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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덕 감독과 토니 레인즈의 대화

로드365 2002. 7. 31. 06:35


내 영화는 풀 한 포기 같은 것, 그걸 키울 자신 있다

"김기덕 감독의 장점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이슈, 섹스, 정치를 시각적으로 사고하며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김기덕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나와 김기덕 감독은 남녀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김기덕 감독과 토니 레인즈의 만남? 그건 언뜻 짝이 맞지 않는 조합처럼 보인다. 김기덕의 영화에 언뜻 스며 있는 남성 중심적인 폭력성이 저명한 서구의 평론가이며 소수자의 영화를 옹호하는 것으로 유명한 토니 레인즈의 성향에 맞지 않을 것이란 선입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았다. 토니 레인즈는 <악어> <야생동물 보호구역> 등 김기덕의 초기 영화를 서구 영화제에 소개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최근 거의 작업을 마친 김기덕의 신작 <수취인불명>의 해외 영화제용 출품 자막의 감수를 위해 내한했다. 두 사람이 토론하는 김기덕 영화의 비밀을 듣는다.

FILM2.0 김기덕 감독과 토니 레인즈가 절친한 사이라는 건 뜻밖이다. 한국에서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곧잘 논란을 일으키며 일부 페미니스트의 공격을 받기도 하는데. 혹시 서로 논쟁을 벌인 적은 없나.

김기덕 굳이 그런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김기덕에 대해 갖는 생각을 토니 레인즈가 모두 받아들이거나 배척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레인즈를 향해) 대다수 한국 평론가가 날 싫어한다는 거지. 김기덕의 영화뿐만 아니라 김기덕도 싫어한다.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이다.

레인즈 내가 좋아하는 한국 감독들은 한국 내에서 인기가 없다. (웃음) 물론 나는 김기덕 감독 영화의 100% 팬은 아니다. 그래서 그의 작품을 볼 때 늘 객관적이고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편이다. 김기덕의 영화가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하는 것을 높이 사고 싶다. 그러나 김기덕의 영화는 묻기 힘든 어려운 문제를 떠올리게 한다. 그가 제기하는 어려운 문제의 초점은 세 가지다. 남성이 여성에게 가하는 폭력, 여성의 자아 이미지, 남성의 자아 이미지를 세계의 어떤 다른 감독보다 극단적으로 다루고 있다. 그의 영화가 문제작으로 받아들여지고 평론가들이 그를 비판하는 건 별로 놀랍지 않은 일이다. 그의 영화가 항상 성공적으로 이슈를 다룬 건 아니지만 계속 많은 문제를 제기하고 있고 그걸 풀어내는 방식이 매우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룬 것도 많다.

김기덕 나는 당신이 내 영화 중 <파란 대문>과 <섬>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느낌을 받고 서운하고 아쉬웠다. 정말 그런가?

레인즈 처음 두 작품 <악어>와 <야생동물 보호구역>은 흥미로웠다. <파란 대문>과 <섬>에 다소 실망한 건 사실이다.

김기덕 혹시 내 영화가 한국과 외국에서 공격적인 성향을 계속 지키고 주류가 아닌 언더그라운드에 머물기를 희망했던 것 아닌가. <파란 대문>과 <섬>이 베를린과 베니스에 출품되고 내 영화가 조금씩 메이저로 흘러가는 게 아닌가 하고 우려했기 때문이 아닌가.

레인즈 하하, 그런 이유도 있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파란 대문>은 드라마와 상황 설정에 관습적인 부분이 있었다. 대중을 향한 몸짓이라고 할까. 그런 흔적이 보였기 때문이다. 베를린이나 베니스에 진출했다고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다. <섬>은 <파란 대문>과 달리 언더그라운드의 패기로 되돌아간 게 확실하지만 결과적으로 <섬>과 <파란 대문>에 대한 비판은 작품 자체에 관한 것이지, 주류와 비주류의 구분에 따른 것이 아니다.

FILM2.0 토니 레인즈씨는 <수취인불명>을 어떻게 봤나?

레인즈 김기덕 감독과 이 영화에 대해 제대로 얘기를 나누지 않아 이른 감은 있지만 지금까지 그가 만든 작품 중 가장 뛰어나다. 절반은 아주 만족스럽고, 나머지 절반은 아주 흥미롭다. (웃음)

김기덕 영화의 완성도가 나아지고 있다는 식의 평가라면 토니의 평을 거부하고 싶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걸 받아들인 거라면 행복할 것이다.

