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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미안 허스트 Damien Hirst,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

로드365 2011. 6. 26. 20:21

<데미안 허스트(Damien Hirst)>
 
현대 미술의 살아 있는 전설로 불리는 데미안 허스트.
영국 출신의 그는 높은 예술성과 상상력, 악동, 치기, 엽기의 경계선을 너무나 쉽게 오르내리면서도
전세계 미술계에 가장 영향력 있는 작가로 일찌감치 자리 매김을 했었습니다.
1965년생인 그가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91년, 영국의 젊은 작가 그룹을 이끌고 있던 그는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죽은 상어를 넣고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 (Physical Impossibility of Death in the mind of Someone Living)'이라는 기묘한 제목을 붙인 작품을 발표하면서입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1991년 작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
죽은 상어를 포름 알데히드 액 속에 집어 넣었다. 죽은 상어의 몸에 모터를 달아 포름 알데히드 용액 속을 돌아다니게 하기도 했다.>
 삶과 죽음이라는 명제를 달고 생물의 사체를 직접 보여 준다는 그의 작업은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한편에서는 새로운 예술적 시각의 발견으로 큰 각광을 받게 됩니다.
 

<2008년 데미안 허스트 스스로가 기획하여, 전시 작품 판매 완료라는 전무후무한 성공을 거둔 작품전 '내 머리 속의 영원한 아름다움(Beautiful Inside My Head Forever)'>
 
이후 그는 비슷한 류의 작업들을 이어 갑니다. 소, 유니콘으로 변형시킨 말, 양, 얼룩말 등 그는 계속해서 푸른 빛깔 포름알데히드 용액 상자 속에 '죽음'의 증거물들을 진열시켰습니다.
심지어 죽은 소 머리와 살아 있는 파리들을 유리 방 안에 집어 넣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삶의 순환을 보여준다고 한적도 있습니다.
 


<데미안 허스트의 작품 '1000년(One Thousand Years). 유리 방 안에는 전기 해충 구제기가
설치되어 있고, 죽은 소머리가 뉘여져 있다. 파리들은 소머리에 알을 낳고 날아 다니다가
전기망에 걸려 죽는다. 알에서 부화한 파리들은 그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
 
그의 이러한 작품 세계는 미술 시장에서 놀라운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1991년, 1억원 가량에 거래되었던, 죽은 상어를 다룬 그의 첫 작품 , <살아있는 사람의 마음 속에 있는 육체적 죽음의 불가능성>은 지난 2006년 140억원에 팔렸으며 2008년 전문 기획자나 에이전시의 도움 없이 데미안 허스트 스스로 기획한 경매전 '내 머리 속의 영원한 아름다움(Beautiful Inside My Head Forever)'전은 전작품 판매라는 놀라운 결과를 내놓습니다.
판매가 된 작품 가격만도 우리 돈 1천억원이 넘는다고 하니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입니다.
 

  
<'내 머리 속의 영원한 아름다움(Beautiful Inside My Head Forever)'전 전시 작품>
 
2007년에는 세상을 놀라게 한 또 한 작품을 발표하는데, 실제 해골에 백금과 금, 다이아몬드로 장식한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라는 작품이었습니다.  
진짜 죽은 이의 해골에 금과 백금 외에도 8,601개의 다이아몬드를 박아서 넣은 이 작품은 5천만파운드, 우리 돈 약 1천억원에 팔려 나갔습니다. 
 


<신의 사랑을 위하여(For the Love of God)>
 
인간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여야 할 운명, 죽음.
그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이토록 기발하고 엉뚱하게 예술적 시각을 들이대는 데미안 허스트.
그렇게 함으로써 유명해지고, 수천억원의 돈을 벌어 들인 그 사람.
나는, 우리는 그를 또 다시 어떻게 받아들여할지 그의 죽음에 관한 생각과 표현과 예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좀체 생각이 정리되지 않습니다.
 
이해가 될듯, 전혀 그러지 않을듯 엽기와 천재적 예술성의 경계를 오가는 그를 바라 보며 푸른 빛깔의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마이 리틀 포니'로 만들어져 들어가 있는 그의 또 다른 모습과 그것을 '예쁜 포장용 박스'로 생각한 한 어린아이의 생각이 묘한 절충점을 이룬다는 느낌이 듭니다.  출처