨기에에서 5년을 보낸 뒤 1941년 네덜란드로 돌아가서 뿌리를 내렸다. 이즈음 그의 작품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났다. 대부분의 작품이 그의 눈으로 관찰한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의 눈으로 얻은 영감을 그려 놓은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1936년의 4월에서 6월까지 이탈리아와 프랑스 해변을 따라 스페인까지의 바다 여행을 떠났다. 에셔는 알함브라를 두 번째 방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코르도바(Cordoba)의 모스크도 방문한다. 에셔의 작품을 살펴보면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에서 보는 것과 같은 아라베스크 양식을 느낄 수 있는데 이것은 에셔 자신이 모스크 사원을 방문하며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이슬람 사원의 벽면을 장식한 아라베스크 양식들에게서 풍경을 정신적 형상으로 바꾸는 전환점 마련하게 된다. 에셔는 알함브라 궁전을 철저히 관찰하고 무어양식의 벽돌의장을 드로잉하였다. 연속 무늬에 의한 에셔의 작품들의 기초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었고 이 후부터 그는 작품의 체계를 완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결국 연속무늬의 모자이크 구조에 대한 모든 체계를 만들어 내게 되었고, 그것은 그의 판화 전 분야에서 커다란 원리를 이루게 되는 동기가 되었다.

   이태리를 떠나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를 전전하는 1937년까지의 여행을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나타났다. 에셔는 이제까지 자기 주변에 있는 것을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상상에 기본을 두고 내적 이미지를 표현하는 방법으로 변화하였다. 이를테면 평면의 규칙적인 분할, 무한한 공간, 공간속의 원과 회전체, 거울 이미지, 평면과 공간의 상극, 불가사의한 형체 등은 그의 독특한 시각 언어로서 작품의 핵심을 이루게 된다. 이 중에서 에셔가 죽을때까지 몰두한 법칙은 평면의 규칙적인 분할에 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