FILM2.0 김기덕 감독은 늘 저런 식이다. 국내에서 공격을 많이 받는데 굉장히 맷집이 세다. 끄떡도 하지 않는다. 토니 레인즈씨는 '김기덕적인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레인즈 <수취인불명> 얘기를 좀더 해보자. 이 영화에는 여러 등장인물이 집단으로 나온다. 또한 다양한 등장인물의 여러 이야기를 교차편집으로 보여준다. 앞부분에 나오는 등장인물을 관객에게 소개시키는 장면에서는 교차편집이 빠르게 진행된다. 두번째로 영화를 보니 그 빠른 컷들이 사실은 주의 깊게 구조화돼 있었다. 여기서 제시된 것들이 대사가 아닌 이미지로 보여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FILM2.0 김기덕 영화를 스타일 면에서 높게 평가하는 것인가?

레인즈 보여주는 이미지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웃음) 이미지를 보여주는 방법에는 동의한다. 예를 들어 <섬>은 남녀관계에서 생길 수 있는 강한 의존, 서로를 노예로 만드는 모습이 강한 시각 이미지로 나타난다. 김기덕 감독의 장점은 세상에 존재하는 사람이나 이슈, 섹스, 정치를 시각적으로 사고하며 이미지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김기덕 영화에서만 볼 수 있는 특징이다. 하지만 나와 김기덕 감독은 남녀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전혀 다르다.

김기덕 계속 내 영화의 시각 이미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데 한국에서도 그건 마찬가지다. 내용, 주제에는 공감하지 않지만 시각 이미지는 뛰어나다는 식의 평가 말이다. 이미지는 파편일 수밖에 없다. 내 영화는 파편적이지 않다. 일관적인 이미지를 통한 삶의 아이러니,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가 아닌 의미를 담아냈다.

레인즈 충분히 이해한다. 하지만 감독은 표현하는 사람이다.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건 부인하거나 간과할 수 없는 김기덕 감독의 고유한 강점이다. 나는 <수취인불명> 이전의 영화 중에는 두번째 영화 <야생동물 보호구역>을 가장 좋아하는데 그 영화의 클라이맥스는 우정과 사랑을 매우 시각적인 방식으로 담아냈다. 사람들 사이의 배신을 이미지만으로도 잘 나타낸 것이다. 그 주제는 개인적으로 많이 와 닿았고 감동적이었다. 우연인지 모르지만 <야생동물 보호구역>에서 중요한 관계는 두 남자의 우정이고 <섬>이 중시한 건 남녀관계다. 내가 보기에 김기덕 감독은 남자들 사이의 관계를 더 사실적이고 믿을 수 있도록 그려내는 것 같다. (웃음)

FILM2.0 김기덕 감독의 영화는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잘못된 관계를 바닥까지 내려가서 비춘다. 이를테면 억누르는 남자와 억눌린 여자의 관계를 폭력과 성을 통해 끔찍하게 묘사하고, 그렇게 극단적으로 밀어붙인 다음 영화 말미에 희미하게 구원의 여지를 암시하는 경향이 있다. 거기까지 가 닿기까지의 과정 묘사에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토니 레인즈씨는 불편하지 않은가?

레인즈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은 아니지만 다시 <수취인불명>을 예로 들어보겠다. 이 영화에서도 두 남자 사이의 관계가 중요시된다. 개를 사서 잡아다 파는 조재현은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미국 병사 사이에서 태어나 따돌림당하고 고통을 겪는 양동근을 조수로 고용한다. 그리고 그를 매우 잔인하고 거칠게 대한다. 그런데 양동근이 처음 개를 잡을 때 갑자기 흥분해서 정신이 나간 것처럼 행동하자 조재현이 갑자기 그를 따뜻한 아버지처럼 대한다. 그 관계가 구원이라면 구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김기덕의 그런 묘사 방식이 참 흥미로웠다. 구원이라는 건 사실 가톨릭적인 개념이다. 아까 김기덕 감독이 한때 2년간 목사가 되기 위해 공부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그것이 그의 영화의 많은 부분을 설명해 준다고 받아들였다. 가톨릭과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육체를 죄악이나 폭력, 나쁜 것으로 대하면서 그 육체 너머 순수한 마음과 구원을 보는 것이다. 장 주네의 소설과 흡사하다. 가장 나쁜 것에서 휴머니티를 끌어내는 것이다.

김기덕 내 영화의 저변에 그런 것이 깔려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 영화의 구원은 물리적인 것이 아닌 추상적인 것이다. 내가 정말 보여주고 싶은 것은 심리적인 해방감이다. 이 세상은 변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그걸 인정하고 바닥까지 내려가는 걸 두려워하지 않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수취인불명>의 포스터에 적힌 문구 중에 ‘우리의 잔인함은 어디서 왔느냐’라는 말이 있다. <수취인불명>은 초반에 일제시대와 6.25를 거친 우리의 역사를 보여주고 미군기지에 얽힌 삶을 통해 일제시대의 역사까지 반추하게 만드는 구조다. 그런 구조로 지금 우리가 지닌 잔인함은 어디에서 기인했느냐를 추적해가는 것이다. <수취인불명>에서 가장 잔인한 장면은, 아버지가 앞마당에서 아들이 어쩌다 빠진 구덩이에서 발견한 권총을 고쳐서 광에 들어가 자신이 기른 닭을 쏴보는 장면이 있다. 나는 그것이 가장 한국적인 잔인함을 보여주는 풍경이라고 생각한다. 녹이 슨 권총에 묻어 있는 역사적 잔인함의 흔적 같은 것. 그렇게 고통스럽게 뿌리 깊이 스며든 잔인함은 우리의 삶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고쳐지지 않는 것이다. 영화에 나오는 낡은 가족사진은, 어쩌면 일제시대의 것일 수도 있지만 거기서 풍기는 푸근한 정서는 우리가 잃어버렸고 되찾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나한테는 구원이다.

레인즈 나도 꼭 김기덕 영화에서 나타난 구원이 가톨릭적인 배경을 깔고 있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니다. 그의 영화에 나타난 구원은 아주 세속적인 구원이다.

김기덕 우리는 사실 서로 대립되는 의견을 나누는 게 아니다. (웃음) 내 영화의 태도를 부연하는 것뿐이다.

레인즈 폭력에는 여러 스펙트럼이 있다. 다른 사람과 맺는 관계를 완전히 폭력으로만 푸는 사람이 있다. 또 매우 심리적인 폭력도 있다. 내가 김기덕 감독 영화의 잔혹함에 대해 흥미롭게 생각하는 건 그가 관객을 공격하고 싶어한다는 것이다. <섬>을 예로 들면 여주인공이 낚싯바늘로 자해하는 장면을 극단적인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건 굉장히 공격적인 태도다.

김기덕 그렇다. 고백하자면 난 관객을 공격하고 싶은 성향이 강하다. 대다수 관객이 나보다 똑똑하기 때문에. 똑똑하지만 세상의 이면에 있는 걸 놓치고 인정하지 않으려 들기 때문에. 나는 늘 사회의 바깥에 있는 사람과 심정적으로 동일시하면서 사회의 중심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가 포획한 이미지를 던지는 것이다. 그건 내가 세상에 망설이며 내미는 화해의 악수다.

FILM2.0 김기덕은 한국에서 가장 자신만만한 감독이다. 예전에 그는“지금 내 영화는 6,70점이지만 언젠가 ‘김기덕’이라는 이름의 고유명사로 영화사를 쓸 날도 올 것"이라고 한 인터뷰에서 큰소리쳤다. 그래서 함께 지켜보자고 했는데. 토니 레인즈씨는 어떻게 생각하나?

레인즈 자신감은 아주 좋은 거다. 그런데 사실 김감독은 자기 말처럼 그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아니다. (웃음) 자신감은 김기덕 감독에게 생산적인 작업을 할 수 있게 해주는 동력 같은 것이라고 느껴진다. 다른 감독들의 영화는 관객에게서 뭔가를 이끌어내기 위해 부드럽게 접근하는 경우가 많지만 김기덕 감독은 바로 주먹을 날린다. 다만, 그렇게 주먹을 먹였을 때 어떤 반응이 나올지는 알 수 없지만. (웃음) 부정적으로든 긍정적으로든 그의 영화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예측불능의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정작 주먹을 먹이는 김기덕 감독 자신도 관객이 어떻게 반응할지는 거의 예상하지 못한다는 문제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김기덕의 주먹을 가장 좋아한 경우는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다.

김기덕 그 영화는 한국에서 가장 심하게 공격을 받았다. (웃음).

레인즈 <야생동물 보호구역>에는 잊을 수 없는 장면이 있다. 장동직이 공원에서 로뎅 조각상의 머리를 훔쳐 달아나는데 경찰이 총을 쏜다. 아마 총알이 발사되지 않았는지 모른다. 장동직은 핍쇼장에 들어가 여주인공을 훔쳐본다. 좌절한 여주인공은 옷을 벗지 않고 흐느끼기만 할 뿐인데도 장동직은 그 앞에서 자위를 한다. 전혀 성적인 흥분을 일으킬 수 없는 장면에서 그런 광경을 묘사하는 것은 고 김기영 감독이라도 전혀 꿈꾸지 못했을 상상력이라고 생각한다. 장동직이 그곳을 떠날 때 배경에는 아랍풍의 음악이 흐르고. 공간과 인물의 심리를 그렇듯 뛰어나게 묘사한 건 좀처럼 보기 드물다. 놀라운 장면이었다.

김기덕 앞서 얘기한 자신감 말인데... 영화의 100년 역사를 바꿀 만한 자신감이 아니라 나만 할 수 있는 걸 끝까지 해낼 것이라는 자신감을 말한 것이다. 그밖에 달리 도전할 게 없다. 아주 소박한 자신감이다. 풀 한 포기를 키워낼 수 있는 자신감이라고 할까.

2001.03.15 / 김영진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